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 3개국 (프랑스, 스위스, 이태리)을 다녀오다!!! – 2편
2018년1월 28일 ~ 2월5일
<1일차>
파리의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다. 현지 가이드의 말이 조금 전까지 비가 왔었고, 요즘 겨울철이 우기철이라 파리에서 햇빛을 보는 날이 거의 손에 꼽는다고 했다. 더군다나 최근에는 비가 많이 와서 세느강이 범람할 지경에 이르러 세느강 유람선 옵션도 취소해야 한다고 했다. 강에 유람선을 아예 띄울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왠지 이번 여행이 순탄치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며 제발 무사히 여행이 끝나길 빌었다.
이번 여행에 참가한 우리 일행은 총32명이며 인솔자 1명에 현지 가이드1명이 동행했다.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우리는 45인승 버스를 타고 드디어 말로만 듣던 에펠탑이 보이는 파리를 달리기 시작했다. 가이드는 파리 멋쟁이처럼 아주 간지가 났다. 약간 기른 콧털에 맵시 있는 옷차림은 파리에서 오래 생활한 것 처럼 보였다.
능숙하고 유창하게 파리의 역사를 설명하는 동안 우리는 어느새 제2 개선문에 도착했다.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로마 티투스 황제의 개선문을 그대로 본떠 만들었으나, 만들고 난 뒤 그 규모가 작아서 다시 만든 것이 샹젤리제 거리의 끝자락에 있는 바로 제2개선문이었다. 버스에서 내리자 우리나라와 같이 아주 추운 날씨는 아닌 초겨울 날씨의 쌀쌀함과 바람이 약간 불고 있었다. 높이 50M에 폭 45M의 아주 웅장한 건물은 여기가 바로 파리라는 것을 강하게 알려 주는 거 같았다. 우리 가족은 지하도를 이용해서 개선문까지 가서 기념촬영을 하였다.
개선문을 뒤로하고 우리는 샹들리제 거리를 산보했다. 가이드가 준 시간이 많지 않으므로 멀리까지는 갈 수는 없었고 거리 일부분만을 걸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은 여기가 파리라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지 연신 감탄하고 있었다.
파리에서의 첫 점심식사는 한인이 운영하는 식당의 닭볶음 매운탕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국물 없는 기내식으로 식사했기에 얼큰한 국물이 생각 났는데 칼칼한 매운탕 국물이 속으로 들어가자 속이 후련해졌다. 식당은 2층이었으나 층고가 매우 낮았고, 식당 규모에 비해서 화장실의 변기는 하나 밖에 없어서 우리는 긴 줄을 서야 했다. 가이드는 앞으로 우리가 만나게 될 건물들이 변기 숫자는 적고 내부는 협소할 거라고 귀띔해 주었다. 그것은 우리나라에서는 경험하지 못함 힘든 유럽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루브르 박물관에 도착했다.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히며 기원전 700년경의 고대 유물부터 1850년대 작품에 이르기까지 225개방에 40여만점의 세계 최대의 예술품을 소장하고 있었다. 외관에서부터 풍겨지는 석조건물의 뭐라 말할 수 없는 중압감에는 역사의 짙은 향기가 배어 나왔다. 계속되는 비로 인하여 세느강이 범람해서 더 많이 비가 온다면 강변에 위치한 루브르 박물관도 안전하지 못하다고 가이드는 말했다. 십 수년 전에도 세느강이 범람해서 지하층에 보관된 유적들이 침수 당하는 바람에 지금은 물에 젖으면 피해가 많은 것은 모두 지상으로 옮겨 놓았다는 말도 함께 들려 주었다.
루브르 박물관은 옛 궁전을 박물관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지하층의 천정은 유리로 피라미드를 만들어 놓았다. 이 천정도 높이 21m, 창유리 793개로 1989년 설치할 때는 에펠탑과 마찬가지로 루브르 박물관과는 어울리지 않다는 반대의 여론이 많았으나 지금은 그것 또한 신구가 조화된 세련된 건물로 루브르를 상징하는 일부분이 되었다.
우리는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지하1층에서부터 시작하여 빠른 코스로 중요한 작품들을 보며 지나가야 했다. 왜냐하면 박물관의 작품수가 너무 많고 계속 밀려드는 인파에 천천히 음미한다면 고작 3시간 남짓한 시간으로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동안 책과 각종 매체로만 접하던 미술품들을 실제로 내 눈으로 직접 보는 경이로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스핑크스, 비너스상, 모나리자 등 우리가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작품들이 방마다 전시되었고 우리는 감탄과 함께 연신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기에 바빴다.
루브르를 아쉬운 채 뒤로하고 샹들리제 거리를 지나서 콩코드 광장을 경유하여 차는 달렸다. 우리는 흙탕물로 잔뜩 불어난 세느강을 보면서 파리의 상징인 에펠탑으르 갔다. 에펠탑은 1889년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된 파리 만국박람회때 철의 마술사로 불리는 구스타브 에펠의 설계로 건설되었다. 탑을 건설하는데 2년이 채 걸리지도 않았다고 하는데 그 당시에는 용접 기술이 없었으므로 일일이 볼트와 너트로 결합을 했다고 하니 그 규모와 일 양이 어마어마 했으리라 상상이 된다. 우리는 엘리베이트를 타고 2층으로 갔다.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멀리 세느강을 따라 사요궁전을 비롯해서 형형색색의 많은 건물들이 보였고, 주위에는 산이 보이지 않는 평지로 엄청나게 광활했다.
하지만 에펠탑에서의 전망이 너무나도 거대해서 정신을 빼앗겼을까? 일행을 따라 퇴장하는 순간 마침 길에서 에펠탑을 모형을 파는 장사꾼들 땜에 일행을 놓치고 말았다. 순간 에펠탑 광장이 그렇게 넓게 보일 수가 없었다.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 이곳에서 … 하지만 다행히 인솔자로부터 전화가 와서 일행을 찾을 수 있었다.
저녁에는 프랑스의 특산물인 달팽이 요리인 에스까르고와 바게트빵 그리고 스테이크를 먹었다. 달팽이는 맛은 있었으나 크기가 매우 작았고 바게트빵은 버터가 발라져 부드러웠다. 양이 적어 아쉬웠다.
원래 오늘 저녁 일정은 세느강에서 유람선을 타고 관광하는 것이었으나, 강의 범람 위기로 모든 배들은 묶여 있었고 운항이 금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여행사에서는 버스로 세느강을 따라 유람하는 코스를 권했고 우리는 울며 겨자 먹기로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7시가 되자 에펠탑은 몇 분간 눈부신 조명쇼를 했고 우리는 가장 잘 보이는 포인트에서 열심히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아까 사려다 못산 에펠탑 모형과 열쇠고리도 샀다.
다음으로 간 곳은 파리에서 가장 야경이 아름다운 알렉산드로3세 다리였다. 이 다리는 프랑스와 러시아의 동맹을 기념하기 위해 1886년 첫돌을 놓은 뒤 1900년 만국박람회를 기념하여 세워졌다고 하는데 에펠탑을 본 뒤였을까? 큰 감흥이 없었다.
잠깐의 시간을 뒤로 하고 오늘의 마지막 코스인 몽마르뜨 언덕으로 갔다. 예정에 없던 코스로 경사진 언덕길을 오르기 위해 설계된 전철인 후니쿨라를 타고 올라 가자 파리가 한눈에 보였다. 어둠이 깔린 파리는 휘황한 불빛에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몽마르뜨 언덕에는 “사크레 쾨르” 성당이 밤 불빛을 눈부시게 받고 우뚝 서 있었다. 그 성당은 1870년 보불 전쟁의 패배로 나폴레옹3세가 몰락하고 프로이센에 알사스 로렌의 일부를 빼앗기는 치욕을 겪은 파리 시민의 상처를 위로하기 위해 교황청에 세운 것이 아니라, 정부 주도로 40년간의 공사 끝에 완공된 것이라 했다. 가이드가 자유시간을 주었으나 일행들은 어제부터 시작한 긴 여행의 고단함 때문인지 빨리 숙소에 들어가고 싶어했다. 그래서 우리는 서둘러 차를 타고 숙소로 향했다.
호텔은 파리 인근에 조용한 동네에 있었는데, 방안은 좁고 화장실도 좁아서 샤워하기가 불편했다. 하지만 파리 도착 후 인솔자는 우리에게 유럽에서의 여행은 동남아 처럼 숙소와 식사에서 좋지 못할 것이라고 했고, 좀 허접 하더라도 그러려니 여겨 달라고 몇 번 얘길 했다. 물론 우리도 여행상품의 수준을 알고 있었고 여행 오기 전 이 여행에 대한 후기도 면밀히 읽어 보았기에 숙소와 음식에 대한 욕심은 버렸으나 막상 숙소를 접하자 적이 당황했다. 하지만 어쩌랴? 인솔자 말 마따나 그러려니 해야지 어떻 하겠는가. 다음날은 아침 6시에 기상을 해야 했으므로 아들과 나는 빨리 씻고 파리에서의 첫날밤을 맞이했다.
<2일차>
파리에서의 첫 밤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다음날의 기대 때문이었을까? 나는 새벽녘 몇 번의 잠을 설치고 간신히 6시에 기상했다. 식당에서는 간단히 빵과 우유, 주스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나쁘진 않았으나 아쉬운 점은 따뜻한 스프 같은 요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럴 때 마다 그러려니 생각을 하고 이것도 감사한 마음으로 아침 식사를 했다. 일행들의 표정에도 충분한 숙면이 이루어 지지 못한 것이 보였고, 우리는 조용히 아침 식사를 했다.
오늘 여행코스는 베르사이유 궁전이었다.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23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베르사이유 궁전은 유럽에서 최대, 최고로 손꼽히는 궁전으로 루이14세가 이곳으로 왕정을 옮긴 후 부터 프랑스 대혁명으로 루이16세가 떠날 때 까지 프랑스의 정치, 문화, 예술의 중심지였다. 현재의 면적은 과거의 규모에서 1/10로 줄어든 것이라고 하니 과히 그 규모에 대해서는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게 큰 것이었다. 그렇게 큰 이유는 각 영주들을 볼모로 잡고 있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일정의 부지를 제공해야 했으니 그럴만도 했으리라 생각된다.
약 30분간을 달려서 이른 아침에 도착하니 관람객이 적었다. 붐비는 시기에는 입장하는 데만 1~2 간이 소요 된다고 한다. 매표소에서 우리는 한국어가 지원되는 전용 수신기를 지급받고 각 방마다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물론 방 전체와 정원까지 다 관람하기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아서 가이드가 주어진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했다. 과거 그토록 화려했던 베르사이유를 생생하게 본다는 것에 우리는 모두 흥분되었고, 벽과 천정에 설치된 작품 하나 하나, 그리고 가구 등은 충분히 화려하고 방의 규모 또한 웅장하여 유명무실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궁전 뒷 정원은 나무들의 울창함이 없어 조금은 황량하게 느껴졌으나, 그 규모에 압도 당했다. 잘 정리된 관목의 배치와 끝없이 펼쳐진 영토를 생각하면 과거 프랑스 왕조의 위세가 참으로 대단했겠구나 느껴 졌다.
오후에는 샹들리제 거리에서 쇼핑 시간이 주어 졌는데, 마침 쁘렝땅 백화점을 비롯해서 세일기간 이어서 일행들은 마치 굶주린 하이에나 처럼 먹이를 찾아 민첩하게 움직였다. 쇼핑에 대해서 나와 아내는 가끔 충돌을 했는데 그것은 여행 자체가 목적인 나와 쇼핑도 여행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는 아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내는 지나가는 말로 나중에 나 없이 혼자 여행이라도 와야 겠다고 했다.
일행들의 두 손이 조금은 묵직해 질 즈음 우리는 숙소가 있는 뮬루즈를 가기 위해서 파리역으로 갔다. 파리 가이드와의 이별을 뒤로하고 4시 TGV에 몸을 실었다. 모두들 가방이 커서 머리 위 선반에 옮기기에 힘이 들었으나, 겨울에도 반팔을 입고 다니는 튼튼이 총각 정용이 때문에 우리들의 수고는 덜 수 있었다. 기차가 파리를 빠르게 벗어나자 이윽고 목초지가 보이는 교외 풍경이 들어왔다. 빼곡하게 건물이 많던 파리 시가지와 다른 풍경이 되자 아내는 연신 감탄을 하며 핸드폰의 셔터를 눌러 대었다.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조용히 핸드폰에 저장된 노래를 들으며 빠르게 지나치는 풍경에 눈을 맡겼다.
4시간 가량을 종착지인 벨포트로 가는 것이 우리의 일정 이었으나, 종착지 근처에서 기차를 갈아타게 되었다. 정확한 이유도 모른 체 우리는 무거운 짐을 내리고 다시 올리는 수고를 했지만 그것 또한 그러려니 하면서 오늘 묵을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은 어제 보다는 좀 더 깨끗하고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내일을 위해서 오늘도 하루를 마감하며 취침에 들어갔다.
< 3편에서 계속 >
제가 가기전까지 루브르 박물관이 무사해야 할텐데요..
이젠 우기철이 아니라 괜찮을 겁니다~
@홍보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