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선생 암살자 안두희를 응징한 정의의 기사 박기서
끝까지 분단을 반대하던 민족주의계열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 선생은 육군 포병 소위이자 주한 미군 방첩대(CIC) 요원이었던 안두희에게 살해 당합니다. (1949년 6월26일 서울 경교장)
안두희는 그 후 어찌되었을까요?
당시 극형에 처해질 줄 알았던 안두희가 진상조사도 유야무야된 채 군에 6-25 터진 이틀 후 그 와중에 복귀,소령 승진 예편하여 잘~ 그것도 집에 ‘百歲淸福(백세청복)’-청아하고 한가롭게 복을 누리며 살고 있었다는 게 역사적으로 적시된 것도 바로 박시서씨 재판부를 통해서였습니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밀려 내려오는 순간에도 누군가 이 놈을 승진시키고ㅠㅠ
박기서씨 재판부는 안두희에 대해서도 판결문에 적시했다. “안두희는 김구 선생을 암살하고도 1949년 8월 극형에 처해질 것이라는 일반적인 예상과 달리 종신형을 선고받고 석 달 만에 징역 15년으로 감형되었다. 1950년 6월27일 잔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다시 군에 복귀하여 소령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예편하여 군납회사를 운영하는 등 특별대우를 받았다. 당시 특정 정치 세력의 비호를 받는다는 의혹이 있었고, 그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혼란스러운 시대 상황 속에 진상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다. 안두희는 단독 범행이라 주장하며 비호 세력에 대해서는 함구로 일관해왔기 때문에 김구 암살 범행에 대한 역사적인 진실이 밝혀지지 않는 등 안두희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분노가 상당한 것도 사실이다.”
시사IN 에 그 안두희를 죽인 박기서씨(71)의 인터뷰가 실렸네요 이런 분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제가 한 때 살알던 부천시 원미구의 한 오래된 아파트에 .....
● 박기서씨 1996년 10월23일
박씨는 운전대 대신 ‘정의봉’을 잡았다. 그는 이날 정의봉을 들고 안두희를 찾아갔다. 박씨는 “민족정기를 세우기 위해” 안두희를 정의봉으로 살해했다. 박씨는 사건 현장에 정의봉과 주소를 남겨두고 나와서 곧바로 자수했다.
살인죄로 구속된 그를 위해 사회 각계 인사 9000명이 ‘박기서 석방대책위원회’를 꾸렸다.
대법원은 “범행의 동기나 목적의 주관적 정당성을 인정하나, 법질서차원에서 징역 3년형.
1년6개월여 복역하다가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 3·1절 특사로 풀려났다.
- -기사내용 발췌합니다.-
내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박기서씨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인터뷰를 사양하는 박씨를 설득해 경기도 부천시 자택으로 찾아갔다. 집으로 기자를 들인 것은 처음이라는 박씨는 선반에서 물건 하나를 꺼냈다. 안두희 처단 당시 사용한 정의봉이었다. ‘見利思義 見危授命(견리사의 견위수명: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치라)’이라는 한자가 적힌 한지로 감싸 보관하고 있었다.
“스물두 살 때부터 좌우명으로 삼아온 안중근 의사의 붓글씨다. 남산 안중근 의사 기념관의 돌에 새겨진 바로 그 글씨다.” 정의봉에는 안두희의 혈흔이 남아 있었다. 박씨는 사건 현장에 정의봉과 주소를 남겨두고 나왔다. “정의봉은 검찰이 법원에 제출한 증거 1호였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임시정부기념관이 건립되면 전시할 테니 기증해달라고 해서 보관 중이다.”
1948년 전북 정읍 ... 주경야독으로 한문을 깨쳤다. 배움의 갈증을 독서로 풀었다. 그는 20대에 안중근 의사의 삶에 빠져들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그는 같은 신자인 도마(토마스) 안중근 의사의 생애를 들여다보고 존경하는 인물로 마음에 새겼다. 30대 때는 운전기사로 생활하면서 틈틈이 <백범일지>를 읽었다. 김구 선생에 대한 존경심만큼 박씨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실망감도 커져갔다. 암살범 안두희가 이승만 정권 등 역대 정부의 비호 아래 생존해 있는 것을 보고 분노했다.
“나는 정말 보잘것없는 소시민이었다. 나보다 많이 배우고 공직에 있는 사람들이 친일파가 득세하는 나라를 만든 책임이 크다고 생각했다. 그런 현실에 항상 실망하다가 내 손으로 직접 안두희를 처단해 역사적 책임을 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때부터 박씨는 역사와 정의와 관련한 책을 닥치는 대로 탐독했다. 또 1987년 안두희를 응징하려다 처벌받은 권중희씨를 만나기도 했다. 권씨가 쓴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라는 책을 받아 읽었다. 책을 통해 안두희가 인천시 신흥동의 한 아파트에서 부인과 함께 거주한다는 사실도 파악했다.
박씨는 거실에 백범 선생이 쓴 ‘양심건국’ 등 여러 붓글씨를 걸어두고 마음을 다잡았다. 실행하기까지 고민을 거듭했다. 평생 책임 있는 가장의 삶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그로서는 남은 가족의 생계 걱정이 가장 앞섰다. 최소 5년간 감옥살이를 할 것으로 보았다. 그동안 가족이 굶지 않도록 저축을 했다. 화물차를 팔아 자녀들의 학비도 마련해두었다. 실행을 결심한 마지막 순간에는 당시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인 아들이 마음에 걸렸다. “아들이 받을 충격이 가장 걱정됐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안두희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촉박함에 갈팡질팡했다. 안중근 의사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봤다. 대의 앞에 가족에게 닥칠 시련은 조그만 것이니 내가 감수해야지 않을까, 그렇게 마음먹으니 편해졌다.” 안두희를 찾아갈 날짜를 잡고 어머니께 큰절을 올렸다.
실행 전날까지 박씨는 생업에 몰두했다. 시내버스 막차를 운행한 뒤 차고에 넣고 새벽에 택시를 타고 안두희가 사는 아파트를 찾아갔다....1996년 10월23일 그날따라 안에서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오전 11시가 넘어설 무렵 안두희 부인이 문을 여는 기척이 들렸다. 박씨는 먼저 부인을 작은방에 가뒀다.
박기서씨는 ‘정의봉’을 들고 안두희가 누워 있는 안방으로 향했다. 거실 벽에 걸린 ‘百歲淸福(백세청복)’이라고 쓰인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100살까지 청아하고 한가롭게 복을 누리며 산다는 뜻이었다. 순간 안두희가 쏜 흉탄에 쓰러진 백범 선생이 떠오르며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자 누워 있던 안두희가 박씨를 쏘아보더니 일어서려 했다. “중풍을 앓고 있었다지만 나를 제압하려고 일어서는데 나보다 키가 훨씬 크고 기골이 장대했다. 저 큰 손으로 김구 선생님을 쐈구나 생각이 스치자 안두희의 팔을 정의봉으로 힘껏 내리쳤다. 거구가 그대로 쓰러지더라.”
박씨는 안두희 곁에 정의봉과 연락처를 남겨두고 안방을 나섰다. 거실에서 냉장고 문을 열고 정신없이 냉수를 들이키는 박씨 앞에 안두희 부인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벌벌 떨더니 남편만 응징하고 갈 사람이란 걸 눈치챘는지 ‘저도 물 한잔 주세요’라고 하더라. 물을 한 대접 따라 같이 마신 뒤 머리가 백짓장이 된 상태에서 부천성당으로 달려갔다.”
신부를 만난 박씨는 눈물을 흘리며 고해성사를 했다. 신부는 박씨에게 토스트와 우유를 먹인 뒤 경찰에 자수하는 전화를 걸어주었다. “형사들을 데리고 성당으로 찾아온 당시 형사반장은 ‘박기서씨가 맞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그는 형사들이 수갑 채우려는 것도 제지하고 그냥 연행하라고 했다.” 박씨가 경찰차를 타고 경찰서에 도착하자 기자들이 포토라인을 만들어 대기하고 있었다.
검찰은 1심에서 징역 7년을 구형했다. 인천지법은 “피고인은 일반적인 의미의 흉악범과는 구별된다”라며 살인죄 최소 형량인 징역 5년형을 선고했다.
2심에서 다시 징역 3년으로 감형된 박씨는 1997년 11월 대법원에서 최종 징역 3년형이 확정됐다. 이듬해 3·1절 특사로 풀려났다. “1년6개월여 감옥 생활을 하는 동안 정말 많은 국민이 위로와 격려 편지를 보내주셨다. 당시 리영희 한양대 교수도 격려하는 엽서를 보내주셨다. 그 인연으로 출소 후 생전에 매년 명절 때 찾아뵈었다.”
박씨는 출소한 뒤 운전기사로 돌아갔다. “사람들이 나를 공인처럼 대하니까 옛날보다 언행이 매우 조심스러웠다. 여기저기서 초청 강연 요청도 많이 왔지만 운전 쉬는 날 아니면 절대 안 갔다.” 그가 가입한 사회단체는 딱 하나, 민족문제연구소다.
시사IN 기사에는 박씨가 그 후
박정희 유신 독재 반대운동을 주도하다 의문의 죽음을 맞은 장준하 선생의 사망 당시 목격자인 중앙정보부 협력자 김씨를 자주 찾아가서 ‘역사적 진실을 밝히라’고 설득하는 등 민족문제 정의구현을 위해 적극적 노력을 아끼지 않으면 살아온 삶도 소개합니다. ^^
bY: @raah 입니다.
보팅소녀 이미지는@cheongpyeongyull 님이 그려주신 작품입니다.감사드립니다
여러가지로 이유로 외면 받았던 근대사가 많이 수면 위로 올라왔으면 좋겠네요
금방 미스터선샤인을 보고 나서 인지 더 눈에 들어오는 포스팅이네요.
잊지 말것을 잊지 말고 기억 할 것은 기억하고 찾아내야 겠네요
저도 금방 봤는에 ㅎㅎㅎ 제법 명작입니다. 선샤인..^^
우리가 부끄러워 해야할 일은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사실보다
불의에 눈을 감고 묵인하는 사실입니다.
요즘보면 일반 국민보다 친일파 후손들이 잘사는 경우가 많은데...
다 이유가 있겠죠...
다 숨겨놓은 재산으로 후대까지 잘사는듯...
그 죄를 언젠가 물어야할꺼라 생각합니다..
그 죄를 다 묻지는 못할겁니다. ㅠㅠ 얼마나 물을수 있는가가 그 나라의 역사 발전을 결정하겠죠
2차 대전이후에 프랑스는 제법 잘 했고 우리는 많이 묻어버렸죠ㅠㅠ
저도 알고있는 내용이네요^^
에효.. 상식이 통하는 나라가 되는 길은 멀고도 험하네요;;
와..... 이런 사실이 있었군요.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재미있고 흥미롭게 훅 다 읽었습니다. 특히 박기서 님께서 거사를 행하기 전의 심경이나 일상 생활, 가족의 생계를 위해 저축을 했다는 등의 묘사가 너무 마음에 와 닿는 것 같습니다. 생전에 한번 뵈면 좋겠네요.
4회차 보팅남깁니다. 편안한 시간되세요:]
하필 스팀잇 문제가 생길때 당첨되셔서ㅎㅎ
앞으로 포스팅하시면 그동안 못한거까지 보팅 진행할게요:]
그러게요 ㅎㅎㅎ 테이스팀에도 나름 회심의 찻집을 올렸는데
며칠있다 들어와 보니 페이아웃되어 있네요 ㅎㅎ
우리나라는 형량이 너무 약하다는 생각을 매번하게 되는군요 ㅎㅎ
그 사건 후의 이야기는 몰랐네요.
크게 보도 된 기억이 납니다.
우리나라는 저런 분들이 계셔서 정통성이 유지된다고 생각하네요.
잘 읽고 갑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정의를 스스로 행동에 옮기신 용기있는 분이시군요.
지금까지도 요직에서 세를 누리는 친일파 후손들을 그냥 보기만 해야되는건가요.
그러면 안되는 줄 알면서도 요즘은 이런 비슷한 뉴스를 외면하곤 하네요.
반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