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심사- 부적은 희망이다
<부적은 희망이다!>
아래의 글은 2월 13일에 봉행한 정초 및 삼재기도 회향법회 법문을 요약한 내용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부적은 희망이다.
연등, 인등, 부적 다 똑같은 소원성취를 바라는 것입니다.
소원(所願) 바 소(所), 원할 원(願)으로 한번만 바랍니다.
희망(希望)은 바랄 희(希), 바랄 망(望)으로 바라고 또 바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희망은 소원보다 바라고 또 바라기 때문에 배로 강렬한 것입니다.
소원은 그냥 내가 바라는 바, 내가 무엇을 하고 싶다.
희망은 바라고 또 바라기 때문에 그 안에 힘이 생깁니다.
바라는 바가 응축되고 응축되어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결국 희망은 우리에게 힘을 주는 것입니다.
기도와 부적의 차이는 무엇인가?
기도는 제대로 하든, 잘못하든 어찌 되었든지 간에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제대로 하면 그게 수행이 되는 것이고, 잘못하면 헛고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효스님의 발심수행장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雖有勤行 無智慧者 欲往東方 而向西行
부지런히 수행하더라도 지혜가 없는 자는 동쪽 방향으로 가고자 하면서 서쪽을 향해 나가는 것과 같다.
有智人 所行 蒸米作飯 無智人 所行 蒸沙作飯
지혜가 있는 사람의 수행은 쌀로 밥을 짓는 것과 같으며
지혜가 없는 사람의 수행은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어리석은 마음으로 잘못한다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없습니다. 기도는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부적은 받기만 하면 되니 열심히 할 필요가 없지요.
기도라고 하는 것은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고 부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노력을 하려면 기도를 하지 말고 실천해라. 뭔가 노력을 하되 기도보다는 실제로 생산적인 노동을 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보장이 되면 아무도 부적 같은 거 안 찾고 기도를 안 합니다. 세상이라는 게 희한하게도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결과가 노력한 만큼 보장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적을 찾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적은 희망이다’ 라는 식으로 생각을 바꿔봅시다. 우리 인간에게는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밖으로 형상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내가 가장인데, 밖에서 열심히 일을 하는데 힘이 듭니다. 힘들 때 지갑에 있는 가족사진을 봅니다. 그러면 힘이 막 생깁니다. 왜? 내가 일을 하는 이유는 내 자식들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죠.
나의 소원은 우리 가정의 행복.
나의 소원을 밖으로 형상화시킨 것이 가족사진 입니다. 가족사진을 보면 이 아이를 내가 어떻게든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그래서 가족사진을 보면 내가 힘이 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수시로 변합니다.
희망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 마음속의 희망도 항상 크고 강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내 마음 밖에 희망을 형상화 시키는 것입니다.
즉, 내 안의 희망을 그대로 사진에 심어놓는 것입니다.
내 마음속의 희망이 이런저런 이유로 희미해지고 사라졌을 때, 내 마음밖에 만들어 놓은 희망을 보고 다시 내 마음속에서 힘이 생깁니다. 희망은 힘을 준다. 이것이 희망과 소원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희망을 형상화시켜서 내 안의 희망과 소원을 꾸준히 키우고 유지시키려고 노력을 합니다.
소원이 강하면 희망이 되고 희망이 강하면 힘이 생깁니다.
힘이 생기면 무언가를 하고자하는 의지가 생깁니다.
의지가 강해지면 누가 하지 말라고 해도 합니다.
결국 소원을 이루려면 무언가를 해야 합니다.
아무리 의지가 넘쳐도 어리석게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를 공들이는 마음으로 하는 게 아니고 수행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희망을 가지고 의지가 생기더라도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실천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