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 소공녀, 2017 >

in #kr6 years ago

<본 리뷰는 영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실존과 본질, 현실과 이상 그 사이에서"

영화란 역시 철학, 예술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인 듯하다.
예전에 '가장 따뜻한 색 블루' 리뷰에서 다루었던 실존주의가
이번에는 '소공녀'에서 다시 등장했다. 실존과 본질,
결핍과 결핍들이 어떻게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지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소공녀

소공녀(Microhabitat)라는 영화의 제목은
소설 소공녀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어린 시절 한 번쯤 읽어보았을 법한
이 소설은 인도에서 살던 한 세라 크루라는 여자아이가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런던으로 이사하게 되는 것으로
시작한다.

원래 부유한 아이였던 세라 크루는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세상을 떠나자
런던에서 미움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후 아버지와 사업 파트너였던 캐리스퍼드가
세라 크루를 찾아와 다시 부를 찾게 된다는 이야기다.

소공국의 공주라는 의미의 소공녀는
시련 속에서도 올바른 심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미의 소설로 볼 수 있다.

영화에서 이솜 씨가 주연을 맡은 '미소' 역시
이 소공녀와 닮은 점이 많다.

소설과 달리 미소는 부자였던 적이 없지만.
그녀에게는 밴드를 하던 시절을 회상할 수 있는
부유한 추억을 가졌다는 점이
원작과는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메타포와 실존주의

작품 속에서 미소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많다.
가치에 대한 우선순위가 그 대표적인 차이점이다.
미소는 위스키와 담배, 한약을 통해 일상의 행복을 찾는다.

머리가 하얗게 새지 않게 하기 위한 한약과
일과 끝나고 마시는 한 잔의 위스키,
그리고 걱정을 덜어주는 담배 한 갑이 그녀에게는 행복의 메타포다.

추운 방에 살기 때문에 남자친구와 사랑을 나누지도 못하고,
헌혈을 통해 데이트 비용을 마련하는 그녀이지만
그녀는 이 행복들은 포기할 수 없다.

시간이 지나고 물가가 오르면서 담뱃값과 위스키 값을
마련하기 어려워지자 그녀는 담배와 술을 포기하는 대신
월세를 포기하기로 마음먹는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차마 행동에 옮기지 못할 일이다.

그러나 방을 빼고 친구들의 집에 잠시 머무르자는
그녀의 선택은 꽤 과감하기까지 하다.

그녀는 방을 빼는 것보다 '에쎄 담배'를 포기하고
가격이 더 싼 '디스'로 바꾸는 선택을 더욱 아쉬워한다.

이렇게 영화는 행복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집을 나온 미소가 밴드 시절 친구들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진행된다.

실존에서 행복을 찾는 미소와
본질을 중요시하는 친구들 간의 대립이
영화 속에서 진행될 차례다.


현실과 이상 그 사이에서

미소가 찾아간 친구들은 모두 현실에 어느 정도 적응해 있었다.
그 친구들은 미소에게 '바람 든 거 같다'라며 그녀를 현실의
잣대로 평가했다.

회사원이 된 첫 번째 친구는 휴식시간에 포도당을 맞으면서까지
일하는 열혈 사원이었고, 예민하기 때문에 누구와 함께
잠을 잘 수 없다며 미소에게 거절을 표시한다.

두 번째 친구는 이미 결혼을 한 상태였는데, 피아노를 잘 치던 그녀는
요리를 못 한다는 이유로 시댁에서 구박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애써 괜찮은 척 살아가고 있는 친구는 힘드냐는 미소의 질문에,
그만 말하라며 눈물을 훔치고 만다. 그 친구는 현실이
자신이 원했던 인생이 아니었음을 미소를 보며 깨닫게 된다.

세 번째 친구는 신혼이지만 아내와 이혼을 앞두고 있는 남자였다.
그는 겉으로는 멀쩡하게 회사에도 출근하지만
밤에는 알코올 중독, 대인 기피 등의 정신적인 문제를 달고
살아가는 중이었다. 그는 결혼을 위해 새 집을 장만했지만
갚아야 할 빚이 산더미라며 미소에게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

이 밖에도 미소는 현실의 안정감을 추구하는 4번째 친구,
돈이라는 현실의 굴레에 갇힌 다섯 번째 친구까지 찾아가지만
친구들의 인생관과 미소의 인생관은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그들이 어떻게 밴드를 유지했는지 의아할 정도로
서로 불협화음을 내는 듯했다.

그들은 미소를 이상주의자로 간주하고, 현실에 빨리 적응하고
행복을 찾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정작 행복하지 못한 것은
그들이었고 미소는'실존의 선한 영향'으로 그들을 위로한다.

미소는 자신이 잘하는 '가사일'을 통해 현실에 적응해버린
친구들의 '존재'를 응원한다. 그들에게 맛있는 밥을 해주고,
청소를 해주는 것이 그녀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지만
그들에게 온기를 전해줄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집을 가졌지만 행복하지 못한 친구의 모습은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신세이지만 행복한 미소의 모습과
대조를 이루며 관객에게 실존의 중요함을 강조한다.

이렇듯 현실과 이상의 대조는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계속 등장한다.

미소가 가장 아끼는 사람인 '한솔'이 사우디로
해외 파견을 가기로 결심했을 때 그녀는 그를 향해 배신자라고 말했다.
현실에 적응해버린 자신의 친구들을 떠올리고
한솔이 역시 자신을 바보 취급 할까 봐 걱정한 것이다.

결국 미소는 한솔이가 사우디로 떠나가는 날
그에게 웹툰을 포기하지 말라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도구들을 선물한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현실에 안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는
그녀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밴드와 연출, 그리고 위스키


미소에게 밴드란 자신의 삶의 의미 그 자체였다.
밴드는 그녀의 실존이자 행복이었으며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이 밴드의 의미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희미해져갔고, 여전히 밴드를 추억하는 미소를 보며
다른 멤버들은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그러나 그들의 평가는 미소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이미 그녀에게 술과 담배는 일종의
'도그마(dogma)'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친구의 집에서 쫓겨난 직후 그녀가 바에서 찾아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술과 담배는 이미 그녀와 뗄 수 없는
자신의 일부다.

그러나 이렇듯 독단적이고 어리석어 보이는 미소에게는
현실에 찌든 사람들을 위로하는 묘한 능력이 있다.
그녀는 다른 멤버들에게 밥을 차려주고, 청소를 하며
그들을 위로했고, 자신이 청소 업무를 하는
술집 여자를 위로했다.

현실의 끝이라고도 평가할 수 있는 술집 여자에게
미소의 존재는 매우 독특했음에 틀림없다.

결국 봄이 오면 관계를 맺자던 남자친구 한솔이는
봄이 오기 전에 사우디로 떠났다.

우정을 나누고 꿈을 나누던 밴드 멤버들은 누구의
장례식이 다가와야만 서로 얼굴을 보는
그런 의례적인 사이가 되어버렸다.

작품 속에서 감독은 친구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조명한다. 또,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가지고 있는 '내적 결핍'
미소의 외적 결핍을 대조하며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연출이다.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미소의 결핍과
멤버들의 결핍 중 어떤 것이 더욱
가슴 아픈 일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버스가 지나가는 장면을 보여준다.
카메라는 계속해서 창문을 비추는데, 이는 흐르는 시간을
의미하고 흐르는 세계를 의미한다.

그렇게 잠시 뒤 미소의 백발이 얼핏 화면에 잡힌다.
이 연출은 미소의 존재는 그리 특별한 존재가 아니며
우리 주변에서 충분히 찾을 수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또 다른 '소공녀'가 우리 주변에 있을 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위스키를 마시기 위해 한약마저 포기한 백발의 그녀를
여전히 바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어쩌면 한강 둔치의 텐트에 사는 것이
그녀에게는 그리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아니, 오히려 이를 문제라고 생각하는
우리가 문제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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