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TY 100] 숨겨진 세상 스테이지 투

in Wisdom Race 위즈덤 레이스5 month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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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요, 바캉스 다녀왔어요. 그나저나 어쩌죠. 그 날짜에 다른 예약이 잡혀 버렸지 뭐예요? 다른 날짜 골라 볼래요?

하, 이 인간 봐라? 그의 메일은 세 가지 측면에서 나를 분노케 했다. 바캉스를 떠날 예정이며 그 기간 메일에 답을 할 수 없다고 미리 양해를 구하지 않은 것, 계약서는 쓰지는 않았지만 이메일을 통해 서로 확정한 날짜에 언질도 없이 다른 예약을 받아버린 것,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모든 일에 대해 큰 미안함을 느끼지 않는 그의 태도. 곧 죽어도 프랑스어로만 메일을 쓰는 그가 처음부터 못마땅했음에도 번역기로 돌려 메일을 읽어야 하는 불편함에 내 메일도 프랑스어로 번역해서 보내는 수고까지 마다하지 않았는데, 이런 무례라니. 그러고 보면 그는 메일을 쓸 때 행갈이도 안 하는 파렴치한이었다! 나중에는 메일 마지막에 자기 이름도 F만 달랑 써서 보내는 패기까지 보여주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거슬리는 인간. 세상에! 프랑수아의 국적도, 성별도, 연령도 모르지만, 내가 가진 온갖 편견을 조합하여 추측해 보자면 이 자는 디지털 기기에 익숙하지 않은 프랑스의 꼬부랑 할아버지이며 무려 마레에 건물을 가진 부자지만 비용 문제로 직원을 고용하지 않고 손수 임대 관리를 하는 꼬장꼬장한 짠돌이였다.

이런 사람과 계속 일을 진행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큰 위험 요소였다. 현지에서 도저히 대응할 수 없는 변수를 만들고 또 만들어 낼 것이다. 내가 '단기 임대'를 희망하는 '외국인'이기 때문에 뭔가 다른 태도를 보이는 거라면 더 악질이다. 그러나 여전히 아쉬운 건 나니까 일단 한 수 접어야 했다.

그래요, 프랑스는 바캉스 시즌이었죠. 이해해요. 내가 원했던 날짜에 예약이 생겼다니 매우 유감이네요. 나는 일주일 정도 미뤄도 크게 상관없어요. 그럼 이 날짜로 다시 예약할 수 있을까요? 빠른 답변 부탁해요.

다음날까지 회신이 없거나 다시 제시한 날짜도 예약이 불가능하다고 하면 프랑수아와의 인연은 거기까지다. 내게는 대안이 있으니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 게다가 계약서, 수표, 해외 송금 따위의 성가신 절차도 없는 온라인 플랫폼이 어떤 면에서는 더 나았다. 정확히 24시간을 기다려 보기로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프랑수아를 경우 없는 장난꾸러기 할아버지 정도로 여기고 있었지만, 이 게임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악랄하고 무자비한 악당이었다. 나의 모든 계획을 부수고 뒤엎는.

프랑수아의 답장을 기다리던 그 하루 사이에 다른 사람이 나의 대안이었던 그 공간을, 내가 원하는 날짜에, 낼름, 홀라당 예약해 버린 것이다. 그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수백 개의 웹페이지와 구글 지도를 끊임없이 열고 닫으며 쏟아부은 시간과 노력을 떠올렸다. 프랑수아가 팔짱을 끼고 나를 향해 낄낄거렸다. 이 일을 이루기 위해 바닥을 드러내며 기운 운을 겨우 긁어모아 안간힘을 쓰고 있는 나로서는 시작부터 등장한 빌런의 존재가 너무 버거웠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며칠 울다가 9월이 되었다. 프랑수아에게서는 역시나 답이 없었다. 두 달도 남지 않았다. 더 이상 무엇도 기다릴 수 없다. 출발선으로 서둘러 돌아갔다.

비용 때문에 애초에 후보지에서 제외했던 공간을 다시 살펴보기로 했다. 하루 대관료가 프랑수아의 공간보다 거의 배는 비쌌고, 주말에는 추가 요금까지 있어서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았던 곳이다. 하지만 그만큼 메리트가 확실했다. 우선 사거리의 코너에 자리 잡아 쇼윈도 두 면이 모두 우리 것이었고, 충분한 유동 인구를 기대할 수 있었다. 무엇을 채워도 어색하지 않도록 깔끔하게 비워진 실내 공간은 충분히 넓고 쾌적해 보였다. 2022년 승희님과 파리 부동산 투어를 했던 마법사님에게 구글 지도를 보여주었는데 놀랍게도 그는 이미 그 거리를 알고 있었다. 맞은편에 있는 카페가 파리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스타일의 엄청 힙한 카페라 눈여겨봤다는 것이다. 훅 불어난 예산에 마음이 무거웠지만, 다른 곳 볼 거 없이 무조건 여기라며 확신에 차 테이블을 땅땅 두드리는 그를 보고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플랫폼을 통해 다음 대안에 접촉을 시도했다. 나의 프로젝트를 설명하고, 원하는 날짜를 제시했다. 날짜가 비어 있다고 무조건 대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프로젝트 성격이 공간과 맞지 않는 경우 임대인이 제안을 거절할 수도 있기 때문에 프로젝트 소개에 더 신경 썼다. 그리고 임대인이 나의 제안을 수락했다는 메시지를 몇 시간 후 바로 받아볼 수 있었다.

새로운 공간의 매니저인 로렌스는 인간 개비스콘이었다. 신속하고 정확하며, 무엇보다 적극적이었다. 실시간 소통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나에겐 이미 더할 나위 없었다. 현장 답사가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내가 충분히 공간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면, 사진, 영상 등 다양한 자료를 (요청하기도 전에) 보내주었고, 내가 응답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알려주었다.

낮에는 실내로 자연광이 쏟아져 들어오네요. 무척 아름다워요.

그렇죠? 그게 우리 공간의 가장 큰 장점이에요.

그녀와의 몇 차례 대화 끝에 계약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계약서가 프랑스어 버전뿐이어서 정말 미안하다는 그녀의 말에 모든 페이지를 복붙하며 번역기를 돌리면서도 내내 기쁜 마음이었다. 얼얼할 정도로 뒤통수를 맞는 바람에 일이 왕창 꼬여 버리긴 했지만, 프랑수아 덕분에 보물을 찾아냈다는 걸, 파리에 도착하여 그 공간에 발을 들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숨겨진 세상, 이 게임에서 프랑수아의 역할은 안내자, 바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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