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철과 나(4) - 70년대에 바침
신해철과 나(4) - 70년대에 바침
1. 대학교에 가고 다른 새롭고 신선한 음악들, 좀 더 있어 보이는 음악들을 듣게 되면서, 자연히 신해철의 음악과는 거리가 생겼다. 물론 비슷한 시기부터 신해철의 음악 활동이 조금 뜸해졌기도 하고, 또 2002년 대학교 새내기이던 내가 음악 외 다른 것에도 많은 관심이 생긴 시기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컨대 연애(하지는 못했지만), 술자리, 배낭여행, 2002 월드컵, 무엇보다 선거, 대선이 있었기 때문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EdMWZM0cf1g
(신해철은 이 '대~한민국' 음성의 저작권자이기도 하다...)
2. 2002 월드컵에서 믿어지지 않는 결과를 보고, 이스트팩 가방에 태극기 딱지를 붙였던 아이들은 굉장한 자신감과 희망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마스게임을 했던 4강 전에서 탈락했다는 점이 의미심장한 것도 같지만, 어쩄든 원하고 노력한다면, 그 무엇이건 바뀔 것 같았다. 세상이, 어떤 의미에서는 단순해 보였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꿈처럼, 한 정치인이 나타났다.
3. 그 정치인을 지지했던, 그와 함께 호흡했던, 그를 통해 꿈꾸었던 시기를 나는 감히 ‘내 인생의 봄’이라 칭하곤 한다. 그 모든 과정이 봄날의 꽃길처럼 아름답고 희망찼기 때문이다. 거짓말 같던 월드컵의 열기는 자연스럽게 거리에 나서 시위의 열기로 이어졌고, 개혁국민정당과 노사모의 열기로 이어졌다. 뉴스 하나에 울고 웃었고 분통을 터뜨렸던 것, 길거리에 서서 노래를 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던 것, 밤을 세워 주변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설득하고 토론했던 것, 전날 밤의 충격적인 사건과 다음 날의 믿어지지 않는 승리. 그 순간들은 지금까지도 조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때는, 그를 당선시킨다는 목적 하나만 달성하면, 세상이 모두 한 순간에, 바뀔 것이라 생각했다.
4. 어쩐지 그 순간에도 늘 신해철이 있었다. 신해철의 음악에서는 조금 멀어졌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늘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곳 근처에 와 있었다. 그는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을 위해 찬조 연설을 하고, 100분 토론에 나와서 이야기를 했고, 길거리 시위에서 노래를 했다(새삼 라이브를 못한다고 생각했다).
5. 대통령 선거가 끝났지만, 세상은 별로 바뀌지 않았다. 탄핵 국면을 거쳤지만, 역시나 세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쉽게, 빠르게 바뀌지 않았다. 끝없는 이슈들이 등장했는데, 언젠가부터 정치에 관심을 덜 두게 되었다. 관심이 적다 보니 대통령을 욕하는 이야기를 들어도 아, 그런가보다 이렇게 생각했고, 때로는 함께 욕을 하기도 했다. 그 동안 신해철은 드라마에 출연하기도 하고, 덕후의 모습을 강조하기도 하고, 100분 토론에 나오기도 하면서 왠지 더 유명인이 된 것 같았는데, 반가우면서도 어딘가 부끄럽기도 했다. 우리 아빠가, 혹은 삼촌이 TV에 나온 것 같은 느낌이라면 비슷할까.
6.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군대를 다녀오고, 복학생이 되고, 새로운 사람과 생각을 하고, 아르바이트에도 바쁘던 2009년이었다. 신해철은 그 해 학원 광고를 찍었다가 큰 논란을 겪기도 했는데, 광고도 찍을 수 있지 뭐 그런 걸 가지고 욕을 하나, 라 생각했지만 그의 해명 역시 구차해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시간이 또 흐른 어느 날, 흐리고 비가 오락가락했던 그런 날, 한 친구에게 문자가 왔다. ‘괜찮아?’ 답을 했다. ‘왜?’, 다시 문자가 왔다. ‘뉴스 못봤어? 노무현...’
그가 사라져간 그날 이후로 그 시대는 그렇게 막을 내렸지 수많은 사연과 할말을 남긴채
남겨진 사람들은 수많은 가슴마다에 하나씩 꿈을 꾸었지 숨겨왔던 오랜 꿈을 무엇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가
무엇이 옳았었고 무엇이 틀렸었는지 이제는 확실히 말할 수 있을까 모두 지난 후에는 말하긴 쉽지만 그때는 그렇게 쉽지는 않았지
- 신해철, ‘70년대에 바침’ 중에서 (일부 수정)
(계속)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모두 지난 후에는 말하기 쉽지만 그때는 그렇게 쉽지 않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