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아름다운

in #kr2 years ago (edited)

1 어떻게 지내냐고 묻는 말에 잘 지낸다고 답했다. 평범한 대답을 해버렸지만 답할 때까지도 고민이 많았는데, 잘 지낸다고 말한 후로도 계속 어딘가 찜찜했다. 오늘은 다시 생각해보니 잘 지내지 못하는 것도 같아로 시작하는 조금 긴 카톡을 보내려다 말았다. '어떻게 지내냐'는 질문이 기대하는 의미가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럴 땐 되물으면 되지만, 괜히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다. 오늘은 대답에 혼란을 겪은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다 내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나조차도 잘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2 3월 말에는 음악 관련 일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천피의 축가였고 하나는 피아노 연주곡을 만드는 일이었다. 전부 아주 가까운 지인의 일이라 큰 부담은 없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남들 앞에서 연주하는 것, 또 나로부터 시작되는 창작물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에 익숙한 압박을 느꼈다. 아직 이르다고 느껴 모두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결국 현실적인 이유로 전부 하게 되었다.

3 그 일들을 하면서 아주 조금이지만 발전함을 느꼈다(의뢰인 모두 내 의견을 최우선으로 존중해주었기 때문에 일이라고 하기엔 머쓱하지만). 음악적으로가 아니라, 일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랬다. 마감일 코앞에서야 작업을 시작하던 이전과는 달리 내 나름대로 주어진 기간 꾸준히 작업을 준비했다. 이런 적은 처음이다. 결과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은 같으나 아 조금만 일찍 시작할 걸하는 익숙한 후회는 없었다. 오히려 할 만큼 했다라는 묘한 후련함을 느낄 수 있었다.

4 월이 됐다. 원래 월초에는 방황하는 편이지만, 이번 달은 특히 더 심한 것 같다. 재미로 봤지만 너무 잘 맞아 무섭기까지 하던 한 인터넷 사주풀이에서는 4월은 처음엔 힘들지만 나중엔 잘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마저 맞는 것 같아 묘하게 믿음이 간다. 사주에서 말하는 나중이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편하게 기다려야 할 것 같다.

5 해오던 일이 전부 중단됐다. 집중도 안 되고 하고 싶지도 않다. 줄곧 해오던 운동도 많이 시들해졌다. 아직 열의는 가지고 있지만, 이상할 정도로 몸의 피로가 풀리지 않는다. 오래 쉬었는데도 회복이 더뎌 요즘은 스트레칭을 위주로만 가볍게 움직인다. 다시 살이 찌지 않을까, 어렵게 만든 근육이 사라지지 않을까 불안하지만 조급해하지 않기로 한다.

6 방황하는 와중에도 4월 들어 해 질 무렵마다 광화문 교보문고를 가고 있다. 이렇게나 다양한 책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다. 아직도 넓은 매장의 구조를 전부 익히지 못했지만, 매일 다르게 헤매면서 이곳이 아니면 보지 못했을 책들을 하나둘 살핀다. 그러다 오늘은 우연히 이 책에 눈이 갔다.

제프 다이어 - 그러나 아름다운

7 작게 놓인 선반에는 새로 나온 제프 다이어의 책 세 권을 소개하고 있었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놓인 책들 중에서 그러나 아름다운이라는 책이 눈에 띄었는데, 그 이유는 간단했다. 번역가의 이름이 황덕호였기 때문이다. 황덕호 씨의 책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이분이 유명한 재즈 애호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흔한 이름도 아니고, 재즈 애호가인 그 분이 왜 번역을 했을까 궁금해졌다. 책을 슬쩍 보니 재즈에 관한 에세이였다. 뒤에는 키스 자렛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추천 글이 있었다.

8 한참을 서성였다. 급하게 근처 도서관에 이 책이 있는지 검색해봤지만 이미 대출 중이었다. 예약해두고 책이 반납되면 그때 빌려올까 생각했다. 책을 사면 짐이 될 것 같다는 생각과 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망설여졌다(돈도 돈이고). 한순간의 충동이겠지, 라고 달래며 서점을 나가려 했다. 더 매장을 둘러볼 기분이 아니었다. 출구로 향하는 동안 잠깐 읽은 서문이 맴돌았다. 반짝이는 글이었다.

9 출구 바로 앞에 그 책이 다시, 더 화려하게 놓여있었다. 그 옆에는 10% 할인이라는 말도 적혀있었다. 결국 몇 달 만에 책을 샀다.

10 책을 들고 문을 나서자 책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But Beautiful. 아, 이건 그러나 아름다운이 아니구나. 이 제목은 재즈 스탠다드 넘버인 But Beautiful이다. 이 제목 그대로 나왔다면 어땠을까. 재즈 팬들은 좋아하겠지만, 아닌 사람들은 잘 모를 것 같기도 하고...

11 계단을 오르면서 But Beautiful 멜로디를 생각했다. 다른 스탠다드 넘버인 Beautiful Love의 경쾌한 멜로디만 떠오르고 But Beautiful의 멜로디는 떠오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스탄 겟츠와 빌 에반스가 함께한 But Beautiful을 들었다.

(11-1) 요즘은 제이콥 콜리어 버전의 Fix You를 연습하고 있다. 그러는 김에 원곡인 콜드플레이의 Fix You도 함께 돌아보는 중이다. 콜드플레이의 앨범은 귀가 문드러지도록 많이 들었지만, 새삼 이 곡이 이렇게 좋았나 하고 들을 때마다, 연주할 때마다, 부를 때마다 감탄한다.

12 제프 다이어의 책을 오래오래 읽고 싶다. 밑줄을 긋고 내 생각을 적고, 모르는 내용을 찾아가면서 아주 오래. Fix You를 제대로 알고 싶다. 어쩌면 남들보다 느린 나에게는 한 달에 한 권, 한 달에 한 곡이 적당한 양은 아닐까. 오늘을 계기로 But Beautiful의 멜로디는 이제 좀 외우는 게 어떨까 생각했다. 이제는 늦어도 좋으니 제대로 알고 싶다. 모르는지도 모르는 채로 지나간 것들이 너무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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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상상은 항상 도를 지나쳐 레미파 가 미파솔인 것도 모르고 재즈니 블루스 노트니 펜타토닉 스케일이니 대위법이니 하는 것도 잘 모르고, but beautiful이 뭔지도 모르는데, 그런 걸 아는 것은 전문적이고 힘들고 가치있는 것이라는 것은 알겠어.

힘든 일을 하는 것이 힘든 것은 당연하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힘든 일을 계속 해가기 위해 벨런스를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나 또한 언제나 불안하고 조잡하게 벨런스를 맞추며 전문성을 확보해나가고 있고 말이야.

최종적으로 전문성을 확보해 나가는 데 성공한다면, 파행적으로 치부되는 행동들과 궤멸적인 진척 속도들은 정당화된다고 생각해. 덜 파국적이게 진전시키면 더욱 좋겠지.

이제 조금씩 힘든 일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시작이 엄두가 안 나서 자꾸 힘을 기른다는 핑계를 들게 돼. 어디까지가 핑계이고 어디까지가 맞는 말인지 잘 모르겠어.

그런데! 그것들을 모르는 건 당연하다 치더라도 블루스 노트나 펜타토닉 스케일 같은 이름은 어떻게 아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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