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TY 100] 레나에 대하여 2

in Wisdom Race 위즈덤 레이스last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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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나 가격은 금값이다. 매년 오른다. 창탕 유목민들로 조직된 협동조합에서 라다크에서 생산하는 레나를 총괄 관리하고 있다. 창파들로부터 일제히 사들이고, 염색 혹은 방적 등의 가공이 용이하도록 세탁한 후에 균일가로 판매하는 것이다. 조합에서 가격을 보장해 주니 창파들 입장에서는 팔지 않을 이유가 없다. 개인적인 목적으로 일부 남겨놓기도 하지만, 수확한 레나의 대부분을 조합에 판다. 레나를 가공하여 제품을 생산하는 사업자들은 매년 7월이 되면 조합으로부터 레나를 구입한다. 창탕 고원에서 이리저리 뒹굴며 살아온 염소들의 털에는 기름기가 쫙 껴있다.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려 만들어 낸 보온용 털이니 추우면 추울수록, 고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기름기가 더 많이 낀다. 여기에 염소 똥, 흙먼지, 지푸라기 따위의 각종 오물이 엉겨 붙어 있다. 이걸 최대한 손상 없이 제거하고 깨끗하게 세척하는 작업이 매우 중요한데 조합에서 이걸 대신해 주니 사업자들은 조합에서 사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내가 아는 한) 정가 판매가 원칙이므로 눈탱이 맞을 일도 없다. 오히려 창파들이랑 직거래하면 눈탱이 맞을 확률이 더 높다.

레나는 돈이 된다. 창탕의 유목민들도 그걸 안다. 예전에는 생계 유지의 수단이었지만, 이제는 유지를 넘어 업그레이드가 가능하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키우던 동물을 모두 도축업자에게 팔아버리고 창탕을 떠나 하나둘 도시로 삶의 터전을 옮겨오고 있다. 그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유목민이 정착민이 되겠다는 선택이 말이다. 이건 시골에서 농사짓던 사람이 도시로 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전환이다. 그들은 창탕에 살고 싶고, 동시에 창탕을 떠나고 싶다. 창탕 고원에서의 유목 생활은 빡세다. 이제는 좀 편히 살고 싶으니까 그만하겠다는 것이다. 게다가 업그레이드의 기회는 죄다 밖에 있지 않은가. 그들 스스로의 욕망과 그들 바깥의 욕망이 뒤섞이는 바람에 이상한 일들이 자꾸만 일어난다. 머물러도 문제, 떠나도 문제다. 조합에서 제값 주고, 아니 그보다 비싼 값을 주고 그들에게 레나를 사는 것은 이 문제의 해결과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인다. 레나 값이 점점 올라서 창파들이 부자가 된다고 해도 말이다.

라다크가 아무리 오지라지만 70년대부터 시작된 개방과 변화는 느릿느릿 착실하게 진행되어 왔다. 라다크가 연방 직할령이 된 이후로는 더욱 빠른 속도로 돈과 사람이 몰리고 있다. 그러나 창탕은 이 상황과 전혀 상관이 없다. 창탕에는 여전히 좋은 학교와 병원이 없다. 돈을 벌면 뭐 하나. 그 돈으로 더 나은 수준의 교육과 기본적인 의료 서비스조차 누릴 수 없는데. 아! 학교와 병원은 본래 정착민을 위한 것인가? 유목민의 전통적 삶과 어울리지 않는?

진짜 문제가 몇 가지 더 있다. 유목민들의 땅인 창탕은 중국과의 분쟁으로 초긴장 상태다. 중국과의 분쟁은 오래전부터 지속되어 온 문제지만, 최근 몇 차례 무력 충돌이 일어난 이후 유목민들에게는 매우 실제적인 위협이 되었다. 유목민들의 열린 땅에 자꾸 울타리가 쳐진다. 그들의 땅에는 애초에 국경, 군사지역, 접근금지구역 같은 것이 없었는데, 이리저리로 움직여야 하는 그들의 활동 반경에 자꾸만 제약이 생겨난다.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목초지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 양과 염소에게 먹일 풀이 줄어든다. 이건 삶의 질을 떠나 유목민의 본질을 흔드는 문제다.

그리고 라다크는 하늘에 가까운 땅인 만큼 기후 변화의 영향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는 지역 중 하나다. 빙하가 녹고, 홍수가 나고, 계절의 구분이 사라지는 중이다. 계절 따라 산으로 들로 동물들 풀을 먹이며 살아가는 유목민들의 삶은 아주 작은 기후의 변화에도 이리저리 흔들린다. 창탕 유목민의 역사에 ‘많은 비가 내리는 날씨’는 없었다. 그들의 의식주는 ‘비’와는 완전히 상관없는 방식으로 진화되어 왔다. 그런데 요즘 라다크에 자꾸만 비가 내린다. 봄이 사라진 그들의 땅에 갑자기 찾아온 여름은 빠른 속도로 빙하와 눈을 녹아 흐르게 만든다. 갑자기 물이 불어난다. 그들의 마른 땅은 갑자기 불어 넘친 물을 감당할 수 없다. 집과 옷과 음식이 젖는다. 그들에겐 대책이 없다.

재밌는 건 요즘 일부 창파들이 더 이상 빗질을 통해 레나를 수확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털을 빗지 않고 깎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수확한 레나는 엉망진창이다. 솜털이 아닌 긴 털도 함께 깎여져 나오고, 빗질을 통해 탈락할 수 있는 흙모래와 오물마저도 덕지덕지 들러붙어 있다. 솜털의 무게에 긴 털과 오물의 무게가 더해진다. 무게가 올라가면 돈을 더 받는다. 이 정도면 사기 아닌가? 그런 창탕 사람들이 라다크 타지역의 사람들은 못마땅한 모양이다. 내가 아는 라다크 사람들이 창파들을 '좋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창파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늘 혀를 끌끌 찬다. 그들은 비위생적이고 야만적인, 사리사욕에 눈이 먼, 거칠고 상종하기 어려운 사람들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다크에서 레나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창탕 친화적인' 입장을 취한다. 레나는 애초에 유목민들이 키워 얻은 염소 털이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물론 친환경과 여성주의도 빠지지 않는다. 이건 전 세계적인 추세인 거 같은데 라다크에서도 비즈니스 하는 사람들이 자꾸 NGO 느낌 낸다. NGO는 라다크에서 잘 팔리는 아이템이다. NGO 이야기 잠깐 하면. 옛날부터 라다크가 지켜온 이미지들을 동경했던 외부인들은 그 변화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봤지만, 나는 그 시선이 좀 역겨웠다. 라다크의 변화는 자연스럽고 당연했다. 그들의 변화에 거부감을 느끼고 이를 저지하고자 한 것은 당사자들이 아니라 외부자들이다. 그들의 문화재를 복원하는 일에, 그들의 전통을 보호하는 일에 앞장서는 사람들은 라다크 사람들이 아니라 유럽인, 미국인, 일본인들이다. 그들이 라다크를 지키고자 세운 단체들에 전 세계의 돈이 모인다. 왕실로부터, 정치인으로부터, 대기업으로부터, 종교 단체로부터 눈먼 돈이 달려 들어온다. NGO 안 할 이유 있나. 나도 할까?

아무튼 라다크에서 사업이든, NGO든 하는 사람들 이야기는 10% 정도 맞고 대부분은 좀 우스운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친환경 운운은 내 몸에서 가장 가까운 곳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내 몸, 내가 사는 집, 내가 사는 동네에서. 로컬리즘? 이것도 마찬가지다. 내내 고립된 오지였던 곳에서 로컬리즘은 무엇무엇 '주의'가 아니라 여전히 그냥 삶이다. 외부인들은 라다크의 지역 기반 공동체에서 자본주의의 미래를 찾는 것 같은데, 내 생각에 라다크는 오히려 로컬리즘을 좀 극복해야 한다. 라다크의 로컬리즘은 비뚤어진 폐쇄주의이다. 그리고 여성주의. 이게 제일 웃기다. 스피닝과 위빙, 니팅 등 여성 작업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일거리를 제공한다는 명목. 여성들의 경제적 자유를 논하기에는 그렇게 큰돈이 그들 손에 쥐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는 여성 작업자 운운하기 매우 민망해졌다. 여성들이 직접 작업장으로 나오지 않고 집에서도 일을 할 수 있다는 점, 농사일로 바쁜 여름철에도 짬을 내어 일할 수 있다는 점 등 그들이 내세우는 장점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런 걸로 여성 인권 운운하는 것은 좀 궁상맞다. 이 산업도 결국 자본력 갖춘 인텔리 여성들이 가진 것은 기술 뿐인 여성들의 노동력을 저렴하게 이용하는 형태다. 요즘에는 워크샵을 통해 적극적으로 직조 노동력을 창조하고 있기도 하다. 아직 착취까지는 아니지만, 머지 않았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최근 몇 년 진입한 사업자들이 대체로 그렇다는 말이고 이 산업의 근본을 일군 이들을 맨땅에 헤딩으로 시작한 라다크 여성들이다.

과격하게 이야기하면, 레나는 100년 안에 사라질 것이다. 100년도 길다. 플라스틱이 대체하거나 레나 털만 공장에서 생산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21세기의 연금술, 유전공학이 뭐든 가능케 하겠지. 콩으로 만든 고기도 먹는데 콩으로 만든 레나는 왜 안 나오겠나. 그러나 굳이 그럴 이유가 있을까. 그렇게 생산한 레나가 과연 여전히 귀할까. 알 수 없는 일이다. 하긴 인류는 대체제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대체제를 더 좋아하고 있어서 그것이 대체이든 오리지널이든 더는 상관이 없다. 동시에 미래의 섬유라며 이것저것 튀어나올수록 더욱더 유기농 울, 유기농 실크, 유기농 면, 허구한 날 유기농 타령하는 우리 휴먼, 아무튼 모순 기능을 뇌에 탑재하고 태어난 듯.

창탕과 레나와 라다크를 바라보는 내 시선은 조부 투바키의 그것과 비슷하다. 베이글에 걸터앉아 라다크를 본다. 나는 동물들 풀 먹이며 사는 유목민이 아닌걸. 나의 라다크 친구들도 그렇다. 레나 소싱하려면 창탕 남자랑 결혼해야 하나 농담처럼 이야기했지만, 이런 농담은 하고 싶지 않다.

초모와 레나는 오로지 동시대인을 위한 사업이며 아이템이다. 라다크의 염소 털, 양 털, 야크 털, 낙타 털, 다 갖다 팔아보려고 한다. 여기에 100년 뒤의 미래는 없다. 100년 뒤에는 창파도, 빙하도, 유목민도 없기 때문이다. 창탕 고원의 유목민, 창파는 인류의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고원에 살며 동물들 풀을 먹이며 살던 그들의 방식이 사라진다는 것이지, 그들의 아들딸이 사라진다는 뜻은 아니다. 이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니 다시, 동시대인들이여. 동시대의 울, 동시대의 섬유, 동시대의 유기농, 동시대의 그것들을 가능할 때, 당분간은 즐겨보자. 100년 뒤는 치우자. 50년 뒤도 치우자.

아무튼 인도 정부 화이띵이다. 지구 어딘가에서는 가짜 비와 눈도 뿌리는데, 사막에 스키장도 만드는데, 사람 힘으로 비를 막는 건 왜 못하겠는가. 언젠가는 누군가가 하지 않겠는가. 무슬림이랑 싸우랴, 힌두이즘이랑 싸우랴, 이제는 중국과 싸우랴 전투력 급상승 중인 라다크도 화이띵이다. 그 싸움박질 속에서 어떻게든 먹고 살아보려 고군분투하는 창파들 제일 화이띵이다. 마지막으로, 모순 그 잡채, 우리 휴먼 다같이 화이띵. 인정하면 그 자체로 극복의 시작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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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 & Love!

 last year 

몇 세기 전에도, 그 세기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 지금 세기에 남아있지 않을 것이라 상상을 했었을까요. 미래는 멀고 현재는 가깝습니다.

결국 오로지, 그리고 오롯이 현재를 살아내는 감각과 촉을 믿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네요.

 last year 

맞아요. q님. 말씀하신 '현재를 살아내는 감각과 촉'과 멀어지고 있는 기분이 들 때면 제 뒤통수를 (꽤) 세게 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