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TY 100] 숨겨진 세상 스테이지 원

in Wisdom Race 위즈덤 레이스5 month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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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는 훌륭한 창작자가 정말 많다. 콘텐츠 소비자들의 눈은 하늘 꼭대기만큼 높다. 이 시장은 트렌드가 중요하게 작동하고, 경쟁은 언제나 치열하다. 그러니 흐름에 부지런히 올라타서 파도의 도움을 받거나 흐름을 압도할 만큼 완전히 색다르고 뛰어나야 한다. 아니면 운이 좋거나. 운도 실력이다. 나는 이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경쟁은 그 자체로 한국 사회의 정체성이자 작동 원리이고, 우리는 그 결과를 이미 마주하고 있다. 한국 음악, 한국 영화, 한국 드라마, 한국 음식, 아무튼 한국에서 온 것이라고 하면 세계인들이 눈을 반짝이며 반응하는 것이다. 뛰어난 사람들과 더 뛰어난 사람들이 경쟁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좀처럼 체감하기 어렵지만, 그 땅을 벗어나 보면 금방 안다. 와, 한국 좀 하네!

2016년 인도 산골 마을 꼬맹이들이 BTS에서 누굴 좋아하느냐고 물어왔을 때 대답을 준비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했고, (나는 그때 BTS가 방탄소년단의 다른 이름인 줄도 모르고 있었다), 2019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마트 계산대에서 만난 직원이 '안녕하세요' 하고 말을 걸어왔을 때는 '이미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2020년 빨리 나가서 뭔가 해야겠다 싶었을 때는 전 세계에 역병이 돌았다. 역병이 도는 동안 전 세계가 집에 틀어박혀 한국어를 단체로 학습했는지 2021년이 되자 세계 이곳저곳에서 한국말로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듣도 보도 못한 한국 드라마 한국 영화 제목을 줄줄이 읊으며, 한국 배우 중 전여빈을 제일 좋아한다고 하는 애를 만났을 땐 꽤 충격이었다. 한국 사람 중에도 전여빈 모르는 사람 많을 텐데? 런던 호스텔 리셉션 직원들이 음료수처럼 막걸리를 마시고 있다. 어디 시골 구멍가게에 가도 수십 종의 한국 라면을 판다. 라다크에서 한식당 하던 내 친구는 부자가 되었다. 유럽 애들에게 이제 스시의 시대는 끝났다고 농담처럼 말했는데, '음 과연 그렇지' 하고 다들 인정하는 분위기. 이렇게 파도가 사방에서 넘실거리는 중인데 기다릴 필요 있나. 파도를 잡으러 바다 한가운데로 헤엄쳐 나가 깃발을 들어야지. 세계 곳곳에 공간을 열고 세계인을 잠재적 독자로, 관객으로, 리스너로 만드는 시도. 그것은 곧 스스로 플랫폼이 되고, 스스로 아지트가 되는 일이다. 믿는 구석이 있었다. 우리에겐 스팀이 있잖아. 이건 우릴 위해 만들어진 시스템이라는 걸 알고 있잖아. 때를 기다리며 앞으로 앞으로 걸어온 지가 벌써 몇 년인데. 보부상 춘자 다음은 춘자 인사이드라니까?

출판사가 시도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책을 전시하는 것이다. 세계 곳곳에 갤러리 겸 스토어가 될 공간을 열자. 책을 쓴 사람뿐만 아니라 책을 만드는 과정에 함께한 모든 사람, 삽화를 그린 사람, 사진을 찍은 사람, 책을 디자인한 사람, 편집한 사람이 모두 참여하는 전시를 열고, 작품을 판매하고, 소비자들과 직접 소통하는 살롱 말이다. 그리고 첫 번째 시도는 무조건 파리여야 했다. 파리만큼 압도적으로 아름답고, 눈이 부신, 예술의 도시는 없다. 이건 이 계획을 처음 떠올렸을 때부터 정해져 있던 것이다. 파리병에 걸렸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때가 아니었던 탓인지, 나의 용기가 부족했던 탓인지, 결정적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유럽에 법인을 가진 사업자도 아니고, 유럽에 거주하고 있지도 않은 외국인이 부동산을 임대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유럽 곳곳의 크고 작은 도시에서 열리는 도서전에 참가해 볼까도 생각했다. 프랑크푸르트와 런던, 파리 등에서 열리는 세계적 규모의 도서전 외에도, 아트북, 동화, 아동 도서, 만화 등 특화된 카테고리의 도서를 다루는 작은 규모의 도서전도 많았다. 그러나 일단 비용이 만만치 않았고, 무엇보다 내 안의 부스터가 좀처럼 작동하지 않았다. 재미있는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유럽의 출판 관계자들을 만나는 것이 최종 목적은 아니었으니 당연했다. 무엇보다 좁은 부스에 갇혀 테트리스 조각의 일부가 되어 행사장을 채우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대안은 ‘팝업’이었다.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원하는 때에, 원하는 곳에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이걸 반복하는 것이다. 이건 실제로 노마드의 정신과도 일치하는 전략이었다. 워낙 모든 것이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한국 사회에서 팝업 문화는 정서적으로 익숙하고 마침 대유행인 모양이지만, 유럽에서는 어떤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프랑스의 파리, 파리의 마레 지구에서는 일상적인 일이었다. 마레 지구에서는 팝업 갤러리, 팝업 스토어, 각종 브랜드 런칭 이벤트가 끊임없이 열린다. 특히 패션위크가 열리는 기간 마레 지구는 세계에서 제일 빛나는 지역이 된다. 아름다운 사람들, 힙한 물건들, 반짝이는 생각들, 아무튼 세상에 멋진 것들은 다 이곳에 모여든다. 모여서 반짝이다 흩어진다. 그리고 그다음의 멋진 것들이 다시 모인다. 반짝이는 것들이 모이는 자리는 그것들이 떠난 후에도 여전히 반짝인다. 그런 마레 지구에서 갤러리나 상점들의 단기 임대는 일반적이었다.

패션위크가 마무리되는 10월이면 마레 지구는 한결 한가해질 테니 춘자로드 라다크와 함께 여름을 마무리하고 다음 프로젝트를 진행하기에 적절했다. 다음은 춘자로드 파리와 함께하는 가을이다. 마침 라다크에서 춘자 인사이드 1호점이 될 춘자 여름 별장을 마련할 기회가 생겼고, 언리미티드 글쓰기 유랑단을 시작한 마법사님이 춘자 인사이드 멤버십 1호 가입자가 되었다. 그의 멤버십 가입으로 대관료까지 마련되었다.

비교적 싼 대관료와 (운명이라고 믿고 있었던) 샤를로 가에 위치해 있다는 장점 등으로 1순위가 된 후보지부터 접촉을 시작했다. 프랑스에 10년째 살고 있는 승희님은 파리에서 일을 벌이려고 준비 중인 나에게 경고에 가까운 조언을 건넸다. 프랑스에서의 신청, 해지, 발급, 갱신 등을 포함한 모든 서류 작업, 계약 등의 행정 절차 등을 진행하려면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미쳐버리고 말 거라고. 그녀의 말에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었음에도 임대인 프랑수아의 대응은 상상을 초월했다. 일단 보증금을 수표로 내야 한다는 말에 1차 기겁. (난 수표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아직도 정확히 모른다) 결정적으로 답장이 느려도 너무 느렸다. 하루는 고사하고 답장을 받기까지 보통 사흘은 걸렸다. 모든 체크리스트를 하나의 메일에 정리해서 보냈으나 프랑수아는 그런 나의 노고가 무색하게 단 하나의 질문에 대한 답변만을 보내왔다. 조바심 내지 말자. 그들의 박자에 맞추자. 스스로를 달래며 그와의 소통을 이어 나갔다. 보증금은 수표로, 오케이. 예약 기간이 최소 5일부터라는, 내게는 다소 불리한 조건도 대관료가 싸니까 일단 오케이. 내가 원하는 날짜에 아직 예약이 없었고, 더는 고민하지 않고 계약을 진행하기로 결심했다.

그 날짜에 5일 대관. 계약할게요. 계약서 보내주세요.

그 즉시 실시간으로 일이 진행되리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며칠째 감감무소식이었다. 시간이 계속 흘렀다.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프랑수아가 프랑스인을 대표하지는 않지만, 기약 없는 기다림은 마침 내가 가장 견디기 힘들어하는 상황이었고, 승희님의 말을 되새기며 마음을 내려놓으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미 프랑스인에 대한 구체적인 편견이 내 안에 하루하루 쌓여가고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 때,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되겠다 싶어 공간대여 플랫폼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프랑수아의 공간을 대체할 만한 메리트를 가진 곳은 없었지만, 최악의 상황, 그러니까, 프랑수아와의 소통이 그대로 종결될 경우를 대비하여 후보지를 골라두었다. 1에서 100까지 모든 걸 클릭하고, 읽고 또 읽고, 거르고 또 거르는 광기에 가까운 검색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도 프랑수아에게선 소식이 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95% 정도의 결정이 이루어지고 대관료를 결제하기 직전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거짓말처럼, 프랑수아에게서 답장이 왔다. 마지막 메일 후 3주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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