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 한 자루를 6년째 쓰고 있다

책상 오른쪽에 만년필이 한 자루 있습니다.

6 년째 같은 만년필입니다. 잉크는 한 가지만 씁니다. 컨버터를 비우고 같은 색의 잉크를 다시 채우는 과정을 6 년 동안 반복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 만년필을 사기 전에 다른 만년필을 두어 자루 거쳤다는 것은 기억합니다. 어디에 갔는지는 기억이 안 납니다.

만년필을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좀 망설여집니다.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두 자루째, 세 자루째를 늘리고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만년필이 더 좋다는 글을 인터넷에서 종종 보지만, 그것을 보고 다른 자루를 사본 적은 없습니다. 다른 색 잉크를 한 병 사다 놓은 적은 있는데, 한 번 채워보고는 원래 색이 더 익숙해서 도로 비웠습니다. 이 정도면 좋아한다기보다 그저 익숙한 쪽에 가깝습니다.

만년필이 쓰기 좋은 도구라고도 말 못합니다.

볼펜이 더 편합니다. 만년필은 일정 각도로 잡지 않으면 잉크가 안 나오고, 가끔 막혀서 휴지로 닦아야 합니다. 합리적으로 보면 볼펜 한 다스를 사두고 한 자루씩 쓰다 버리는 쪽이 훨씬 효율적입니다.

그런데 6 년째 같은 만년필을 쓰고 있습니다.

여기에 깊은 이유를 붙이고 싶은데 안 붙습니다. 만년필이 사고의 속도를 늦춰서 좋은 글을 쓰게 한다는 식의 문장을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는데, 제 경험으로는 그런 일은 안 일어납니다. 만년필을 쥐고 있다고 해서 더 좋은 결정을 하지는 않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도 만년필로 적지는 않았습니다. 만년필은 그냥 책상 오른쪽에 놓여 있고, 글은 키보드로 적고 있습니다. 만년필이 실제로 쓰이는 시간은 일주일에 몇 분이 안 됩니다. 그 몇 분을 위해 6 년을 같은 자리에 두고 있는 셈인데, 이게 비효율인지 사물에 대한 의리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한 자루의 만년필이 6 년을 버틴다는 사실은, 만년필이 잘 만들어졌다는 뜻이라기보다 제가 새 만년필을 안 산다는 뜻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