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aa 번역] 영화를 무릅쓰고 보다 말하다 생각하다 4

in #voir4 years ago (edited)

칸트는 생성에 관한 방법의 요구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이러한 반대는 “그것은 이미 어떤 조화에 대해서 역량이 있음을 가정하면서 (...) 만들어진 지능들 모두에 기원한다. 들뢰즈가 방위한 대로의 후기 칸트주의에 대하여. 제라르 레브륀은 들뢰즈에서의 이 특성에서 유일한 사람이다.”라는 사실을 지지한다.
“우위의 경험론”의 주요 양상들에 부합하는 지능들의 들뢰즈적인 독트린은 비록 그것이 “작은 처분”이고 또한 그에게는 어떤 특정한 시작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늘날 가변적인 두 개의『기본어 사전들』속에 비축된다.
(...) 또 이 준거는 마찬가지로 그것이 다른 책들 가운데 다른 곳에서 작동할 때『차이와 반복』에서 언뜻 보기를 생각하지 않으면서 그것의 현존에 스스로를 한정한다. 그러는 중에 이 독트린은 저자의 생전에 간행된 마지막 텍스트, 1993년『비평과 임상 진단』, 1968년 자료집을 관통하면서 나타난다. 들뢰즈가 문학에 대한 글 모음집 서두에서 “쓰기의 문제”를 중심으로 기획했고 작가가 “새로운 문법의 혹은 통사론의 힘들을 업데이트했다”라고 할 때 그는 다른 언어 “외국어”가 –랑그 속에서 “태어나도록” 하기 때문에 경험 혹은 보통의 사용과 구별되는 우위의 사용에서 말하기의 지성을 들어 올린다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만일 쓰기가 “보기 그리고 듣기의 문제”와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기에서 “말 위에 올려지는 색깔들과 음색들의 효과들처럼 쓰기에 적절한 회화와 음악이 있는" (들뢰즈는 “쓰다”,“보다” 와 “듣다” 동사들을 강조한다. )
그런데도 불구하고 작가가 다른 지성들의 한계와 관련 없이 부조화 내에서 언어의 한계에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들뢰즈는 음악가들이 “그것 자체로써 들을 수 없는 힘들을 듣게 하는” 얼룩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긍정할 때 이 들을 수 없는 형식들은 사실 삐에르 불레(Pierre Boulez)에게 헌사된 이 텍스트에서 말하는 것 같이 일종의 “우위의” 혹은 “불가능한” 귀에 헌정될 것이다.
그리고『푸코』에서 “지식”의 두 가지 형식들을 분석하면서 들뢰즈는 “볼 수 있는 것”과 “환기될 수 있는 것”, 거기에서 그것을 알기 원하는 사람의 특수한 감성을 호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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