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 도구탓] 홋카이도 여행기 4일차(끝)
12월 26일 / 노보리베츠, 삿포로
눈을 떠 숙소를 나왔다. 지옥계곡으로 향했다. 어젠 어두워서 잘 보지 못했다. 아침 7시였다.
날이 밝아 있었지만, 새벽빛은 조금 남아 있었다. 눈은 내리지 않았다. 바람도 불지 않았다. 대신 쌓인 눈은 발목에 닿을 듯 말 듯 했다. 여자친구랑 나는 둘 다 단화를 신고 있었다. 발 내딛을 곳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걸었다.
어제 밥을 먹었던 거리에 다다랐다. 까마귀 우는 소리가 나서 고개를 들었다. 수십 마리의 까마귀 떼가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노보리베츠가 지옥이라는 별칭이 붙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문 연 점포는 편의점 밖에 없는 거리가 괜히 스산했다.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막상 지옥계곡은 별로 지옥 같지 않았다. 걸어오는 동안 새벽빛은 다 걷혔다. 지옥계곡에 쌓인 눈이 새하얀 흰색 그대로 다가왔다. 사진으로 봤던 황량한 붉은 빛 땅은 눈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들리는 까마귀 소리만이, 이곳이 지옥계곡임을 알려줬다.
그래도 계곡과 닿은 산책길을 걷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출입을 금지하는 표지판과 쇠사슬이 쳐 있었다. 눈이 많이 온 탓이었다. 어둡더라도 어제 걸어둘 걸. 전망대에서 조금 보다가, 여자친구와 눈밭에서 놀다 숙소로 돌아왔다. 노보리베츠는 가장 아쉬운 여행지로 남았다. 여행 일정 중 가장 작은 지역이었는데, 료칸 외에는 제대로 구경한 게 없었다.
숙소에서 제공하는 조식을 먹었다. 뷔페식이었는데, 먹을 게 다양하고 새로 보는 음식도 많아 꽤 신나게 먹었다. 디저트로 제공되는 베이커리류만 빼고는 대체로 맛있었다.
간단히 샤워를 하기 위해 온천장으로 갔다. 어제와는 남탕 여탕의 위치가 바뀌어 있었다. 어제 여탕이었던 남탕에 들어갔다. 노천 온천의 풍경이 훨씬 좋았다. 시야가 트인 공간에 꽤 자연스러운 폭포도 있었다. 어제는 사방이 막혀 단조로운 공간이었다. 짧은 시간만 있어야 하는 게 아쉬웠다. 체크인을 마치고 예약해둔 송영버스를 9시 40분에 탔다.
└노보리베츠 그랜드호텔 1층 로비에 있던 눈사람
삿포로에 도착했을 땐 12시였다. 편하게 이동하기 위해 삿포로 역에 있는 락커로 갔다. 큰 함 하나에 캐리어 두 개를 보관했다. 700엔이었다. 홋카이도 구본청사(아카렌가)로 향했다.
사실 아카렌가에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옛날에 쓰던 관공서 건물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번잡한 시내에 달랑 남은 건물이 별 감흥을 불러일으킬 것 같지 않았다. 또 다른 관광 명소인 시계탑도 그랬다. 시계탑은 삿포로에서 숙소를 오가며 자주 봤었다. 정각에 종소리를 울린다는 것을 빼면 별 존재감이 없었다. 건물 자체도 꾀죄죄했고, 주변 고층 건물에 묻혀 있었다.
기대가 적으면 얻는 기쁨이 크다. 아카렌가는 시계탑과 달랐다. 건물 자체도 시계탑보다 훨씬 예뻤고, 주변에 시야를 방해하는 다른 건물도 없었다. 한때 홋카이도에서 가장 권위 있었을 건물답게, 상당한 부지를 홀로 차지하고 있었다. 운이 좋게도, 우리가 도착했을 땐 눈까지 펑펑 내리고 있었다. 세상을 하얗게 덮는다는 말을 비로소 알겠다 싶었다. 여행의 막바지에 잊지 못할 풍경을 마주했다. 꽤 긴 시간동안 아카렌가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존재도 잊고, ‘우와’ 하면서 막연히 바라봤다.
에비소바 이치겐이라는 라멘집으로 향했다. 가이드북이 추천한 곳 중 하나였다. 아카렌가에서 꽤 멀었다. 구글맵으로 가는 길을 찍었을 때, 도보 시간과 대중교통 이동 시간이 별 차이가 없었다. 걷기로 했다.
길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삿포로가 격자형 도로망을 가진 계획도시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주소도 단순하다. 신림이나 사당 같은 고유 지명을 쓰는 게 아니라, 북4서6, 남1동4 식으로 사용한다. 일본어로 동서남북과 숫자를 말할 수 있으면 현지인에게 물어서도 길을 쉽게 찾겠다 싶었다.
└ 삿포로의 격자형 도로망 (출처 : 구글 지도).
라멘집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섰을 때, 진한 새우(에비) 육수의 향을 맡을 수 있었다. 단층 건물에 있는 점포로 들어갔다. 점원들이 들어온 손님을 우렁찬 목소리로 맞이했다. 한국에서 갔던 미즈컨테이너와 비슷한 손님맞이였다. 점심시간이 좀 지난 시간이었지만 대기 줄이 상당했다. 밝은 표정의 점원이 메뉴판을 들고 와 친절하게 주문을 받았다.
새우 육수만 사용할 것인지, 새우와 돼지뼈 육수를 섞을 것인지 선택할 수 있었다. 새우 육수만 선택했다. 미소, 소유, 시오 등 라멘의 종류도 선택하는데, 미소라멘으로 정했다. 여자친구도 같았다. 교자와 병맥주도 시켰다.
20분 넘게 찬바람과 눈을 맞으며 왔으니 라멘이 맛이 없을 수가 없긴 했다. 그래도 정말이지 맛있었다(는 말 밖에 덧붙일 말이 없다). 정말 순식간에 국물까지 싹 먹었다. 라멘 집을 찾아오면서 추위 때문에 절망했는데, 다시 눈발 휘날리는 길을 갈 힘을 얻은 기분이었다.
비행기는 5시 출발 예정이었다. 공항엔 3시 정도에 도착하고 싶었다. 실제로는 삿포로에서 공항 가는 기차를 탔을 때가 3시였다. 라멘만 먹을 계획이었지만, 아카렌가까지 둘러본 탓이었다. 국제선 터미널에 도착했을 땐 거의 4시였다. 티켓 발권과 출국 수속까지 마쳤을 땐 4시 반이었다. 면세점 쇼핑을 서두르고, 5시에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 창으로 바라본 홋카이도는, 이미 해가 져 도착했을 때처럼 어두웠다.
- 늦게나마 홋카이도 여행기를 완성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7 DAY BLACK & WHITE PHOTO CHALLENGE 이벤트에 참여하고도, 끝까지 하지 못했습니다. 추천해주셨던 @dreamyacorn님과 스티미언분들께 사과의 말씀 드립니다.
눈이 많이 왔죠?
노보리베츠는 이번에 가보지 못했는데 온천이 어땠는지 궁금하네요.
설경사진 잘 봤습니다.^^
사실 료칸에서 경험하는 온천은 숙소에 따른 차이가 큰 거 같아서... 다른 곳에서라도 온천을 다녀오셨다면, 특별히 노보리베츠에서의 차이점이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애매하네요. 그래서 지옥계곡이나 오유누마라도 보고 왔어야 했는데...ㅋㅋㅋ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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