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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choonza2 years ago (edited)

춘자_원형_2.jpg
@zenzen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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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 근처에서 나는 작별을 고한다. 한참 동안 그런 집을 더는 볼 수 없으리라. 알프스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가까워지고 있으니 말이다. 독일 풍경, 독일어와 더불어 북방의 독일식 건축 양식도 여기서 끝이다.


그러한 경계를 넘는다는 것은 그 얼마나 멋진 일인가! 방랑자는 여러 가지 면에서 원시인이다. 유목민이 농부보다 더 원시적이듯이 말이다. 하지만 한곳에 뿌리박는 것이 극복되고 경계라는 것이 무시되면 나 같은 유형의 사람들이 오히려 미래로 이어지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 나처럼 국경을 아예 무시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면 더 이상 전쟁도 바리케이드도 없으리라. 경계처럼 혐오스러운 것도, 경계처럼 어리석은 것도 없다. 경계는 대포와도 같고 장군들과도 같다. 이성과 인간성, 평화가 지배할 때는 사람들은 경계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비웃지만, 일단 전쟁과 광기가 발발하면 그것은 즉각 소중하고 성스러워진다. 전쟁을 치르는 동안 경계라는 것이 우리 방랑자들에게는 얼마나 고통이 되고 감옥이 되었는가! 그딴 것은 악마나 데려가라지!


나는 노트에다 이 집을 그려 본다. 나의 눈은 독일식 지붕과 독일식 들보와 박공은 물론, 정다움이라든지 고향을 느끼게 하는 많은 것과 작별한다. 이것으로 작별이기에 고향을 느끼게 하는 이 모든 것을 나는 더욱 마음속 깊이 다시 한번 사랑해 본다. 내일이면 다른 지붕, 다른 오두막을 사랑하게 되리라. 연애편지에서처럼 내 마음을 이곳에 남겨 두지는 않겠다. 절대 그러지는 않으리라, 내 마음도 함께 가져갈 것이다. 산 너머 저 건너 쪽에 이르러서도 마음은 항상 내게 필요하겠지. 난 농부가 아니고 유목민이니까. 나는 불신과 변화, 환상을 숭배하는 자이며, 나의 사랑을 지구의 어느 한 지점에 못 박아 붙잡아 매어 놓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나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란 항상 어떤 비유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여긴다. 우리의 사랑이 한곳에 머물러 성실과 미덕이 된다면 내게는 그것이 의심스러워진다.


농부에게 복이 있을지어다! 소유하고 정착하는 자, 성실한 자와 덕 있는 자에게 복이 있을지어다! 그런 사람을 난 사랑하고 존경하고 부러워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의 미덕을 흉내 내려다가 난 내 반생을 잃어버렸다. 나는 내가 아닌 것이 되려고 했던 것이다. 작가이기를 원하면서도 또한 시민이기를 원했다. 예술가이고 몽상가이기를 원하면서도 또한 미덕을 겸비하고 고향을 향유하고자 했다. 사람은 그 둘 다 될 수도 가질 수도 없다는 것을, 나는 농부가 아니라 유목민이며 가진 것을 지키는 자가 아니라 새로운 것을 찾는 자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오랜 세월 나는 신들과 율법 앞에서 고행을 해 왔다. 하지만 그것 역시 내게는 우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내 오류이고 내 고통이었으며, 세상의 비참함에 대한 나의 공범 행위였다. 나는 나 자신에게 폭력을 가했고 구원의 길에 과감히 발을 내딛지 못함으로써 세상의 죄와 고통을 가중시켰다. 구원으로 난 길은 좌로도 우로도 나 있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마음속으로 나 있다. 그곳에만 신이 있으며, 그곳에만 평화가 있다.


눅눅한 산바람이 내 곁을 스쳐 불고, 저 너머 푸른 하늘은 다른 땅 위를 굽어보고 있다. 그 하늘 아래에서 나는 때로는 행복하기도, 때로는 향수병을 앓기도 할 것이다. 완전히 나 같은 유형의 인간이라면, 순수한 방랑자라면 향수 같은 것은 알지도 못하는 게 마땅하리라. 나는 향수를 알고, 완벽하지도 못하며, 그렇게 되고자 애쓰지도 않는다. 나는 기쁨을 음미하듯 향수를 음미하고 싶다.


내게 맞불어 오는 이 바람은 경이롭게도 저편 먼 곳, 분수령, 언어가 갈라지는 곳, 산맥과 남부의 냄새를 실어다 준다. 바람은 약속으로 가득 차 있다. 잘 있거라, 소농가며 고향의 정경이여! 젊은이가 어머니와 작별하듯 난 그대에게 작별을 고한다. 젊은이는 어머니를 떠나갈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안다. 그러면서 아무리 그렇게 하고 싶어도 자신이 어머니를 결코 완전히 떠날 수는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헤르만 헤세, <농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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