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력서 한 장

in #thirtylast month

김도현, 서른.
이력서 파일 이름은 “김도현최종진짜_진짜마지막.hwp”였다.
컴퓨터 바탕화면엔 수십 개의 ‘최종’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엔 아무것도 없었다.

도현은 취업 사이트를 켜놓은 채 새벽 네 시까지 자판을 두드렸다.
“성실함과 책임감이 강하며, 팀워크를 중요시합니다.”
그 문장을 수백 번 썼다. 그러나 자신이 그런 사람인지 점점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젠 단어 하나에도 손이 멈췄다.
성실?
책임감?
그건 지금 일을 가진 사람들만 쓸 수 있는 말 같았다.

그의 방은 여름 냄새가 눅눅하게 배어 있었다.
모니터 불빛만이 방의 공기를 붙잡고 있었다.
문득, 창문 밖으로 고양이 한 마리가 지나갔다.
쓰레기봉투 위를 뒤적이다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도현은 그 고양이가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느꼈다.

다음 날, 어머니의 카톡이 왔다.
“도현아, 친구 민수 결혼식 있대. 같이 가자.”
도현은 답장을 쓰다 지웠다.
‘난 초대받은 적이 없는데요.’
결국 이모티콘 하나만 보냈다. “ㅎㅎ 다음에요.”

그날 밤, 그는 오랜만에 거울을 봤다.
머리는 자라 있었고, 눈 밑은 시커멓게 파였다.
“이 얼굴로 면접을 본다고?”
그는 웃었다.
웃음이 아니라, 스스로를 내려놓은 헛웃음이었다.

며칠 후, 알바 면접이 잡혔다.
편의점 야간 근무였다.
면접관은 50대 점장이었다.
“나이 서른이면… 이 일 오래 못 하지 않을까?”
그 말이 도현의 가슴을 찔렀다.
도현은 고개를 숙였다.
“그냥 돈이 좀 필요해서요.”
그 대답이 얼마나 초라한지 알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꿈’을 말하지 않았다.

그날 밤, 근무 중에 손님 하나가 들어왔다.
머리가 희끗한 택배기사였다.
“젊은 친구가 이런 데서 고생하네. 나도 서른 넘어서 백수였어.”
도현은 고개를 들었다.
“진짜요?”
기사는 웃었다.
“응. 근데, 인생은 길어. 아직 멀었지. 내가 택배 시작한 게 마흔이었어.
지금은 아들 대학 보내고, 나름 잘 살고 있어.”
그 말이 희미한 불빛 속에서 맴돌았다.
‘인생은 길다.’
그 문장은 이상하게도 위로 같으면서도, 공허했다.

그날 새벽, 도현은 편의점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하늘이 아직 어두웠다.
그는 어깨에 걸친 가방을 꽉 움켜쥐었다.
“이력서 한 장이 인생을 결정짓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난 아직 살아있네.”
스스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새 문서를 만들었다.
파일명은 이렇게 썼다.

“김도현_다시시작.hwp”

그는 아무 내용도 쓰지 않은 채 저장 버튼을 눌렀다.
내용은 없었지만, 처음으로 파일 이름이 거짓말 같지 않았다.

누구나 인생의 중간에 멈춘다.
그러나 멈춘 자리가 끝은 아니다.
도현의 새 파일엔 아직 아무것도 없지만,
그 ‘빈칸’이야말로 새로운 문장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