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사의 한 조각 - 단성사의 역사 3
기실 액션영화나 활극을 주로 간판에 내세웠다는 것은 극장가의 명문으로 불리기에는 좀 아쉬움이 있었다. 흥행의 보증수표라 할 007 시리즈는 피카디리와 단성사의 주요 경쟁 품목이었다고 하니 (위 이용희 인터뷰 중) 왕년의 한국 영화의 산실 단성사에 걸맞는 포토폴리오는 아니었던 셈이다. 그러나 단성사는 단성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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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추석 ‘추석특선프로’로 한국 영화 흥행사에 길이 남을 영화 하나를 쏘아올린 것이다. <겨울여자>였다. 김호선 감독에 한국 영화의 영원한 히어로 신성일이 등장하고 그 상대역으로 장미희가 열연했으며 곁들여 김추련, 송재호, 박원숙 등이 출연했던 이 영화는 단성사에서만 58만 명이라는, 당시로서는 전무후무한 국내 영화 흥행 기록을 세운다. 이 영화의 포스터 문구는 매우 인상적이다. “수십 편의 외화를 마다하고 왜 명문 단성사는 이 영화를 특선(특별히 선정)했을까!”
앳된 여자 주인공 '이화'가 소녀에서 여인으로 성장하면서 만나는 여러 남성들을 통해 현대사회의 갈등을 묘사하고 파격적인 현대 여성의 성(性) 모랄을 담은 <겨울 여자>의 남녀 주연은 당연히 신성일과 장미희였다. 그런데 이 엄연한 전제를 무시한 일대 사건이 단성사 간판 위에서 벌어진다.
당시 극장의 얼굴은 단연 간판이었다. 개봉관들의 간판 그림을 그리는 이들은 ‘화공’이라고 불리우며 대접을 받았고 그들은 영화의 대표적인 장면들과 주인공들의 극적인 모습을 간판에 담았다. 당시 <겨울 여자>의 간판을 그린 단성사 화공 백춘태씨는 어느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회고를 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구레나룻이 시커먼 놈이 찾아와서는 간판에 자신의 얼굴을 넣어달라는 거야, 쳐다보지도 않았더니 일이 끝나도록 기다리다가는 포장마차로 날 데려가더군. 그래 이름만 넣어주겠다고 했더니 꼭 그림이어야 한대. 며칠 동안 찾아오는 정성이 기특해서 '에라 욕 한번 먹자' 하고 걔를 신성일보다 크게 그렸지. 개봉날 난리가 났어. 신성일 측에서 가만 있겠어? 미술부 문 닫고 도망쳤지."
이 구레나룻 시커먼 청년은 영화 <겨울여자>에서 여주인공 이화와 사랑을 나누는 운동권 청년 정치학도 석기 역을 맡은 영화배우 김추련이었다. 김추련과 장미희가 남루한 다방에서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 중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들으며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은 명장면으로 남아 있거니와 당대의 배우 신성일을 뒷전에 세우고 자신을 단성사 간판의 주인공으로 부각시키고자 했던 당찬 배우 김추련은 이 영화를 통해 스타가 됐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영화 속에서 교통사고로 일찍 죽은 것처럼, 김추련은 2011년 11월 8일 “외로움과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유서 중)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서 이 세상과 이별하고 영원한 ‘겨울 남자’로 남는다.
<겨울 여자>는 무려 100일 동안 연일 전회 매진 행진을 펼친다. 추석 특선 프로로 나온 영화가 해를 넘기고 구정 특선 프로까지 이어졌고 3월이 되어서야 그 아쉬운 막을 내리게 된다. 앞서 말한 바대로 한국 영화 최고의 흥행 기록이었다. 당시 내리막을 걷고 있던 한국 영화는 그로부터 13년 동안 그 기록을 깨지 못한다. 한국 영화의 암흑기라고나 할까. “돈 주고 한국 영화 안 본다.”는 시절이었다. 그러던 중 한국 영화 부활의 신호탄 하나가 또 단성사 간판을 박차고 세상으로 날아오른다. 1990년 6월 9일 <장군의 아들>이라는 영화였다.
70년대 이후 한국영화는 내리막이었다. 단성사에서 개봉하여 공전의 히트를 친 <겨울여자>의 흥행 기록은 영원히 깨지기 힘들게 보일 정도로 한국 영화의 수준과 흥행은 바닥이었다. 한국 영화의 산실이라 할 단성사도 스크린쿼터를 채우기가 무섭게 헐리웃 영화의 간판을 내걸기 일쑤였고, 한국 영화로 10만이 넘었다면 대단한 성과로 신문 지상을 장식하던 시절이었으며, 영화제작사들은 수입 쿼터를 따내기 위한 면피용으로 한국영화를 싸구려로 제작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하지만 태흥영화사를 이끌던 이태원 사장은 좀 달랐다. 태흥영화사 역시 헐리웃의 20세기 폭스사 영화를 주로 수입하여 단성사에 주로 내걸어 재미를 보았던 회사였지만 한국 영화계의 거장이라 할 임권택과 지속적으로 함께 작업하며 서로 신뢰를 쌓았고, 한국영화 제작에도 열의를 보였던 것이다.
단성사에서 개봉했던 <만다라>나 <백치 아다다>, 그리고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씨받이> 등 진중한 영화를 연속하여 제작해 온 임권택 감독에게 이태원 사장은 색다른 제안을 하게 된다. 쉬어가는 의미로 가벼운 액션물 하나 만들자는 것. 소재는 일제 시대 깡패 김두한. 임권택 감독은 내심 언짢았다고 한다. 국내에서도 그렇지만 이제는 해외에서도 알아주는 반열에 오른 자신에게 왜 그런 카드를 내미느냐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왕년에 B급 또는 그 이하 수준의 액션영화를 수도 없이 찍어 냈던 임권택 감독은 어찌 어찌 그 제안을 수락하게 되고 영화 <장군의 아들>이 1990년 6월 개봉한다. 단성사에서였다.
이 영화는 그야말로 대박을 친다. 영화 이전만 해도 그저 평범한 학생일 뿐이었던 박상민은 이렇게 회고한다. “오디션을 보고 촬영을 하고 개봉되기 전까지만 해도 전 평범한 학생이었어요. '스타'라는 인식이 전혀 없었죠. 그러다가 하루는 밖에 나갔는데 날 보던 한 여학생이 그 자리에서 '악'하고 기절하는 거예요." (이데일리 2009.8.25 인터뷰 중) 영화에서 뜬 사람은 그 뿐이 아니었다. 명문대학생이었던 신현준은 김두한의 상대역인 하야시 역으로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그는 영화 내내 짤막한 스포츠 머리로 출연한다. 조선인이었지만 일본인으로 살았던 하야시의 풍모를 묘사한 설정이 아닌가 했는데 몇 년 전 신현준이 ‘무르팍 도사’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영화 출연에 반대한 아버지 손에 깎인 것이라고 했다. 이렇듯 스타 하나 없이, 생 초짜 배우들을 데리고 크랭크인을 감행한 이 영화는 단성사 한곳에서만 67만 8946명을 동원하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단성사 극장에게도 <장군의 아들>은 감회가 서린 작품이었다. 단성사의 1차 전성시대라 할 1920-30년대를 무대로 한 영화였고 김두한의 ‘나와바리’였던 우미관은 일제 시대 단성사와 치열한 업계 라이벌이었다. 또 김두한이 일본 경찰 유도 사범이었던 마루오카와 대결을 벌이는 곳은 바로 ‘단성사’ 앞이었다. 일본인들이 주도했던 명동과는 달리 조선인들의 상권과 영향력이 살아 있었던 일제 시대 종로, 그리고 그 한복판에 위치했던 단성사의 초상은 영화 속에서도 선연하게 되살아났다.
한때 단성사 처마 밑에서 새우잠을 자던 불우한 꼬마 김두한, 주먹 하나로 종로 거리를 휩쓸고 다니며 단성사 지배인에게 용돈도 받아 쓰던 왈패 청년 김두한의 이야기로 한국 영화 부활의 축포를 거하게 쏘아 올렸으니 단성사로서는 참 신기한 인연이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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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장군의 아들>도 신호탄에 불과했다. 90년 역사의 단성사 최고의 순간은 남아 있었다. 그것이 <서편제>였다. 이 얘기는 앞 포스팅에서 했으니 반복 않기로 한다. 분명한 것은 <서편제>가 기폭제가 된 한국 영화는 <쉬리>를 낳고 <실미도>를 생산하고 JSA 를 창조하고 <괴물>을 그려내면서 세계 속으로 성큼성큼 나아갔다는 것이다.
이후 새로워진 영화 환경 속에서 멀티 플렉스 극장의 맹공세에 견디지 못한 단성사는 기존의 건물을 헐고 멀티플렉스형 단성사로 새단장을 했다. 2005년 2월 3일 환골탈태한 모습으로 종로 3가에 우뚝 선 단성사 7층과 8층의 벽은 수천 개의 이름 석 자들로 도배되어 있었다. 이는 한국 영화인 협회에 등록된 배우와 감독과 기타 촬영 스탭들의 이름들이었다. 그것은 또한 단성사에 깊이 맺혀 있거나 스쳐 지나갔던 빛과 땀과 눈물의 총합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단성사의 운명은 순조롭지 못했다. 각지에 극장 체인이 생겨나면서 “버스 타고 종로 가서 영화 보고 커피 한 잔”의 생활 패턴은 사라졌고, ‘100년 역사’ 단성사에 유달리 애정을 줄 만큼 문화적 촉각이 발달한 우리 사회도 아니었다. 2008년 최종 부도를 맞은 단성사 건물은 여러 차례 공매에 부쳐졌다가 유찰되는 아픔을 겪으며 현재는 폐쇄되어 있다.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겠다) 이제 단성사에서는 영화가 상영되지 않는다. 어느 주인을 만나 그 명맥을 이어갈지는 모르나 적어도 현재로는 그렇다.
옛 모습과는 천양지차로 달라졌거니와, 아니 아예 새 건물이거니와 그래도 종로3가의 ‘랜드마크’였던 단성사 자리에 들어선 건물을 지나면 항상 내 마음은 과거의 철길로 달린다. 저 건물 7층과 8층의 벽을 빼곡이 채웠던 7800여 명의 이름 석 자. 그들이 혼신을 다해 만들었던 영화, 그 영화를 보겠다고 엄동설한이건 삼복더위건 장사진을 치며 몰려든 관객들, <아리랑>을 보며 울면서 관객들이 합창하던 아리랑 소리가 들려오고, 어렸을 적 백설공주가 저렇게 생겼을 거야 라고 생각했던 장미희가 호쾌하게 웃고 있는 <겨울여자> 포스터도 떠오르고, <장군의 아들>을 보고 나온 후 단성사 앞에서 폼을 잡으며 덤벼라 마루오카! 하며 까르르 웃던 청춘의 내 친구들이 지나가고, <서편제>의 유명한 진도 아리랑 장면에 나오는 돌담길을 가 보겠다고 부득부득 청산도행 뱃길에 오르던 객기의 이정표가 싱긋 웃으며 내 시선을 맞는 추억여행의 철도. 그 역 중의 하나가 단성사였다
단성사 1층 대합실(?)에서 누군가를 1시간여 기다리며 지쳐가던 추억이 생각납니다. 이젠 그 건물이 없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