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사변 육군전사 4권(67)

제9편 제6기 작전
제1장 38선 돌파와 국련의 결의
제1절 38선 돌파와 국제 동향
6.25사변이 발발하자 미국은 이를 세계적인 공산주의 침략으로 간주하였던 것은 기술한 바 있거니와 따라서 미국의 대 사변 조치는 단순히 극동의 일각 혹은 극동 만에 국한한 것이 될 수 없으며 전 세계적 시야를 가진 것으로 미국 대외정책 전반이라는 입장에서 개별적인 대책이 조절되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런고로 미국의 대한(對韓) 정책은 밀접히 서구방위와 관련하여 고려되었고 또한 근중동 문제와 다른 아시아 지역이 항상 국방성에서는 연결되어 있었다.
이러한 정책을 견지하는 미국은 단기 4283년 8월 30일 에치슨 국무장관이 중공군과 38선 돌파 문제에 관하여 극히 주목할 만한 견해를 공표하였는데 이 견해는 트루먼 대통령이 8월 31일에 행한 기자 회담과 그리고 9월 1일에 행해진 담화에서 명확한 지지를 받았다.
그 내용은 첫째로 미국은 사변이 끝나는 대로 대만에서 제7함대를 철수시킬 것이며, 대만 문제는 대일 강화의 한계 내에서 서로 같이 해결할 것이며, 다른 군대가 사변에 개입하지 않는 한 전면 전쟁은 없을 것을 명언하고, 둘째로 미, 중 관계에 언급하여 중공 개입을 경고하였다. 또 38선에 관하여 그 돌파 여부는 국련에 달려 있다고 그 후에 언명한 바 있었다. 이 성명은 솔직하게 승전의 자신을 표명하며 동시에 종전기의 국제적 위험에 대하여 외교적 포석을 한 것으로 보였다.
9월 15일 국련군이 인천에 상륙한 이래 9월 28일 서울 탈환에 이르는 동안 사변을 위요(圍繞: 둘러싼)한 국제 외교전은 세 가지 점에 집중되었다. 국련군이 전세를 만회하자 이 시기를 이용하여 정전 교섭을 개시하자는 것이 그 하나로서 이는 인도 등 군소국가가 움직였으나 소련 측의 변하지 않은 고집으로 표면화하지 못하였으며, 이런 약소국가의 노력은 그 후 12월에 이르러 13개국 결의안 12개국 결의안 및 3인위 등으로 다시 나타났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국제적 분위기를 받아 미소 각 정부도 타협의 초보적 타진을 한 듯 하였으나 이 역시 표면화된 아무것도 없었다.
둘째로 국련군이 서울 탈환을 전후하여 38선 문제가 세인의 주목을 이끌었는데 그동안 미국으로서는 공동 보조의 원칙 하에 서구 열국과 긴밀히 연락 협의하였던 모양이었다. 9월 27일에 이르러 미국 대변인은 38선 돌파 문제에 관하여 언명한 바가 있어 대체로 합의 타협된 한계와 견해를 표시하는 듯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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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koreanwar17님, 한국 전쟁의 역사적인 순간을 심도 있게 다룬 이 포스트, 정말 대단합니다! 특히 38선 돌파 전후의 국제 외교전과 미국의 정책 변화에 대한 분석은 흥미진진하네요. 에치슨 국무장관의 성명과 트루먼 대통령의 지지, 그리고 UN군의 인천 상륙 이후의 정전 교섭 시도들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자세히 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이처럼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꼼꼼하게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이 시기에 대한 추가적인 자료나 참고 문헌이 있다면 공유해주실 수 있을까요? 앞으로도 한국 전쟁사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 기대하겠습니다! 다른 Steemit 사용자분들도 이 포스트를 통해 한국 전쟁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활발한 토론을 이어가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