너란 그늘을 애써 외면해보지만,

in #kr7 years ago

습관적으로 틀어놓는 플레이리스트 안에서도 그 날의 기분, 컨디션에 따라 마음에 유난히 크게 와 박히는 곡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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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 보다는 늦었지만 점심시간으로는 약간 이른 11시 남짓, 겨울 오전 특유의 공기를 폐에 가득 채우며 걸었다. 퇴사자의 여유, 혹은 방황.
버스에 올라타니 빨갛게 얼어붙은 양 뺨이 순간 따뜻한 히터 바람에 녹으며 살짝 저릿한 기분이 든다.
현관을 나서며 두 귀에 끼워넣은 이어폰에는 나의 자아로 대변되는 플레이리스트들이 쉴새없이 돌아가고 있었고, 곡들은 별 감흥없이 강변북로를 타고 한강으로 흘렀다.

요즘 서울은 러시아보다 춥다더라, 햇살은 눈부신데 한강은 부분 부분 얼어있었다. 새로 다리를 세울 예정이었는지 공사중인 다리가 보였다. 크레인은 멈춰있었고,
고요했다.
얼어붙은 한강 위로 햇살이 부서져 내렸다.

그 때 바뀐 트랙, 감흥 없이 흘러갔던 많은 곡 중에 오늘을 관통하는 이 곡.

'나는 아니야
쉽지 않을 것 같아
여전하게도 넌 내 하루하루를 채우고
아직은 아니야
바보처럼 되뇌는 나
입가에 맴도는 말을 삼킬 수 없어
It's not fine.'

ㅡ 태연 'Fine' 중.


겨우 두 달이었다.
많은 일이 있었던 두 달.
소중한 걸 많이 잃었던 두 달.
모든 것들을 영원히 반응하기엔 나도 사람인지라 으레 적응하고, 괜찮아지고, 무뎌진 채로,
일상으로 돌아오곤 했지만,
그렇지만,
버스 창가에 앉아 눈부신 한강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문득
가라앉았던 생각들이 둥실 떠오르는 것이다.


누군가에겐 인생을 통째로 뒤흔들 수도 있는 결정이,
누군가에겐 그저 하나의 사건 정도로 기억되기도 한다.

한 때 나를 위로했던 아티스트의 죽음, 많은 동료들의 퇴사,
...

파편처럼 흩어진 하나하나의 사건들이, 이렇게 얽히고 설켜 한 점을 만든다.
모든 사건들. 모든,
그늘들.


나는 회사에서 외부 파트너와 제휴를 맺고 외부 콘텐츠를 내부 서비스로 유통하는 업무를 했었는데,
파트너 중 한 분은 응급의학과 의사이자 메디컬 에세이스트이셨다.
갑작스럽게 퇴사를 결정하고 나서 이 콘텐츠를 매니징 하는 것까지로 내 업무를 종료하게 되었다.
이번 이야기는 할머니의 '자살'이었다.

http://bit.ly/2o9KWlw

수많은 사람들이 삶의 고통을 끝내고 편안한 길로 가기 위해 자살에 도전한다.
하지만 죽음의 순간을 가장 가까이서 직면하는 사람이 말하기엔
자살이란 건
그 결심을 후회할 정도로 고통스럽고 괴로운 과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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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괴로움은 떠난 사람이 남겨진 사람에게 내려준 저주와도 같다.
남겨진 사람들의 괜찮아진 것만 같던 어느 날에도 불쑥, 창처럼 뾰족하게 마음을 찌른다.


속보가 떴던 저녁을 기억한다.
정신없이 포털을, 기사를, 커뮤니티를 새로고침하면서 맘을 졸였다.
그냥 아무것도 안해도 좋으니 살아있어만 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모순적이지. 나는 그럴 자격이 없었는데.

아파서 병가를 내고 누워있던 나, 천장에 가로로 길게 설치되어있던 가스 배관이 유난히 크게 보이던 날,
목을 매면 얼마만에 숨이 끊길까 생각했던 그 때 -


1월의 마지막 날은 많은 동료들이 회사를 떠났다.
이미 정이 많이 들어버린 팀원부터, 오며가며 목례만 했을 뿐 대화는 나눠보지 않은 동료들이
앞다투어 남겨진 사람들의 자리를 돌았다.
나는
그저 퇴사라는 게 남의 얘기인 것처럼 막연한 기분으로 작별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나서 무슨 결심이 섰는지,
그로부터 일주일이 채 안되어 사직서를 썼다.


모든 것이 바뀌는 바람에 사는데 정신이 없어져
우습게도
문득 문득 삐져나오던 죽음에 대한 생각은 당분간 서랍에 넣어놓고 풀기 어려운 자물쇠로 걸어 잠갔다.

이 버스는 상암으로 향한다.
내 삶은 어디쯤 와 있고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걸까.
예상치 못하게 퇴사라는 변곡점이 생겼다. 하강곡선이 될지, 상승곡선이 될지 모르겠다.

각자의 무게, 각자의 불안.
괜찮지 않은 마음을 끌어안고 차가운 한강을 달린다.

태연 'Fine'

입가에 맴도는 말을 삼킬 수 없어
It's not f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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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 합니다. 그리고 응원합니다. 😊

와, 첫댓글! 감사합니다 :) 스팀잇 알아가는 재미가 있네요!

자살 외면하지만
주면에서 자주 일어나고 있는 일
한번씩 주변 누군가의 자살 소식을 들을 때 마다 쎄해 집니다.

참 듣고 싶지 않은 소식인데 말이에요... ;( 새해에는 주변 사람들을 더 잘 돌보고 헤아려야겠어요.

문장력이.. 대단하시네요. 빠져서 글을 읽었습니다. 응원하겠습니다.

우와아 극찬이십니다! 댓글 보고 기분이 너무 좋아졌네요. 아직 많이 부족한데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희희, 열심히 써볼게요 :D

평소에 아무렇지 않게 들었던 가사가 어느 순간 제 마음 속에 푹 들어와 휘젓는 날이 있죠. 훌륭한 글 잘 읽었습니다. 먹먹한 마음으로 오랜만에 Fine 들어봐야겠습니다.

맞아요. 마음 속에 푹 들어와 휘젓는다는 표현이 좋네요..! 긴글 읽어주시고 댓글까지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감성이 정말 돋보이시는군요. 앞으로 좋은 글 많이 기대하겠습니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