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닦아둔 시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는 여백

in #life2 days ago

나는 약속에 늦는 것을 깊이 경계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늦는다는 결과보다도 시간에 쫓겨 내 영혼의 평안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자체가 마음을 몹시 소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가능성이 아무리 작을지라도, 불안이 마음을 두드리는 순간부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하루의 거룩한 리듬은 미세하게 어긋나며 세상의 분주함 속으로 끌려가기 시작한다.
그래서 나는 늘 누구보다 먼저 집을 나선다.

이것은 단지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한 표면적인 배려가 아니다.
세상의 속도에 휩쓸려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세미한 음성을 놓치는, 그 영적으로 척박하고 불편한 상태에 내 영혼을 방치하지 않기 위한 나만의 치열한 몸부림이다.
상대가 약속에 늦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사람이 늦는 동안, 나는 카페의 한구석에 앉아 고요히 주님과 독대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 시간은 결코 버려진 기다림이 아니다. 이미 내가 자원하여 주님께 올려드린 구별된 시간이며, 나는 그 시간 속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충만한 은혜를 누리고 있기에 조금도 잃어버린 것이 없다.
오히려 내 영혼을 질식하게 만드는 것은,
약속 시간에 단 1분의 여유도 없이 헐떡이며 딱 맞게 도착하는 상황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효율적이고 정확하다고 부를지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그 순간은, 하나님 앞에서 내 마음을 기도로 준비할 가장 중요한 영적 호흡의 시간이 통째로 증발해 버린, 몹시도 빈곤한 상태처럼 느껴진다.

흘러가는 초침 대신, 은혜의 호흡을 고르는 자리
약속 시간에 쫓기듯 도착하면,
나는 겉옷을 벗기도 전에 사람을 마주하고, 곧바로 세상의 대화 속으로 던져지며,
이미 만들어진 세속의 흐름 속으로 아무런 영적 무장 없이 휩쓸려 들어가게 된다.

겉으로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약속은 지켜졌고, 사회적 예의는 다했다.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루를 성별해야 할 아주 중요하고 거룩한 한 구간이 내 삶에서 조용히 삭제되고 만다.

미리 도착한 카페에 고요히 앉아 있는 시간.
차가운 커피를 천천히 마시며 거칠어진 숨을 고르고, 세상의 소음을 차단하는 시간.
노트북을 켜고 그 앞에서 성경책을 펴거나 묵상 노트를 열어,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임재라는 지성소 안으로 서서히 걸어 들어가는 시간.
그 거룩한 여백의 시간이 없으면,
나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상대를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은 채 하루를 열어버린 깊은 탄식에 빠진다.
마치 영혼의 숨을 고르지 못한 채 깊은 물속으로 뛰어든 것처럼,

육신은 바쁘게 움직이고 미소를 짓고 있지만, 내 중심은 아직 하나님 안에 온전히 닻을 내리지 못한 채 부유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아직 세상의 소음이 영혼을 맴도는 얕은 여백
사람들은 종종 가볍게 말한다.
“한 시간 전이면 충분히 넉넉하잖아.”

하지만 나에게 한 시간은
참된 안식을 누리는 여유라기보다는, 여전히 세상의 시간표(Chronos)에서 하나님의 시간(Kairos)으로 전환하기 위해 물리적인 정리를 하는 과도기에 불과하다.
자리를 고르고, 주문을 하고, 음료를 받아 들고,
주변 사람들의 소음과 분주한 움직임 속에서 내 마음의 주파수를 하나님께 맞추어 익숙해지기까지.
그 모든 과정이 지나야만 세파에 흔들리던 마음이 비로소 잔잔한 호수처럼 가라앉기 시작한다.

이 물리적 적응의 과정을 지나고 나면,
정작 내 영혼이 주님 품에 온전히 ‘머무는 시간’은 거의 남지 않는다.
그래서 여전히 시계를 곁눈질하게 되고, 곧 일어나야 한다는 강박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지 못한 채 조급함이 남아있게 된다.
두 시간. 적어도 두 시간 이상이 주어져야,
비로소 나는 시계 바늘이 쫓아오는 세상의 굴레에서 완전히 풀려난 깊은 해방감을 맛본다.
그때부터 나는 시간을 그저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의 섭리 안으로 깊이 침잠하여 온전히 머물게 된다.

도심의 소란함 속에서 주님과 독대하는 은밀한 성소
장소가 굳이 중요하지 않다면 왜 꼭 카페여야 하느냐고 묻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다. 나는 약속 장소 근처인 홍대의 한 스타벅스 창가 자리에 앉아 있다. 내 삶의 작은 헌신이 닿기를 바라는 '러빙핸즈' 사역. 그곳에서 내게 맡겨주신 두 번째 귀한 멘티와의 뜻깊은 매칭을 앞두고, 멘토 양성과정 보강을 온전히 준비하기 위해 일찌감치 이곳을 찾았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소소한 일상, 이른바 TMI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 ‘지금 이 순간’은 무척이나 각별하다. 온갖 화려함과 소란스러움이 교차하는 복잡한 홍대 거리 한복판에 자리한 이 카페는, 다가올 영혼과의 만남을 위해 내 마음을 기도로 예비하는 나만의 은밀한 도피성이자 거룩한 골방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이곳에서 마시는 차가운 커피의 달콤함을 사랑한다.
연유라떼, 돌체라떼, 혹은 달콤한 카라멜마끼아또 한 잔.
커피의 쓴맛을 덮어주는 그 깊은 달콤함과 압도적인 부드러움은 마치 죄로 얼룩진 나의 치명적인 연약함을 남김없이 덮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한없는 은혜 같고,
단숨에 들이키기보다 천천히 음미하는 그 속도는 좁은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신자의 묵상의 걸음과 꼭 닮아 있다.

살을 에듯 추운 겨울날에도 기꺼이 찾는 얼음 가득한 이 차가운 음료들은,
서두르지 않고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이 고요한 시간과 너무나도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다.
몇 시간을 그 자리에 앉아 주님을 묵상해도,
얼음이 천천히 녹아내리는 중에도 마지막까지 처음의 달콤함과 청량한 향기를 은은하게 남겨주는 감사한 도구들이다.

고요히 멈춰 선 시간, 영혼은 가장 치열하게 깨어난다
내가 먼저 도착해 시간을 보낸다고 해서, 영혼을 무방비 상태로 둔 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지는 않는다.
빈 마음에는 언제나 세상의 잡념이 틈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순간처럼 항상 노트북을 켜 두고,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기록하거나, 기도 노트를 끄적이거나, 다가올 만남 가운데 성령께서 역사하시기를 묵상하는 등 영적인 무언가를 끊임없이 이어간다.
그것이 세상의 기준에서 돈이 되거나 생산적인 일일 필요는 전혀 없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생명의 시간을, 내 영혼을 맑게 다듬는 데 거룩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영적 감각이다.
그 감각이 충만해질 때,
나는 비로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완전한 안정을 누린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치열하게 내 내면을 말씀으로 채워가며, 세상에 휩쓸리지 않도록 나만의 거룩한 방벽을 세우고 있다는 확신이다.

세상의 궤도를 벗어난 걸음이 건네는 벅찬 평안
이런 나의 성향이 세상 사람들에게 흔하냐고 묻는다면,
결코 그렇지 않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분초를 다투어 딱 맞게 도착하거나, 효율성을 따지며 아주 조금 일찍 도착하는 삶의 방식을 따른다.
나는 그 세상의 보편적인 중심에서 꽤 멀리 떨어져 나와 있다.

그리고 정직하게 고백하건대,
나는 세상과 다르게 살아가는 그 사실이 참으로 감사하고 기쁘다.
오히려,
“나는 속도와 성취에 미쳐 돌아가는 세상의 방식과 같지 않다”는 사실,
그리스도인으로서 구별된 나만의 영적 호흡을 지켜내고 있다는 사실에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영적인 거룩한 쾌감과 평안을 느낀다.

조금 유별난 기다림, 그 이면에 담긴 이웃을 향한 사랑
내가 세상의 속도에 맞춰 살아가는 이들을 섣불리 정죄하거나 깎아내리지 않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의 연약함도 주님께서 품으시는 영역이며, 내가 일찍 도착하는 것은 그들을 판단하기 위함이 아니라 섬기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내가 보편적인 세상의 기준에 억지로 내 영혼을 구겨 넣지 않는 이유도 같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고유한 영혼의 리듬을 지키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내가 만나는 이웃들에게 그리스도의 평안을 흘려보내는 가장 선한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각자에게 허락된 믿음의 분량과 삶의 리듬이 있다.
지금 내가 홍대의 카페에서 노트북을 펴고 먼저 나아가 기도하며 준비하는 이 고요함이, 훗날 내게 맡겨질 멘티의 지친 마음과 가쁜 숨을 따뜻하게 다독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아름다운 이웃 사랑의 실천이 된다.

누군가의 시간을 하나님의 고귀한 선물로 경외하는 태도
나는 사람 사이의 신뢰란,
시간을 귀하게 여기고 지키는 것에서부터 싹튼다고 굳게 믿는다.
그것은 단순히 숫자로 표기된 약속 시각에 늦지 않는다는 기능적인 의미가 아니다.
정해진 장소에 물리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보다,
상대방에게 허락된 그 귀한 생명의 시간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고 존중하겠다는 경건한 태도에 가깝다.

시간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나의 이웃을 함부로 기다리게 하지 않겠다는 헌신이자,
상대의 소중한 하루에 나의 게으름이나 혼란을 무례하게 끼워 넣지 않겠다는 사랑의 의사 표현이다.
그래서 나는 늘 기꺼이, 그리고 부지런히 먼저 움직인다.
혹시 모를 세상의 변수들을 내가 미리 감당해 내고,
그 불안과 조급함의 책임을 내가 만날 이웃에게 결코 전가하지 않기 위해서다.

영적인 예비함이 생략된 만남의 메마름에 대하여
약속 시간에 1분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도착하는 것은
세상의 시선으로 볼 때는 아무런 흠이 없는 완벽함일 것이다.
하지만 나의 영적인 잣대로 비추어 볼 때,
그 안에는 가장 중요한 진주가 빠져 있다.
이웃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맞이할 기도의 준비가 끝난 상태.

세상의 시계에 쫓기어 헐떡이지 않는 평온한 태도.
말씀 안에서 이미 하루의 리듬을 굳건한 반석 위에 올려둔 단단한 마음.
그 영적인 예비함이 없는 상태에서의 기계적인 정확함은,
마치 향기 잃은 꽃처럼 형식만 남은 건조한 만남처럼 느껴질 뿐이다.

먼저 닦아둔 고요함 속에서, 마침내 하나님을 예배하다
나는 시간을 숫자의 묶음이나 소모품으로 보지 않는다.
시간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생명이요,
시간은 이웃을 향한 나의 태도이며,
시간은 거룩을 향한 준비이자, 변치 않는 신뢰의 증거다.
그래서 나는 늘 남들보다 두 시간 먼저 도착하여 기도로 자리를 닦고,
조금 더 오래 주님의 은혜 안에 머물며,
세상의 근심을 털어낸 가장 여유롭고 정결한 상태로 사람을 만난다.

이 좁고 유별난 방식이 나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가장 정직한 삶의 예배이며,
세상의 어떤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가장 견고한 영적 기준이다.
세상의 눈에 보편적이지 않아도 괜찮다. 미련해 보여도 상관없다.
나는 이미,
내가 이 고요하고 넉넉한 두 시간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지금 이 순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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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과 함께 깊이 경험하며 알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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