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030오늘의서울시] 도시재생과 젠트리피케이션

in #kr6 years ago

[오늘의서울시] 뉴타운재개발과 도시재생은 무엇이, 얼마나 다른가?

서울시 보도자료도 언론보도도 별로 없고, 사실은 사회주택 정책에 대한 논평을 하고 싶었으나 자료가 별로 없어 이는 더 모아서 하는 것으로 한다. 다만 도시재생과 관련하여, 지난 주 한국도시연구소의 창립토론회에서 발표한 토론문을 공개하기로 했다. 개인적으로 현재 도시재생은 뉴타운재개발사업의 '대안'이라기 보다는 '연속사업'이라고 보는 편이다.

231C5E425774C37E2A.png

상호 알리바이의 구조: 도시재생과 젠트리피케이션

도시재생의 논리

도시재생은 뉴타운재개발의 후속편인가 아니면 대안인가. 사실 도시재생의 성격을 말한다면 이 질문에서 시작해야 한다. 사실 서울시에서 도시재생 시범사업으로 진행한 곳은 대부분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정비사업으로 추진될 수 없을 만큼 사업 경제성이 낮은 지역의 경우다. 다른 하나는 용도구역이 복잡하여 단일한 정비방법으로 사업추진이 불가능한 지역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도시정비사업을 해제하고 난 지역이 도시재생으로 진행하면서 대안개발 방식으로 전환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기존 정비사업과 별개로 ‘또 다른 정비사업의 유형’으로 도시재생이 진행된다.

이런 점에서 소위 도시재생의 목적인 ‘도시쇠퇴’에 대응한다는 논리 자체를 직접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소위 도시쇠퇴라는 것이 인구구조상의 변화, 국토 구조의 변화라는 맥락에서가 아니라 인과관계를 뒤집어서 도시가 쇠퇴했기 때문에 지역의 인구구조가 변화한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도시재생이라는 말에 앞서서 ‘무엇을 재생하는 것인가’ 혹은 ‘도시가 재생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먼저 답을 해야 한다.

젠트리피케이션의 방법

이런 맥락에서 현재 젠트리피케이션은 사실상 ‘저평가된 것의 정상화’라는 논리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상대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저렴한 주택에 산다는 것은 당연하다. 자본주의 도시에서 저렴한 주택은 낙후된 지역의 주택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지역이 ‘저평가’되었다고 진단하는 순간 가난한 사람들의 주거지는 곧 비정상적인 주거가 된다.

이 때문에 주거환경개선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대상이 결국 개선된 주거환경에서는 살 수 없는 필요와 공급의 불일치가 나타난다. 젠트리피케이션은, 특히 한국의 젠트리피케이션은 많은 경우 공공투자를 매개로 촉발된다. 성수 지역의 전략정비구역과 도시재생사업은 모두 서울숲을 매개로 발생한다. 연트럴파크는 400억원이 넘는 경의선숲길 조성사업의 결과다. 시장활성화 정책이 시장에 내몰림을 만든다.

기본적으로 도시재생이 쇠퇴=저평가라는 토대 위에 서있는 이상, 도시의 다층적인 구조는 파괴된다. 젠트리피케이션은 쇠퇴 혹은 도시 공간의 다양한 측면을 평평하게 만드려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뉴타운 재개발이 강남북 균형발전이라는 논리에서 시작되었고 도시재생이 거쳐가는 자리에 또다시 강북 균형발전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 역설은 젠트리피케이션이 자연발생적인 현상이 아니라 상당히 인위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완충지역이 없는 도시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지역에 살지 않도록 하는 방법은 ‘수익자 부담의 원칙’에서 주거와 장사의 공간을 빼내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 비닐 하우스에서 사는 것이 싫다면 이들에게 거주가능한 주거를 공급하면 된다. 하지만 공공의 주택공급 방식은 이런 방법을 택하지 않는다.

그렇게 밀려난 사람들이 밀려날 곳이 있어야 하는데 많은 경우 그렇지 않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이 밀려나면 그 사람들 덕분에 주변 지역의 거주비가 오른다. 공공이 공급하는 주택이 더 많은 부담을 지지 못하는 공공 때문에 안그래도 오를 만큼 오른 시세에 연동하는 주거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구조가, 소위 대안적인 주택공급의 방식이라고 이야기 되는 동안 쫒겨나는 사람에게 당연하게 보장되어 왔던 임대주택은 역설적으로 뉴타운재개발이 되지 않기 때문에 공급이 되지 않는 역설에 놓였다.

박원순 시장 초기 청년주거 정책이 기존의 임대주택을 분할 공급하는 방식으로 추진되고, 임대주택을 공급해야 하는 SH공사는 전세전환률을 높여서 수익을 높여나갔다. 도시에 완충지대를 만들어 주어야 하는 공공이 스스로 그 역할을 포기한 셈이다.

상생이라니, 당사자 합의의 한계

궁중족발의 사례는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의 비극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이 진부해진 상황에서 외려 공공의 최소한의 개입이 보여주는 실패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종로구는 낙후된 서촌 골목의 상권을 되살리기 위해 세종거리 조성사업을 벌이면서 5억 2천만원의 돈을 쏟아 부었다. 그 덕분에 상권이 살아났고 기존의 상인들이 쫒겨난 것이다.

여기에 지역 상생협약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얼마 전 만났던 종로구청장은 궁중족발의 건물주가 상생협약이 맺어진 후에 들어온 건물주라서 상생협약 대상이 아니었다며 쓴 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거리라는 공간 자체가 상생의 대상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건물을 소유하고 있는 건물주의 잠정적인 상생에 막대한 공공재원이 투자된다. 그런대로 여전히 상생협약으로 도시재생의 젠트리피케이션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이것이야 말로 엄청난 인지부조화가 아닌가.

맘상모를 비롯한 여러 영세상인들이 도심활성화라는 명목으로 진행되는 도시계획 발표에 쫒겨나기 시작하는 현상이 이처럼 반복되는데도 이를 반복하는 것은 무책임을 넘어서는 공범화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커먼즈라는 다른 공간

공간을 사용하는 논리가 철저하게 소유 구조에 고착되어 있고, 그 소유 구조 역시 민간과 공공의 사적 소유에 놓여 있는 한 어느 쪽이든 소유물의 경제적 가치 상승을 추구하게 된다. 일례로 한국철도시설공단이 관리하는 철도부지의 일부를 애경 사옥으로, 효성의 사옥으로 내놓게 되는 맥락에는 국유지를 가장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곧 ‘경제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논리가 놓여 있다.

도시에는 사적 소유자들의 인정구조 밖에 놓여 있는 다양한 공간들이 있고, 이 공간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생존을 위해 활용되었다. 노점상이 그렇고 무허가 건축물이 그렇다. 하지만 새로운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 주변의 노점상은 아파트 가격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철거되고, 무허가 건축물은 양심없는 사람들로 취급되어 막대한 변상금을 떠안는다. 하지만 이미 소유하고 있는 건물에 증축되는 부분은 소위 ‘양성화’라는 명목으로 불법에서 합법으로 전환되어 왔다.

이런 일방적인 구조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민간과 공공의 사적 소유에서 벗어난 새로운 도시공간을 생각하는 것은 낭만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절박함의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합법의 방법이 소유권이라는 구조에 포섭되어 있는 한 이를 피하는 방법은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공간을 획득하는 방법을 구상하는 것이고 이를 위한 싸움을 하는 것 밖에는 없다.

단순하고 참을성이 없는 대응으로 보일까. 하지만 자본주의 도시에서 기다리는 시간조차도 너무 비싸다. 구태여 커먼즈라는, 아직 정돈되지도 않는 개념들이 새삼스럽게 회자되는 맥락에는 한국 사회가 만들어놓은 어떤 대안으로도 구할 수 없는 도시의 현실적인 삶이 놓여 있다. 도시재생이 젠트리피케이션을 막고 도시의 쇠퇴에서 그곳에 살고 있는 시민들을 구해낼 수 있을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지금의 도시재생은 이미 형성된 도시의 권력 구조 어느 것 하나도 건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철거민들이 스스로를 ‘난민’이라고 칭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도시재생이 아니라 도시‘민’의 생존이 더 중요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