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12 이란의 미사일과 조선, 정태현 글

최근 이란의 미사일 역사가 궁금해 조사하던 중 한 장의 사진을 발견했다. 사진 속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의 김일성 주석과 이란 혁명수비대 장교들이 함께 서 있었다. 그 중에는 훗날 ‘이란 미사일의 아버지’로 불린 하산 테헤라니 모가담이 있었다. 정확한 촬영 날짜와 장소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사진 속 인물이 테헤라니 모가담이라는 설명과 김일성 주석을 만난 이란 군사대표단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은 확인된다. 흑백 사진 속 맨 아래 줄 오른쪽 첫 번째가 모가담이다.

사진이 역사의 전부는 아니지만, 때로는 공식적인 문서보다 역사와 시대를 더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 사진은 1980년대 이란과 조선이 그저 무기를 사고파는 관계가 아니었음을 암시한다. 두 나라 사이에는 무기 이전, 생산시설 건설, 기술자 파견, 군사훈련, 전후 개량을 포괄하는 장기 협력의 틀이 형성되고 있었다.

오늘날 이란의 미사일 창고와 지하 저장시설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격에 맞서 전쟁의 형세를 뒤집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중이다. 이란은 미국과 이스라엘에 비해 공군력과 위성정찰, 원거리 정밀타격 능력에서 불리하다. 그러나 미사일을 분산 배치하고 지하화했으며, 발사대와 생산시설을 여러 지역에 나누어 두었다. 한 곳이 공격받아도 전력을 완전히 제거하기 어려운 구조로 만든 것이다.

미국의 공습에도 이란의 미사일 창고는 파괴되지 않았고, 이란은 계속해서 상대의 군사기지와 주요 시설을 타격하면서 미국의 군사적 우위를 비용과 위험의 문제로 바꾸어 버렸다.

그 배경에 1980년대부터 이어진 조선과 이란의 협력이 있었다. 이란 미사일의 모든 기술이 조선에서 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란의 독자적인 연구와 중국, 러시아를 통한 기술 접근이 섞여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이란의 액체연료 탄도미사일 계열을 조사하다 보면 스커드와 로동 미사일, 그리고 조선의 생산기술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 전쟁에 맞선 미사일 국가
이란의 미사일 개발은 이라크와의 전쟁이라는 구체적인 전쟁 경험에서 출발한다. 1979년 이슬람혁명 이후 이란은 군사적으로 고립됐다. 1979년 11월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이 발생하자 미국은 이란의 자산을 동결했고, 무기와 군수품에 대한 수출을 차단했다. 1980년 9월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했을 때 이란군은 지휘체계와 장비, 부품 공급망 모두 불안정했다. 혁명 직후 기존 군 장교들이 숙청되었고, 보유한 미국산 전투기와 무기의 정비에 필요한 부품도 구하기 어려웠다. 그에 반해 이라크는 소련과 프랑스 등으로부터 무기를 공급받았다. 스커드 미사일과 프로그 로켓을 이용해 이란을 공격했다.

이란은 처음부터 탄도미사일을 보유한 국가가 아니었다. 1985년 3월 12일 새벽 3시 20분, 이란은 리비아 기술자들의 지원을 받아 이라크 키르쿠크 인근을 향해 처음으로 스커드-B 미사일를 발사했다. 이란-이라크 전쟁 기간 이란은 모두 117차례 스커드 미사일을 발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란의 첫 미사일 공격은 군사적 효과만을 노린 것이 아니었다. 이라크가 이란의 도시를 공격하면 이란도 이라크 도시를 공격할 수 있다는 신호였다. 전투기와 공군기지를 갖추기 어려운 나라가 상대의 후방과 도시를 공격할 수 있는 방법은 제한적이고, 탄도미사일은 그 공백을 메웠다.

그러나 리비아와의 관계는 오래가지 않았다. 이란이 리비아와의 약속대로 사우디아라비아를 공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리비아는 지원을 끊었고, 이란이 보유한 스커드의 일부를 무력화하려 했다. 이란은 다시 미사일을 확보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하산 테헤라니 모가담이 등장했다.

테헤라니 모가담은 리비아에서 들여온 스커드를 분해하고 역설계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그는 미사일의 구조를 이해하고, 부품을 조달하며, 발사체를 다시 작동시키는 기술을 조직했다. 외국에서 완제품을 구입하는 단계에서, 자국 내 생산과 개량을 추구하는 단계로 넘어가는 데 그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그리고 이란은 1987년 1월 11일 외국의 직접적인 도움 없이 스커드 미사일을 발사하는 데 성공했다.

그 이후 조선이 핵심적인 공급자로 등장했다. 1987년 이란은 조선으로부터 약 100기의 미사일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미사일들은 이란-이라크 전쟁 말기에 사용되었다. 전쟁 기간 이란은 조선으로부터 스커드-B를 비롯한 무기와 부품을 공급받았고, 조선은 이란으로부터 외화와 원유를 확보했다.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 스커드에서 키암으로
조선과 이란의 미사일 협력은 완제품 수출에 머물지 않았다. 이란은 조선에서 들여온 미사일을 자체적으로 운용하는 동시에 생산기술을 습득하려 했다.
이란은 조선의 화성-5호를 수입했고, 이라크와의 전쟁에 사용했다. 동시에 생산기술도 이전받았다. 이란이 미사일을 자체 생산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은 이때였다.

1983년 양국이 탄도미사일 개발 상호지원 협정을 체결했다는 자료도 있다. 이란은 조선에 미사일 개발에 필요한 자금과 장비를 지원했고, 조선은 이를 바탕으로 스커드 계열 미사일의 생산과 개량을 추진했다. 1984년 조선은 스커드-B를 복제·개량한 화성-5호 발사에 성공했고, 1987년부터 생산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란은 화성-5호 약 100기를 구매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란은 조선이 제공한 미사일을 그대로 보관하지 않았다. 이란의 지리와 작전환경에 맞게 개량했다. 스커드-B의 사거리는 약 300㎞, 스커드-C의 사거리는 약 500㎞로 평가된다. 이란은 사거리와 탄두, 발사체 구조를 개선하면서 미사일을 자국의 군사체계 안에 편입했다.

1990년대 초 조선은 이란에 스커드-C와 이동식 발사차량을 추가로 제공했다. 브루스 벡톨 교수는 조선이 1994년까지 이란에 약 200기의 스커드-C를 공급했고, 이후 이란과 함께 이란 내 스커드-C 생산시설 건설을 추진했다고 분석했다. 해당 시설에는 조선산 부품과 기술지원이 계속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 생산기반에서 나온 대표적인 개량형 미사일이 키암이다. 키암은 스커드 계열의 기술적 뿌리를 이어받았지만 이란이 자체 생산체계와 작전 요구에 맞춰 개량한 미사일이다. 사거리 800㎞ 안팎의 단거리 탄도미사일로 평가되며, 이란은 이를 지하 저장시설과 이동식 발사대에서 운용해 왔다.

키암의 중요성은 제원이나 외형이 아니다. 그 의미는 이란이 더 이상 미사일을 외국에서 구입하는 국가가 아니게 됐다는 점이다. 조선에서 완제품과 기술을 들여왔지만, 이란은 생산시설을 세우고 부품을 국산화하고 운용 경험을 축적했다. 조선의 기술 이전이 이란 내 군수산업의 출발점으로 전환된 것이다.

이 과정에는 기술자 파견도 포함된다. 조선과 중국은 1997년 100명이 넘는 기술자를 이란에 보내 탄도미사일을 자체 생산할 능력을 지원했다는 분석이 있다. 이 주장의 세부 내용이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당시 이란이 생산시설 건설과 제조공정 확보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과 일치한다.

설계도 한 장만으로는 미사일 기술이 완성되지 않는다. 연료를 혼합하는 공정, 엔진을 주조하는 방법, 밸브와 펌프의 내구성을 시험하는 기술, 유도장치의 오차를 줄이는 방법, 이동식 발사차량을 운용하는 절차가 종합적으로 필요하다. 미사일을 구매해 운용하는 것과 미사일 산업을 보유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조선의 역할은 완성품 제공을 넘어 이란에 그 산업적 기반을 세우는 데 있었다.

❙ 로동에서 샤하브-3로
1990년대 후반부터 양국 협력의 중심은 스커드 계열에서 로동 미사일 계열로 옮겨갔다.
조선은 1993년 5월 29일 로동 1호 미사일을 시험 발사했다. 조선 정부는 이 발사를 핵 문제와 관련된 정치적 신호로 활용했지만, 군사기술과 수출 가능성을 시험하는 목적도 있었다. 당시 이란과 파키스탄 대표단이 시험을 참관했다. 이란 대표단은 그해 3월 평양을 방문해 탄도미사일 협력과 로동 미사일 문제를 논의했다.

로동 미사일은 사거리 약 1,000㎞급의 중거리 탄도미사일로 분류된다. 미국과 서방의 분석에 따르면 조선은 1990년대 후반 이란에 로동 미사일 약 150기를 이전했다. 이란은 이를 샤하브-3이라는 이름으로 운용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FDD 보고서는 조선이 이란의 첫 핵탄두 탑재 가능 중거리 탄도미사일인 로동-A의 개발과 이전에 관여했고, 이란이 이를 샤하브-3으로 생산했다고 평가한다. 샤하브-3는 이후 이란의 액체연료 중거리 탄도미사일과 우주발사체 개발의 기반이 되었다.

샤하브-3와 로동 미사일 사이의 유사성은 외부 전문가들이 오랫동안 지적해 온 부분이다. 최근 분석에서도 샤하브-3 계열인 가드르와 에마드가 조선의 로동 미사일에 직접 기반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란의 샤하브-3는 로동 미사일의 직선적인 복제품에서 출발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란의 독자적인 개량을 거쳤다.

이란은 샤하브-3의 사거리와 정확도를 높였다. 추진체계와 유도장치를 보완했고, 탄두의 무게와 형태를 조정했다. 가드르는 샤하브-3의 사거리를 늘린 파생형으로 개발됐다. 에마드는 종말 단계에서 기동할 수 있는 재진입체를 적용해 명중 정확도를 높이려 했다. 따라서 오늘날의 가드르와 에마드를 조선 미사일의 복제품이라고만 부르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기술적 출발점은 조선에 있었지만, 후속 개발은 이란의 연구자와 생산체계가 담당했다.

이 구분은 중요하다. 서방 언론은 이란 미사일을 흔히 ‘조선제’라고 부른다. 반대로 이란은 모든 성과를 자국 과학자들의 독자적 업적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양측 모두 전체를 말하지 않는다. 이란의 액체연료 중거리 미사일은 조선의 로동 계열 기술과 생산기술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이란이 20년 넘게 추진체계, 유도체계, 탄두, 제조공정을 개량해 온 것도 사실이다. 초기 기술 이전과 현재의 생산능력을 구분해야 한다.

미국 재무부의 제재 기록은 양국 협력의 물적 흔적을 보여준다. 2007년 미국 재무부는 이란의 샤히드 헤마트 산업그룹(SHIG)이 담당한 샤하브 계열 중거리 미사일이 조선이 설계한 로동 미사일에 기반하며 중국과 조선의 지원을 받았다고 밝혔다. 2009년과 2013년 제재 발표에서는 조선광업개발무역회사, KOMID와 SHIG 사이의 탄도미사일 거래가 언급됐다. 단천상업은행이 금융거래를 뒷받침했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2016년에는 SHIG 관계자들이 이란 주재 KOMID 관계자들과 협력했고, 액체연료 탄도미사일과 우주발사체 지상시험에 이용될 수 있는 밸브·전자·측정장비의 선적을 조율했다는 기록이 나왔다.

이 자료가 보여주는 사실은 미사일 한 기가 국경을 넘어갔다는 점이다. 즉, 설계와 부품, 금융, 운송, 시험장비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움직였다는 뜻이다. 서방의 제재는 이 네트워크를 차단하려 했으나 이란과 조선은 회사 이름을 바꾸고, 중개업체를 이용하고, 거래 경로를 우회하며 대응했다. 국제 금융망을 장악한 미국은 모든 거래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현실 세계는 미국의 뜻대로만 움직이지 않았다.

❙ 무수단과 액체연료의 계보
2000년대 초에는 무수단 계열을 둘러싼 의혹도 제기됐다. 조선의 무수단 미사일은 옛 소련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R-27 계열 기술과 관련된 것으로 분석된다. 이란의 호람샤르 계열 역시 R-27 기술과 연결된다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은 로동-샤하브 계열보다 공개된 증거가 부족하다.

조선이 2005년 이란에 무수단 계열 미사일을 제공했다는 주장은 언론에서 반복되었으나 정확한 수량과 이전 방식, 이란이 실제로 어떤 설계와 부품을 확보했는지 알기 어렵다. 이란의 호람샤르가 무수단의 직접 복제품인지, 같은 계통의 기술을 토대로 이란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것인지도 전문가마다 견해가 다르다.

이처럼 양국 미사일 협력의 역사는 사실과 추정이 함께 존재한다. 그러나 모든 부분이 확정되지 않았다고 해서 전체적인 흐름을 부정할 수는 없다. 1980년대 스커드-B와 화성-5호, 1990년대 스커드-C와 생산시설, 1990년대 후반 로동과 샤하브-3, 이후 가드르와 에마드로 이어지는 이란의 미사일 계통은 여러 보고서와 제재기록, 군사전문가 분석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이란 미사일 전체가 조선의 영향이라 설명해서도 안 된다. 고체연료 미사일은 별도의 계보를 가진다. 이란은 1990년대 중국의 공식적 지원과 이후 중국 기관을 통한 기술 접근을 바탕으로 고체연료 추진체계와 관련 생산능력을 발전시켰다. 또한 이란의 고체연료 중거리 미사일인 헤이바르 셰칸과 일부 기동형 미사일은 이란 과학자들의 독자적인 성과로 평가받는다. 군사 전문가들 역시 조선과 이란의 연계가 가장 뚜렷한 분야는 액체연료 미사일이며, 고체연료 계열에서 조선의 직접적 연계를 확인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란 미사일의 역사는 세 갈래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 첫째는 조선의 스커드와 로동에서 출발한 액체연료 탄도미사일이다. 둘째는 중국과 러시아를 통한 기술 접근과 협력이다. 셋째는 이란 자체의 연구개발과 전쟁 경험에서 나온 고체연료·정밀유도체계다. 이 세 요소가 결합해 오늘날의 이란 미사일 전력을 만들었다.

❙ 지하 창고와 새로운 전쟁
이란의 미사일은 기술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전쟁 교리의 산물이다. 이란은 1980년대 이라크의 미사일 공격을 경험했다. 테헤란과 이란의 주요 도시가 공격받았고, 시민들은 대피했으며, 전쟁의 공포가 사회 전체를 흔들었다. 이란 지도부는 그때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다시는 미사일 없는 국가가 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란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는 이라크 미사일 공격 당시 이란이 방어할 수단을 갖지 못했던 경험을 여러 차례 언급했다. 이란 혁명수비대는 미사일을 억제력의 핵심으로 보았다. 전투기와 해군에서 미국과 경쟁할 수 없다면, 미국의 기지와 동맹국을 미사일로 위협해 전쟁의 비용을 높이겠다는 계산이었다.

미국 FDD의 2023년 보고서는 이란이 중동에서 가장 큰 탄도미사일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2021년 당시 미군 중부사령관 케네스 매켄지는 이란의 미사일 보유량이 종류에 따라 3,000기보다 조금 적은 수준이라고 말했다. FDD 보고서는 2015년 핵합의 이후 2022년까지 이란이 최소 228회의 탄도미사일 발사와 우주발사체 발사를 진행했다고 집계했다. 그 가운데 단거리와 중거리 체계의 시험·훈련·실전 운용이 함께 포함됐다.

이 숫자는 미사일의 질을 모두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란이 한두 개의 시험용 미사일을 가진 국가가 아니라, 생산과 저장, 이동, 발사, 재보급이 가능한 체계를 구축했다는 점은 보여준다. 이란의 미사일은 이동식 발사차량에 탑재돼 위치를 바꾼다. 일부는 산악지대와 지하터널에 보관된다. 발사기지와 생산시설을 여러 곳으로 분산해 한 번의 공습으로 전체 전력을 제거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최근 미국의 공격에 이란이 미사일로 반격하고,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적 압박을 상쇄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국은 공군기지와 항공모함, 정찰위성, 장거리 폭격기를 갖고 있다. 이란은 그에 맞서 미사일의 숫자와 분산, 은폐, 이동성을 이용한다. 미국이 이란의 핵시설이나 군사기지를 공격해도 이란이 미사일을 보존하고 있다면, 미국의 공격은 전쟁의 종결이 아니라 보복의 시작이 된다.

미사일 창고는 이란의 ‘두 번째 공군’과 같다. 전투기는 발진기지와 활주로, 정비시설, 조종사가 필요하다. 미사일은 지하에 숨겨둘 수 있고, 발사 직전까지 위치를 노출하지 않을 수 있다. 고정된 공군기지와 달리 이동식 발사대는 탐지와 파괴가 어렵다. 이것이 이란이 미국의 압도적인 공군력에 맞서 버틸 수 있는 이유다.

물론 미사일은 전쟁을 결정적으로 끝내는 만능무기가 아니다. 미사일은 요격될 수 있고, 정찰과 지휘통제망이 파괴되면 효율이 떨어진다. 탄두의 파괴력과 명중률, 발사 준비시간, 재고량도 중요한 변수다. 이란의 미사일 공격이 미국과 이스라엘의 방공망을 완전히 무력화했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러나 미사일이 상대의 군사기지와 항구, 에너지시설, 지휘시설을 위협하는 한, 미국은 전쟁을 끝낼 수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란의 미사일 전략은 정치적 효과를 얻는다.

❙ 멀리 있으나 가까운 두 나라
이란과 조선은 지리적으로 멀다. 한 나라는 서아시아에 있고 다른 나라는 동북아시아에 있다. 종교와 언어, 역사적 경험도 다르다. 이란은 이슬람혁명을 거쳤고 조선은 사회주의 혁명과 민족해방의 경험을 바탕으로 국가를 세웠다. 두 나라는 같은 체제를 가진 국가도 아니다.

그러나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맞서 자주권과 군사적 자립을 추구해 왔다는 점에서 두 나라는 가깝다. 미국은 이란을 제재했고 조선을 봉쇄했다. 미국은 이란의 무기 구매를 막았고 조선의 미사일 기술 수출을 차단했다. 그러나 그 압박은 두 나라의 접촉을 끊지 못했다. 오히려 서로의 필요를 확대했다.

이란은 조선으로부터 스커드와 로동 계열 미사일, 생산기술과 기술자 지원을 얻었다. 조선은 이란으로부터 외화와 원유를 얻었다. 이란은 조선의 기술을 자국의 군사환경에 맞게 개량했다. 조선은 이란과의 협력을 통해 미사일 산업의 외부 시장을 확보했다. 양측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상대방을 이용하고, 동시에 상대방의 능력 향상에 기여한 상호의존 관계였다.

냉정하게 국제정치의 현실을 바라보자. 미국과 서방은 자신들의 미사일과 폭격을 ‘억제’와 ‘방어’라고 부르면서, 이란과 조선의 무기에는 ‘위협’과 ‘불법’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미국은 세계 곳곳에 군사기지를 설치하고 선제공격을 감행하면서도, 제재를 통해 상대 국가의 방어수단을 제거하려 한다. 국제법은 강대국의 폭력에는 '질서'라 부르지만, 약소국의 저항에는 '처벌'을 이야기한다.

이란과 조선의 미사일 협력은 그 이중기준 속에서 형성되었다. 두 나라가 자주와 자강을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외부의 군사보호에 의존하면 언제든 무장해제될 수 있음을 경험했다. 이란-이라크 전쟁은 이란에 미사일 없는 국가의 비극을 가르쳤다. 한국전쟁과 이후 지속적인 미국의 핵위협은 조선에 독자적인 국방력의 필요성을 각인시켰다.

오늘날 이란의 미사일 창고에서 발사되는 샤하브-3, 가드르, 에마드, 키암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다보니 1980년대 평양의 군수공장, 테헤란의 지하 생산시설이 함께 나타났다. 그곳에 김일성 주석과 이란 군사대표단의 만남이 있었고, 이란 미사일의 아버지 테헤라니 모가담의 젊은 시절이 있었으며, 미국의 봉쇄를 뚫고 부품과 기술을 옮긴 노동자와 기술자들이 있었다.

이란과 조선의 관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누가 국제질서를 만들었고, 누가 무장할 권리를 독점했으며, 누가 타국의 방어능력을 위협으로 규정해 왔는지를 묻는 일이다. 미국의 일극패권은 군사기지와 제재만으로 유지될 수 없다. 세계 곳곳에서 자주국들이 독자적인 군사력과 경제협력망을 만들고 서방에 맞서고 있다. 이란과 조선은 그 첫 줄에서 자신들의 방식으로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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