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독립이란
1987년 8월 15일 독립기념관 개관
1982년 전두환 정권 초기, 일본의 교과서 왜곡 관련 보도가 온 나라 신문과 방송을 분노 일색으로 뒤덮었다. 일본 역사 교과서의 왜곡된 서술과 표현 하나 하나를 분석하며 ‘왜곡’의 정도를 짚는 기사가 줄을 이었고 일제의 만행의 증거와 증언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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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 경찰에 참수된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사진에서 목과 몸이 분리돼 누워 있는 사람들을 보고 진저리를 쳤던 기억 생생하다. 3.1운동 당시 일제의 학살 현장인 제암리 교회 터가 발굴되기 시작했고 스무 분이 넘는 유해가 수습되기도 했다. 제암리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던 할머니가 발굴되는 시신들 앞에서 오열을 터뜨리는 풍경 또한 진하게 뇌리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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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 역사 교과서의 왜곡이 심각하기도 했지만 별안간 이 문제가 온 나라를 뒤흔드는 이슈로 발전했던 것은 다분히 정권적 차원의 공작(?)적 요소도 들어 있었다. 광주항쟁을 짓밟고 정권을 강탈한 전두환으로서는 정통성의 부재와 학살의 원죄를 가리기 위한 이벤트가 필요했고 국민들의 시선을 돌려 버릴 대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대상이 일본이었고 이벤트는 범국민적인 기금 마련을 통한 독립기념관 건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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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응도 컸다. 마치 그로부터 90년 전의 국채보상운동과 15년쯤 뒤의 금모으기 운동처럼 사람들은 그야말로 ‘열화와 같이’ 모금에 동참했다. 승객의 돈을 찾아준 어느 버스 안내양은 승객이 굳이 사례금을 쥐어주자 그를 몽땅 독립기념관 기금에 쾌척했다. 프로야구 경기에서 럭키존으로 홈런을 친 선수는 받은 상금을 내놓았다. 당시 ‘중공’이라 불리던 중국 교포들도 성금을 보내 왔고 어떤 일본인도 ‘왜곡을 사과’한다고 성금을 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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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1년 예산이 10조가 넘지 않던 시절이었다. “신문팔이 소년은 신문 대금을, 강원도의 산골 중학생들은 약초를 캐서 모은 돈을, 독립유공자 유족은 몇 달치 연금을 맡겼다. 8월 31일부터 연말까지 단 넉 달 동안 353억6464만2300원이 모였다. 모금기간이 끝났어도 성금 행렬은 이어졌다. 경제인 성금에다 기념배지 판매이익금과 이자를 합쳐 1986년 5월까지 모두 691억9158만2490원이 모였다. ” (동아일보 2006년 8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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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염원’과 온 국민의 정성으로 독립기념관이 터를 잡고 건물을 올리기 시작한 것은 좋았다. 애초 정권의 의도가 어디 있었든, 해방 37년에 독립투쟁의 역사를 기록하고 보관할 박물관 하나 없다는 것은 지극히 유감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정권의 ‘사심’은 잦아들지 않았다. 원래 완공은 1987년 예정이었다. 이 예정조차 전두환 퇴임 전에 완성을 보겠다는 의도가 드러나거니와 전두환 정권은 과한 욕심을 부렸다. “86년 아시안 게임 전에 독립기념관을 준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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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의 메인 건물이라 할 ‘겨레의 집’에서 사달이 난다. 1986년 8월 15일 날치기 개관을 목표로 초치기 작업이 벌어지던 중, 한 청년이 전선 연결 작업에 착수했다. 도면을 보고 얼키설키 전선을 이어가던 청년 공사장에서 심부름을 하던 한 청년에게 전선 연결 작업을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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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면에 그려진 대로 선을 얼키설키 연결하던 그 청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고 있었다. 380V 선에 110V 선을 연결했던 것이다. 더하여 그는 해당 작업의 면허증도 없는 ‘무자격’ 기술자였다. 그러나 그의 작업을 점검하는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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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일 뒤 준공을 열흘 앞둔 상황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스위치를 올렸을 때 전선에서는 파다닥 불꽃이 튄다. 어어 하는 사이에 천장에 불이 붙었고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소화전을 끌어왔지만 천장까지 닿지도 않는 아기 오줌 줄기 같은 물이 콜록거릴 뿐이었다.
열흘 뒷면 대통령 ‘각하’와 3부요인들과 내외 귀빈을 모시고 거창한 준공식을 거행할 ‘겨레의 집’ 건물의 동판지붕은 홀라당 타 버리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동아일보 기자들은 시속 150킬로미터의 ‘살인적인’ 속도로 고속도로를 내달려 현장으로 향헸는데 한 차량이 170킬로미터의 속도로 자신들을 추월해서 가는 걸 보고 놀랐다고 한다. 그 차에는 이원홍 문공부 장관이 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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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경찰서는 경찰서 거의 모든 인력이 이 사건에 매달렸고 당시 검사가 3명밖에 없었다는 천안지청도 검사들이 기자들 등쌀에 옆문으로 도둑 출입을 할 정도로 골머리를 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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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어이없는 사고였고 현장 시공사인 하청업체나 원청업체나 책임자들이 줄줄이 쇠고랑을 찼다. 언론의 맹폭이 가해지는 가운데 조금 기이한 시비가 있었다. 당시로는 최첨단 장비를 갖추고자 했던 독립기념관 원형극장의 ‘서클비젼’ 자재에 일제(日製)가 쓰였다는 폭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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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이 큰돈을 마련할 필요가 있을 때 기업인들을 청와대에 부르면 ‘재일교포 재벌’들이 반드시 끼었던 시대였고 한국과 일본의 기술력 차이는 컸고 최첨단 장비라면 일제 장비가 끼지 않을 리가 없었지만 ‘독립기념관에 일제가!!!!’ 하는 분노는 삽시간에 펄펄 끓었다. 또 한 번 여론의 융단폭격을 맞은 후 결과는 장비 폐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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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일이라는 독립기념관의 당초 취지에서 벗어났다 해서 온 국민이 분통을 터뜨렸던 원형극장의 일제 영사기는 미제로 바꾸기로 확정했다. 이에 따라 60억원의 추가 부담을 해소하기 위해 15억원 가량의 일제 설비를 팔기로 하고 현재 국내 업체들과 접촉중이다.” (동아일보 1986년 1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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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껏 설치한 장비를 뜯어내고 미제 장비를 들여 놓기로 했으며 그에 60억원이라는 어마어마한 (독립기념관 성금의 약 15%) 돈이 추가로 들어갔는데 15억원을 주고 산 일제 장비를 중고로 팔아서 조금이나마 충당하려 한다는 뜻이다. 아마 처음에 장비를 주문한 사람들도 일제를 사고 싶지는 않았으리라. 하지만 일제가 미제의 25% 수준이라면 미제를 산다는 건 상식 밖의 일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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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알뜰함은 민족 의식 박약함의 상징이 됐고 여론의 치도곤을 맞았다. 그런데 독립기념관에 과연 그 외에 일제는 전혀 쓰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더하여 그러게 쌩돈을 날리고 미제 장비를 갖다 놓고 일제 장비를 중고로 파는 울며 겨자먹기가 과연 ‘극일’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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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에서 일제가 ‘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해’ 박았다는 쇠말뚝들이 전시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때는 그에 이의를 가질 깜냥이 없어 일본놈들 참 지독하다고 생각하고 넘어갔는데 돌이켜보면 낯이 화끈거릴 정도로 무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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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이여송이 조선에 인물 나지 마라고 ‘명산대혈’에 말뚝을 받았다는 전설의 고향이 ‘일본’을 악한으로 만드는 ‘실화’로 둔갑하고 그 ‘증거’로 누가 무슨 용도로 박았는지도 불분명한 것들을 ‘역사적 증거’로 ‘독립기념관’에 전시했던 것은 얼마나 민망한 일이었으며, 독립기념관에 혹여 방문했을 일본인들은 어떻게 이해했을까. “일본 관리가 조선의 풍수를 믿고 그 혈맥을 잘랐단 말인가요? 아..... 소데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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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8월 15일 개관한 독립기념관의 과거를 잠시 돌이켜 보았다. ‘독립’의 핵심은 일본에 반대하거나 일본을 이기는 일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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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이란 자신들의 부족함을 가리기 위해 일본이라는 상처를 소환하여 사람들의 심리적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던 전두환의 야비함 따위를 극복하는 일이고, 대충대충 괜찮아 정신으로 무자격 설비 기술자에게 엄청난 일을 맡기고 제대로 점검도 하지 않았던 엉성함으로부터도 벗어나는 일일 것이다. ‘독립기념관에 일제 장비를!“ 이라는 좀 엉뚱한 분노로 쌩돈을 날리는 만용을 피하고 택도 없는 전설의 고향을 역사적 증거의 무대에 올리며 쇠말뚝을 들고 흔드는 우매함을 지양해 가는 작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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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은 스스로 자존감을 완성해 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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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에 이따금 일삼아 들른다. 독립 두 글자를 위해 자신은 물론 자신의 가족들의 삶까지 죄다 갈아넣으며 몸을 던져 싸웠던 분들의 흔적 앞에서는 마음이 더워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으며, 일본이 패망 직전까지도 ‘전쟁 전 국경 유지’ 즉 식민지 유지를 항복 조건으로 내세웠던 만큼, 독립운동가들의 투쟁이 없었다면 우리 운명이 어떻게 됐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들에게 다시금 경의를 표한다.


독립은 스스로의 자존감을 완성해 가는 일이다....오...진정 그러네요.
네,,,,아직 우리는 자존감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