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사변 육군전사 5권(86)
이렇게 하는 동안 제9사단은 육본 작명 제257호에 의거 1월 3일 13:00에 제1군단 배속이 해제되고 제3군단에 배속되어 C방어선을 점령하기 위하여 전반적인 철수가 단행되었으나, 이미 적이 이 사단 후방 지역에 침투하여 견고한 진지를 구성할뿐더러 계속 후방을 교란하고 있어서 예정 방어선 점령에는 지대한 곤란을 초래하였다.
더구나 금부리와 1,091고지 광주동에서 방대곡과 상남리에 철수한 제28 및 제29연대는 그 후방에 침투한 적으로 인하여 퇴로가 차단되어 사단과의 연락조차 두절 되었을 뿐만 아니라 좌우 인접 부대의 상황판단을 할 수 없고 또한 적의 계속적인 압력으로 인하여 사단장의 지시를 받지 못한 것은 물론 각 연대장의 단독 지휘 하 또다시 동사리를 지향하고 도보 철수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도보 철수에 이른 제28 및 제29연대는 적 제2군단 제10사단의 주력이 침교 남방 행와(行蛙)(DS3286)에 1,000명, 생모리에 1,000명, 하리현(DS3977)에 1,800명의 배치로 인하여 포위 상태에 빠졌으나 다행히 본 포위망 탈출에 성공하여 1월 4일 창촌을 경유, 속사리에 이르렀다. 이로써 제28 및 제29연대는 사단장 김종갑 준장의 지휘를 받을 수 있었으며, 따라서 사단 지휘소와 제30연대의 행방도 알 수 있었다.
사단과 제30연대는 C방어선을 점령하지 못한 것은 물론 오대산에서 평창 방면으로 흘러간 적 2,000명이 광하리에서 위협을 가하기 때문에 포위될 우려가 극심하였고 또한 인접 아 제3사단 지역인 횡성에 적 제12사단 주력이 침투하였으므로 제3사단의 철수와 호응하여 제3군단장 이형근 준장의 지시를 받고 이미 속사리를 철수하여 1월 5일 정선에 도달한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제28연대장 이창정 대령과 제29연대장 고백규 중령은 사단장의 철수 명령과 더불어 1월 6일까지 분산 철수하는 병력을 집결하여 제30연대 제3대대의 엄호 아래 또다시 송계리와 ‘영월’ 선에 설치하려는 ‘황우’ 선을 향하여 철수를 개시하였다.
그리고 제1군단은 역시 육본 작명 제257호에 의거 수도사단만으로서 군단 정면을 담당한 C방어선을 형성하기 위하여 1월 3일 13:00부터 양양, 서림 지구에 배속되어 있는 사단 주력을 송천에 있는 제26연대로 하여금 엄호부대로 하고, 각 연대별로 철수를 단행하여 1월 4일 04:00 제1연대를 주문진 서남방 삼교리(DS7992)로부터 내헌리, 장천리(DS8979)에, 기갑연대를 대관령 자락에서 구산동과 모원리로, 제26연대는 송천에서 사단 주력 철수를 엄호 후 하진부리로 각각 철수하였다. 이때 제26연대 제3대대는 청도리에서 하진부리로 향하는 도중 오대산에서 1월 3일 11:00 적 약 700명과 조우하여 약 7시간 격전을 겪고 이 적을 북방으로 격퇴시켰다.
그 후 대관령과 강릉 선에 철수한 수도사단은 C방어선을 형성하기 위하여 진지 점령에 주력하였으나, 아군의 전반적인 상황 불리로 인하여 인접 제3군단과 연결을 유지해야 되므로 1월 6일 06:00 또다시 ‘황우’ 선(삼척~영월선)을 점령하기 위하여 삼척으로 철수하였다.(이상 부도 제23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