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프레소 더블
집에 있는 에스프레소 머신. 2003년 영국에서 처음 샀다. 두 번째를 2007년 한국에서, 세 번째를 2017년 12월에 샀으니 벌써 썼으니까 벌써 14년째 같은 모델을 3대째 쓰고 있다. 다른 기종을 안써봐서 비교 하기는 힘들지만 Coffee Geek이라는 곳에서 꽤나 좋은 점수를 받았다. 나의 주관적인 점수는 100점. 사진에서는 안보이지만 옆에 원두 그라인더도 있는데 굵기 조절 맞춰서 뽑으면 몇 년 동안 변함 없이 맛있는 에스프레소를 내려 준다. 고장 한 번 없이 튼튼하다.
한국에서는 자판기 커피도 쓰다고 먹지 않던 내가 이렇게 머신까지 사서 하루에 두 세번씩 더블 에스프레소를 내려 먹는 커피홀릭이 된 이유는 별 거 없다. 그냥 여자 친구에게 우습게 보이지 않고 싶어서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되지 않아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 말이 성인이지 사실 그냥 키만 멀대 같이 큰 주민등록증의 잉크도 제대로 마르지 않았던 애송이였고 매일 마시는 음료는 코카콜라, 어쩌다가 카페에 가면 오렌지 주스. 그런 매일매일 가방 양 옆 그물망에 콜라 두 캔을 챙겨 가는 애송이를 귀엽게 봐 준 연상의 여자가 있었고, 세 살 많은 여자의 이끌림에 그렇게 사랑에 빠졌던 것 같다.
스타벅스가 우리 나라에 2003년인가 2004년에 이대 앞에 처음 생겼고 그 전까지 커피를 즐기는 문화가 한국에는 없었다. 다들 커피 하면 에스프레소가 아니라 맥심과 자판기였고, 카페는 많았지만 메뉴판에는 주로 캔음료와 심지어는 김치볶음밥 같은 식사 종류가 더 많았다. 커피를 시켜도 멀건 헤이즐넛향료 가득한 물 아니면 맥심으로 원액을 만들어 우유와 물을 타주는 카페 모카가 나갔다. 카페 장사하기 참 좋았던 시절, 역시 사람은 물장사를 해야 돈을 버나. 지금처럼 비싸면 천만원대인 머신들을 살 필요가 없었던 때가 있었다. 거기다 알바비는 이천원. 일주일 내내 일해도 30만원도 못받았다. 최저임금은 뉘 집 개 이름이라니, 지금 그 때처럼 일하라면 노동청에 고소부터 할테다. 참 힘들었는데. 유학 가기 몇 달 전에 명동 한복판에서 알바를 하는 이 몸이 계셨다. 허허
이런 분위기에서 살았으니 커피강국 일본에서 온 여자친구에게는 참 신기하게 보였나보다. 난 걔가 신기했지만. 스타벅스 뿐만 아니라 카페 네로, 커피 리퍼블릭, 코스타 같은 다양한 커피 체인과 거리 구석구석 숨어 있는 카페들을 시간 날 때 마다 데이트라는 명목으로 데리고 다녀도 항상 콜라와 오렌지 주스를 주문 하는 애송이는 멋지고 존경하고 싶은 든든한 남자라기 보다는 그저 귀엽고 돌봐주고 싶은 꼬마애였다. 사실 나보다 세살이나 많았으니 부정하기도 그렇고. 그리고 난 그게 싫었다. 무시 당하는 느낌이랄까, 거기다 그 당시에도 종종 연락하는 쿨한 그녀의 전남친은 나보다 8살이나 많았다. 물론 내가 객관적으로 키도 더 크고 잘생겼지만(ㅋㅋ) 어른은 아니었으니 더 싫었겠지.
그 날도 같이 데이트를 하다가 카페에 들렀다. 앉아서 메뉴를 보는데 '오늘도 오렌지 주스지? 귀염둥이' 라며 깐족대는 여친을 보자 누적되었던 무언가가 뻥 터졌고 '아니, 나도 오늘부터 커피 마실거다. 하나 골라줘바.' 라고 세게 나갔다. 생각했던 반응이 아닌데다 커피까지 마신다니 그 사람은 놀랬고 무리하지 말라며 놀려서 미안하다고까지 했지만 오히려 그게 더 나를 부채질했다. 장난아니니 빨리 커피 하나 골라 달라고 재촉했고, 주저주저 하다가 가장 단, 사실 커피라기 하기도 민망한 카페 모카를 사왔다. 예전에 몇 번 그 사람이 마시는 커피에 입을 대보고 얼굴을 있는데로 찡그렸던 나를 알기에 설탕도 몇 봉지가 가져와서 넣어줬다. 일본 사람답게 무리하지 않아도 되니까 못마시겠으면 마시라고 오렌지 주스도 같이 사왔다. 그런 배려는 남자가 더 오기를 부리게 만든다.
한 손으로 쥘 수 있는 종이컵 속에는 갈색 커피의 크레마를 하얀 우유거품이 감싸고 있었다. 이게 뭐 별거라고 내가 애송이 취급을 당해야 하나, 컵을 들어 입으로 향했다. 후후 불며 위아래 입술로 동그랗게 밖으로 말린 컵의 가장자리를 살짝 물고는 아직 뜨거운 커피를 홀짝 들이켰다. 부드러운 우유 거품이 밀려 들어옴과 동시에 쉴 틈도 없이 쓰디쓴 검정 에스프레소가 입 안으로 들어와 혀를 휘감았고, 크아...소리를 내며 얼굴의 모든 근육을 사용해 찡그리기 시작했다.
그 때였다. 마구 찡그리는 내 얼굴을 늦가을 바람으로 살짝 차가워진 손으로 감싸며 아직 하얀 우유 거픔이 남아 있는 내 입술 위를 살포시포개는 그 사람의 입술을 느낀 것이. 그 때였다. 내가 커피를 좋아하기 시작한 것이.
그리고 17 년이 지났다. 난 런던이 아닌 서울에 있고, 내 인생을 나누는 사람은 한국 사람이다. 스키니 진도 펄럭이던 마른 예전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엑스라지도 꽉 끼는 덩치 큰 아저씨가 되었다. 카페 모카는 너무 달아서 입에도 대지 않고, 콜라나 오렌지 주스도 예전처럼 많이 마시지 않는다. 그렇게 많은 것이 변했다. 커피 마시는 습관과 머신만이 변하지 않았다.
나이를 먹었다. 미칠 듯이 눈이 감기지만 왜인지 잠 들 수 없어서 끄적이는 글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