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서 빠져나와 삶 속으로 들어가라

in #kr-psychology7 years ago (edited)

신경끄기의 기술 1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인간은 언어라는 상징을 통해 실제 현실을 머릿속에 가져와 시뮬레이션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의 이러한 능력은 주지하다시피 문명이 발달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습니다. 하지만 수용전념치료(ACT)에서는 인간의 이런 능력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심리적 고통이 야기될 수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뱀이라는 단어 자체가 뱀은 아닙니다. 우리는 뱀이라는 단어를 실제 현실에서 기어다니는 뱀을 가리키는 상징으로서 사용하기로 합의하였고, 이에 뱀이라는 단어를 쓰면 누구나 현실에서의 뱀을 떠올리게 되며, 그 중 일부는 혐오감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뱀에 대한 특정공포증을 지닌 사람은 뱀이라는 글자만 봐도 두려움이 엄습할 것입니다. 머릿 속에서 경보음이 왱왱 울리는 것이죠. 뱀을 실제로 본 것이 아님에도 글자 자체가 뱀을 떠올리게 만들고 부적 정서가 유발되는 가운데 도망치는 데 필요한 신체적 준비를 하게 됩니다. 자동화된 과정이죠. 이런 프로세스는 뱀에 대한 특정공포증을 지닌 사람에 국한되는 얘기는 아닙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인간이라면 모두 동일한 프로세스를 경험합니다.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발표하는 것을 죽도록 싫어하는 사람은 발표예정일이 적힌 스케줄러를 볼 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에 식은땀을 뻘뻘 흘려가며 고통스럽게 발표했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는 다시 발표예정일에 발표를 제대로 하지 못 할 것이라는 예측을 낳게 되죠. 이 예측에는 얼굴이 빨개진 채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염소 같은 떨리는 목소리로 발표하고 있는 '미래의 나에 관한 정신적 심상'이 수반되기 쉽습니다. 스케줄러 한 번 봤을 뿐인데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불쾌한 경험을 하게 되죠.

인간의 생각은 이렇게 공사다망합니다. 언어라는 상징을 통해 현실과 관계 맺을 수 있는 우리의 사고체계는 매우 확산적인 특성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발표라는 단어 하나만 봐도 여러 가지 상념에 빠져들기 쉽습니다. 검색창에 발표를 치면 연관검색어가 여럿 뜨는 것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점화(priming)라고 표현하는데요. 발표와 연관성이 높은 개념이나 심상들이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불수의적으로 머릿속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죠. 문득 학창 시절의 좋은 추억에 젖어들었다가도 연관검색어로 처참하게 망했던 발표 수업이 떠오르게 되면, 그와 동시에 못난 내 모습(ex 찌질하고, 이기적이고, 게으른 등등의 나)이 연쇄적으로 점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정적 정서에서 부적 정서로 급격하게 전환될 수 있다는 것이죠.

언어는 실제 경험의 상징물이라 할 수 있지만 많은 부분 실제 경험과 비슷한 효과를 갖게 마련입니다. 위 예들에서 '뱀'이나 '발표'가 부적 정서나 회피 행동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죠. 이는 여러모로 유용한 점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도 여러 가지를 알 수 있죠. 끓는 주전자에 손을 대면 다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아이는 직접 경험해 보지 않아도 끊는 주전자에 손을 댔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하고 조심해서 행동할 수 있습니다. 조금 많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원시인들은 언어를 통해 생각을 함으로써 많은 위험을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언어를 통해 실제 현실에 관해 생각하는 것과 실제 현실 그 자체를 경험하는 것은 분명 다른 것이지만, 위험회피나 예방을 통한 생존가능성의 증가라는 큰 이득이 있기 때문에 인류 진화의 과정에서 이 둘의 상호교환이 성립할 수 있게 뇌의 구조나 기능이 바뀌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로 인한 폐해 역시 상당합니다. 생각의 늪에 빠져서 현실을 경험하는 것이 어렵게 되는 때가 많아졌다는 것이죠.

예를 하나 들어 볼까요. 밥 먹는 시간도 아껴가며 9급 공무원 고시에 매달린 A씨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낙방하자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점화됩니다. '나는 정말 안 되는 놈인가', '다른 거 하라는 부모님 말을 들을 걸 고집만 세서 이렇게 됐네', '다른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한심한 놈이라고 여기겠지..' 이 상황에서 현실은 공무원 고시에 세 번째 낙방했다는 사실입니다. '안 되는 놈', '고집만 센 사람' ,'한심한 놈' 등의 라벨링이 현실에 관한 생각이자 생각의 늪이죠. 자기가 정말 안 되는 놈인지, 고집만 센 놈인지, 한심한 놈인지는 실상 얼마든지 반증이 가능한 명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뚝심 있고 성실한 사람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죠.

자신에게 부정적인 판단의 딱지를 붙이는 것은 인지적 융합(cognitive fusion)에 속합니다. 생각은 생각일 뿐 나라는 사람 그 자체는 아닌데, 그 생각의 편린 안에 나를 가둬버린 상태가 인지적 융합입니다. 이 사람이 부정적 자기평가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인지적 융합 상태에 빠지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개연성이 높은 시나리오들이 있겠죠. 한심한 놈, 안 되는 놈이라는 부정적 자기평가는 추후 공무원 시험에 재응시할 가능성을 낮출 것입니다. 컴컴한 자취방에서 온갖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인 채 내년 공무원 시험에서도 낙방하는 상상을 하게 되고, '어차피 망할 거 보지 말자'고 결심을 굳힐 수 있다는 것이죠. 아직 발생하지 않은 미래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낙방하는 상상(생각)이 현실을 대치하는 인지적 융합이 다시금 발생하여 이 사람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매우 힘들 수밖에 없는 상황을 예로 들긴 했지만, 생각이 현실을 대치하여 감정이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이런 일은 우리네 일상에서 비교적 흔하게 일어납니다. 어떤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하다는 생각 때문에 그 사람들과 함께 있게 되는 상황을 애초에 피한다든지, 수줍음이 너무 많아서 회식 자리에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보이지 않을까 염려한 나머지, 그런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부정적 감정(ex. 뻘쭘함)을 피하기 위해 잘 먹지도 못 하는 술을 초반부터 달린다든지, 연인과 헤어지면 너무 외로워질 것 같아서 나를 홀대하는 연인과의 관계를 유지한다든지 하는 상황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인지적 융합은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적 기능이지만, 이 기능이 과하게 작동하면 병리가 되는 것이죠.

자꾸 생각에 파묻혀 현실을 피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많은 분들이 살아오며 한 번쯤 경험해 보셨을 만한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치과 가는 것이 무서워서 주기적으로 치과를 가지 않는 사람 가운데 한 명이 전데요. 그 덕에 신경치료할 때마다 배우는 게 하나 있습니다. 고통은 피하면 피할수록 더 큰 고통에 직면하게 된다는 사실이죠. 치과를 진작 갔더라면 별로 아프지 않고 치료할 수 있었을 텐데, 매번 치과는 공포스러운 곳이라는 라벨을 붙여 치과 가기를 회피하다 보니 어느 순간 몇 배는 더한 고통이 뒤따르게 되더란 말입니다. 이런 상황을 두고 학문적으로는 인지적 융합으로 인한 경험회피(experiential avoidance)가 발생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치과는 무서운 곳이라는 인지적 융합이 발생하여 치과를 안 가게 되는 경험회피가 발생한 것이죠. 치과는 무서운 곳인가요? 치과는 치과일 뿐 무서운 곳은 아닙니다. 무섭다는 것은 제 생각일 뿐이죠.

경험회피는 어떤 외부적 상황(ex. 발표 상황)을 피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위 예에서 나타나듯이 부정적인 감정(ex. 뻘쭘함, 외로움)이나 부정적 사고와 같은 내적 경험에 대해서도 경험회피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부정적 사고를 회피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자세히 알아볼까요? 앞서 공무원 시험에 낙방한 사람의 예를 다시 들어보겠습니다. 이 사람이 자신은 한심한 놈이라는 생각의 편린에 자신을 가둬버린다 하더라도 마음 한켠에서 그러한 생각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전투를 벌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생각에 대해 생각(meta-cognition)을 할 수 있는 동물이니까요. 이 모든 것이 내 잘못인가? 내가 못나고 한심해서일까? 내가 부모님만 잘 만났어도 이렇게 한심한 놈이 되진 않았을 텐데! 라며 부모님 원망을 하기 시작하는 것도 생각에 대한 생각을 통해 나는 한심한 놈이라는 부정적 사고를 회피하는 한 방식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한다고 한들 나는 한심한 놈이라는 생각이 사라질까요? 부모님까지 원망하는 나색히는 정말정말 한심한 놈이구나 라며 생각에 대한 생각에 대한 생각이 꼬리를 물고 계속 될 수 있습니다. 생각의 지옥에 스스로를 빠뜨릴 수 있는 것이 인간이죠.

신경끄기의 기술을 쓴 마크 맨슨도 책의 서두에서 경험회피의 해악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저보다는 훨씬 재미있게 말하네요. ㅎ

지옥의 무한궤도에 걸려든 걸 환영한다. 아마도 처음은 아닐 것이다. 설마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안에 있는 건가? “이런, 맨날 여기서 뱅뱅 돌고 있다니 난 정말 루저야. 이걸 멈춰야 해. 맙소사, 내가 나를 루저라고 부르니까 진짜 루저가 된 느낌이 드네. 다시는 나를 루저라고 하지 말아야지. 이런, 젠장! 또 나를 루저라고 했잖아! 그런 건가? 난 루저인 건가? 으악!” 23쪽.

생각의 지옥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인지적 탈융합(cognitive defusion) 과정이 필요합니다. '나는 한심한 놈이라는 생각'이 '나'는 아니죠. 내가 나 자신에게 그런 라벨을 붙일 수는 있겠지만 나 자체가 한심한 놈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울이나 불안을 '부정적' 감정이라고 일컫지만 우울이나 불안 그 자체는 가치중립적인 현상입니다. 내 마음의 강에 우울이라는 나뭇잎이 떠내려 올 수도 있고 불안이라는 나뭇잎이 떠내려 올 수도 있습니다. 떠내려 왔다가 이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이 일반적이죠. 이 감정들을 피하려 하지만 않는다면 떠내려 가게 돼 있습니다.

우리가 편의상 이 두 감정 모두에 부정적 정서(negative emotion)라는 라벨을 붙이고 있지만 부정적이라는 말은 기술적인 의미이지 가치판단적 의미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정적 정서'라는 라벨을 가.치.판.단.적으로 우울과 불안에 쉽게 붙힙니다. 즉 '부정적'이라는 언어의 틀 안에 불안과 우울(혹은 분노와 수치심 등등)을 가둬두고, 피해야 할 무언가로 이 감정들을 인식하기 쉽죠.

인지적 탈융합이라는 것은 '나는 한심한 놈'이라는 것이 사실이라기보다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울이나 불안을 '부정적 정서'라는 언어적 라벨에 가둬 피하려 하기보다, 마음의 강에 떠내려가고 있는 나뭇잎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없애거나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단지 경험하면 그만일 뿐임을 깨닫는 것을 ACT에서는 수용(acceptance)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수용전념치료인 것이죠. 이쯤에서 마크 맨슨의 말을 다시 발췌해 옵니다.

고통 회피는 일종의 고통이다. (중략) 고통을 피하려 하면, 고통에 지나치게 신경이 쏠리는 법이다. 28쪽.

마크 맨슨은 많은 경험과 깊은 사유 등을 통해 도를 터득한 현대판 구루 아닌가 싶어지네요. 마크 맨슨이 말하는 것이 바로 ACT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내외적 경험을 피하려 하면 더 그 경험에 신경이 쏠리고 그 경험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반면 부정적인 내외적 경험을 받아들이면 그것이 거짓말처럼 사라집니다. 흘러가버리는 것이죠. 이런 삶의 역설을 불교 승려를 포함한 구도자들이 아주 오래 전부터 깨달아 왔고, 심리학 및 정신의학 등에서 받아들여 심리치료나 심리상담에 적극 활용하는 중입니다.

인생의 진정한 의미와 성취감은 자신만의 투쟁을 선택해 감내함으로써 얻어야 한다. (중략) 해법은 그런 부정적 경험을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이다. 피하거나 구원을 바라서는 안 된다. 41쪽.

제가 이전 글에서 인지행동치료(CBT)를 언급했는데, CBT의 목표는 부정적인 사고를 보다 합리적인 사고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설명한 ACT와 같은 마음챙김 및 수용의 입장에서 보면 부정적인 사고를 합리적인 사고로 변화시키는 것(그리고 결과적으로 부정적 감정을 완화시키고 기능적으로 행동하게 하는 것) 역시 생각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 한 상태일 뿐입니다. 부정적 사고나 부정적 핵심 신념을 논박하려 하면 할수록 더 거대하고 강고한 부정적 사고나 부정적 핵심 신념, 더 깊고 널리 퍼진 부정적 감정에 맞닥뜨리게 되는 역설에 빠진다는 것이죠.

사고 억제의 역설과도 관련이 있는데요. 흰곰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그것을 더 생각하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 기제로 부정적인 사고나 감정을 통제하려 하면 더 그것에 휘말리게 됩니다. 반면 내가 그 생각을 하고 있구나 인지적으로 탈융합하여 수용하면 그 생각에 휘말리는 법 없이 그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 생각과 투쟁하려 하지 말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려운 것 같지만 쉽습니다. 한국에 ACT를 도입하여 대중화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상담심리전문가 문현미 선생님이 말하는 수용을 들어봅시다. 박사 논문의 내용을 인용했습니다.

즉, 수용은 사적 경험에 대해 통제하거나 변화시키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단순히 경험하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즉, 심리적 수용은 사적 경험에 대해 피하거나 통제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것을 경험하고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12쪽.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챙김과 같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ACT가 마음챙김과 다른 점이라 할 만한 것은 마크 맨슨이 말했듯이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데 있습니다. 고통을 받아들여 고통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치 있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ACT에서는 이를 두고 전념(commitment)이라고 표현합니다. 자신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추구하라고 하죠.

그런데 모든 가치가 다 좋은 것일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마크 맨슨은 좋은 가치와 나쁜 가치를 구분합니다. 저는 이 부분이 중요하고 실용적이라 느꼈습니다. 마크 맨슨은 자신이 좋은 가치라고 생각하는 다섯 가치를 선정하여 각각을 설명하기 위해 책의 절반 이상을 할애하고 있습니다(즉 강한 책임감/믿음을 맹신하지 않는 것/실패/거절/내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숙고하는 것).

좋은 가치는 1. 현실에 바탕을 두고 2. 사회에 이로우며 3. 직접 통제할 수 있다. 나쁜 가치는 1. 미신적이고 2. 사회에 해로우며 3. 직접 통제할 수 없다. 정직은 좋은 가치다. 왜냐면 완전히 통제할 수 있고, 현실을 반영하며, 타인에게 이롭기 때문이다. 반면에 인기는 나쁜 가치다. 인기가 당신의 가치라면, 그리고 댄스파티에서 최고로 인기 있는 사람이 되는 게 그 기준이라면, 우선 많은 일이 당신의 통제 밖에 있게 될 것이다. (후략) 109쪽.

고통에도 불구하고 좋은 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ACT에서는 여러 비유를 통해 설명합니다. 길지만 ACT에서 많이 사용되는 비유를 가져옵니다. 역시 문현미 선생님 박사 논문에서 가져 옵니다.

Passengers-on-the-bus.jpg

버스가 있고, 여러분은 운전사라고 합시다. 이 버스에는 승객이 많이 탔습니다. 여기서 승객들은 생각, 감정, 신체적 상태, 기억, 그리고 내적 경험의 다른 측면들입니다. 그들 중 어떤 자는 무시무시하게 생겼습니다.

여러분이 운전을 하고 있는데, 승객들이 운전사인 여러분에게 ‘이렇게 해라, 어디로 가야한다, 왼쪽으로 돌려라, 오른쪽으로 가야한다’는 등, 여러분을 위협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바대로 하지 않으면 버스 뒤에서 앞으로 나오려고 합니다.

이 승객들을 다루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첫째로, 여러분은 승객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버스 뒤에 앉아서 조용히 하세요. 여러분들이 말하는 대로 할테니까.' 두 번째로, 여러분은 '이렇게 하기 싫다! 이 사람들을 버스 밖으로 쫓아내야겠어’ 라고 생각하고는, 버스를 멈추고 뒤로 가서 술 냄새나는 이 승객들을 처리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버스를 세우는 일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운전을 안 하고, 이 승객들 처리하는 일만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힘이 세고, 내리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그들과 씨름을 하느라 애를 쓰지만,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세 번째로, 여러분은 뒤로 가서 승객들을 달래서 그들이 뒷자리에 제대로 앉아 있게 하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요청하는 것을 대신 들어주어야 한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넷째로, 여러분은 그들이 버스에 없는 것처럼 여기고 버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왼쪽은 당신이 원하는 방향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러분이 자신들의 말을 무시한다고 더 큰 소리로 아우성을 치고 먼저 보다 다루기가 더 힘든 만큼의 힘을 가지고 앞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방법들은 ‘만일 그들이 말하는 대로 안 하면, 앞으로 나와서 여러분을 방해할 것이다’라는 가정에 기초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그들이 나오지 않도록 그들이 말하는 바대로 하거나, 그들과 씨름을 합니다. 운전사는 버스를 조정하는 것인데, 여러분은 승객들을 다루기 위해 운전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됩니다. 달리 말해서 여러분이 이들을 통제하려 할수록 실제로 여러분 자신의 통제를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자기네 말을 안 들으면 제대로 못 갈 거라고 하더라도 그런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승객들은 운전사가 아니라 승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러분의 의지 없이 여러분에게 무언가를 하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승객들이 떠들어대도 우리가 가야할 길을 향해 운전을 하는 운전사입니다. 그러므로 승객들이 아무리 소란스럽게 굴더라도 그것을 다루느라 운전을 멈추는 일 없이, 승객들이 떠들게 놔두고, 운전을 잘 하면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운전을 제대로 해서 목적지까지 무사히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67-168쪽.

ACT는 대학원 때(한 7년 전..) 배운 내용인데 신경끄기의 기술과 오버랩되는 부분이 많아서 개인 정리 차원에서 포스팅해 봤습니다. 신경끄기의 기술에 초점을 두려 했으나 ACT에 관한 내용이 돼 버렸네요.

버스 운전 비유에서 잘 나타나고 있듯이 생각이 내는 다양한 소리에 휘둘리기보다 자신이 정한 가치에 따라 묵묵히 제 갈 길을 가면 됩니다. 마크 맨슨이 '신경끄라'고 말하는 것도 이와 비슷한 의미인 것 같고요.

신경을 끈다는 건 삶에서 가장 무섭고 어려운 도전을 내려다보며 아무렇지 않게 행동에 나서는 것이다. 28-9쪽.

생각은 생각일 뿐 그것에 너무 휘둘리는 것은 정신건강에 좋지 않죠. 흘러가는 생각과 감정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적 감정이나 생각이 치밀어 오를 때는 생각이나 감정으로부터 탈융합하는 것이 어려운 게 사실이죠. 이럴 때는 탈융합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자신의 호흡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호흡명상이죠. 매우 간단한 방법이지만 많은 연습이 필요한 과정이고 시행착오가 필요합니다. 스팀잇에 108배하는 분들이 계시던데 이것도 명상의 일환이죠.

호흡명상이나 108배나 쉽고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실제로 꾸준히 연습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실천할 만한 가치가 있죠.

인지적 탈융합을 통해 고통을 수용하는 것이 가능해 졌다 하더라도 전념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제게 ‘좋은 가치’는 어떤 것일까 생각해 보게 되네요. 여러분의 좋은 가치는 무엇인지도 궁금하네요. 이만 공부를 마칩니다.

덧. 이 글의 제목은 문현미 선생님의 ACT 번역서 제목에서 따왔습니다. ACT에 대해 알기 쉽게 씌인 입문서입니다.

*이 글은 교차 게시물(cross-posted material)로 http://slowdive14.tistory.com/1298735 에 동시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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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임에도 글이 좋아서 완독하게 됩니다. 예전에 읽은 책의 문장도 생각나고요.

"개라는 낱말은 짖지 않는다." 스피노자가 처음 말했으며 현대 구조주의 언어학의 특징을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이 명제의 의미는 사실 무척이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철학: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남경태, 들녘, 2007)

점화, 인지적 융합, 인지적 융합으로 인한 경험회피, 인지적 탈융합, 수용 등, 몰랐던 개념을 공부하게 됐네요. 저는 샤워할 때 점화한 생각의 파편이 찾아들 때가 있습니다(자려고 누웠을 때도요). ㅎㅎ
『신경 끄기의 기술』은 저도 잘 읽었고, 스팀잇에 그에 관한 을 쓴 적이 있습니다(slowdive14님이 그 글에 댓글 남겨 주셨죠). 묵직한 주제를 가볍게(?) 표현하는 저자의 필력에 놀랐던 기억이 나네요. 논문 인용까지 해주시고, 정말 잘 읽었습니다. 버스 운전대를 잡고 있는 사람은 나라는 사실을 재차 생각해야겠습니다.

맞아요. 댓글 단 기억이 나네요. 신경 끄기의 기술을 다시 읽은 게 perspector님의 글을 보고 난 후였던 것 같아요. 감사드립니다. 이 글을 쓰게 된 이유 중 하나를 제공해 주셨네요. ㅎ 긴 글 읽어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음.. 구조주의 언어학이란 것은 무엇이고 저 문장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문득 궁금해지네요.

뱀이라는 단어 자체가 뱀은 아닙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특정 생명체를 개라고 부르고 쓰는 것이지, 개라는 단어에는 해당 생명체와 결부된 것이 실상은 없다는 맥락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그래서 개라는 낱말은 짖지 않는다고 한 듯합니다). ㅎㅎ 제가 구조주의 언어학을 논할 정도로 그쪽으론 잘 모르지만요. ㅎㅎ

그렇군요. 개라는 낱말은 짖지 않는다고 말한 데는 어떤 의도가 있을 것 같은데 스피노자가 이 말을 했을 당시의 학문적 배경을 알 필요가 있겠네요.

남경태 선생이 스피노자의 말을 빌려서 구조주의 언어학을 설명하려 한 것이지, 말씀대로 스피노자의 발언엔 또다른 학문적 배경이 있을 듯합니다. 제가 깊이 알지 못하는 것을 인용한 면이 있네요. 말이 길어졌네요. ㅎ 글 잘 읽었습니다! :-)

생각을 확장시켜 주셨습니다. 감사하죠!

어떤 상담자들은 삶 속에서 빠져나와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사는 게 힘들어집니다. ㅋㅋ

오늘도 마음 속으로 들어가서 열일하고 왔습니다.

애쓰셨습니다. 전 내일 들어갑니다. 즐거운 주말 되세요.

신경끄기~ 실행해야겠습니다.

어떻게 하는지 알면서도 실행이 어려운 게 신경끄기인 것 같아요.

네~ 연습이 쌓이다 보면 습관이 되겠지요. ^^~

초면에 안녕하십니까..
저는 @room9님의 리스팀 글을보고 연어처럼 들어와 보게되었습니다
저도 나름 심리학을 공부하고 있는 학생이지만(학부생이라 배운다고 말하기도 뭣합니다만) 엄청나게 긴글에 정말 감탄을 하며 글을 읽었습니다. 이렇게 긴글을 정리하고 작성하시는데에도 엄청난 시간을 쓰셨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저도 열심히 읽어보았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굉장히 많이 깎는 사람입니다. 제 스스로 자존감이 낮다고 생각하며 저를 많이 깍아내렸는데, 사실 자존감이 낮다는 사실조차 제가 제 스스로에게 부정적인 라벨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어요. 물론 제가 이러한 라벨링을 지속적으로 해왔기때문에 바로 이 생각을 내려놓는 것은 아무래도 힘들겠다고 느꼈는데, 이 생각을 내려놓는 법또한 알려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뭔가 제가 저를 다시 볼 수 있게끔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해요, 자기스스로 자신을 깎아내리는 사람들이 이 글을 꼭 읽어주었으면 합니다. 잘보고갑니다

심리학도시네요. 반갑습니다. 저는 임상심리 전공한 @vimva님 팟캐스트 듣다가 어떻게 여기까지 흘러들러와서 활동 중인데, 스팀잇에 심리학 전공자가 의외로 많네요.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단정짓는 것은 설령 그것이 좋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스스로를 옭아매는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런 라벨들을 몇 개 갖고 있는데, 라벨과 정반대로도 생각하거나 행동해 보는 것이 자기 색깔을 좀 더 다채롭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부 차원에서 쓴 글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것 만큼 기분 좋은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