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미원조사 12-7 제2차 전역 종결 서부전선(전술적 이유, 전술상황에 대한 중국, 북한, 소련의 상황공유 미흡)
12월 1일 유엔군은 삼소리, 용원리 지역의 포위를 돌파할 가능성이 없어지고 중국군 정면부대의 맹렬한 돌격하에 분할되는 혼란상태에 빠지자 섬멸과 대량무기장비의 유기를 피하기 위해 8시부터 안주 방향으로 돌파구 개척을 시작
제42군이 청계리 신창리에 저지를 받아 시간에 맞춰 숙천, 순천까지 우회하여 유엔군 퇴로를 차단하지 못함(순천 동남 은산 지역까지 진출), 이틈을 타서 안주 숙천을 통해 평양으로 후퇴
<중앙군사위의 지시>
이런 상황에서 중국군은 유엔군이 평향을 중심으로 숙천, 순천, 성천, 삼등을 연하는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하고 중국군의 전진을 저지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이에 따라 중앙군사위는 12월 2일 5시에 지원군사령관에게 명령을 내림
‘서부전선의 각 군 주력부대는 순천, 숙천 선 이북지역에서 4내지 5일간 휴식을 취하도록 함’
“태세를 정비하고 탄약과 식량을 보충하여 계속될 작전을 준비하며, 동부전선의 전과확대에 협조할 것”
팽덕회는 이에 따라 12월 2일 공세를 중지, 안주, 개천, 봉명리, 신창리, 북창리 지역에 집결 재정비 및 재정비 보충토록 하고 일부부대만으로 적의 후미를 추격 남쪽으로 진격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제2차 전역의 중지는 팽덕회가 아니라 중앙군사위가 지시했다는 것이다. 제2차 전역 중지와 관련하여 중국은 소련과 북한의 심각한 반발을 초래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추격을 하지 않고 멈추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앙군사위가 추격을 중시시킨 이유는 무엇일까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 여기서 추격을 중지한 것은 연합군이 평양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하기로 한다는 정보 때문으로 보인다. )
(션즈화의 조선전쟁에서는 이런 전술적 이유에 대한 언급이 없다. 즉 중국군은 당시 작전상황에 대해 소련군과 북한군과 긴밀한 상황공유가 없었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서부전선 작전 결과>
수일간의 작전을 통해 국군 제7, 8 2개사단과 터키여단 대부분을 섬멸, 미제2사단에 섬멸적인 타격
미 기병 1사단, 제25사단에 막대한 타격
총 23,000명 섬멸, 각종 포 500여문, 전차 100여대, 차량 2,000여대, 각종 총기류 5,000여정 포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