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 essay] 사랑한다는 말

in #kr4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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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날엔 사랑 앞에서 내 언어가 얼마나 빈약할 수 있는지를 수시로 절감하곤 했다. 이십대의 어느 날, 성시경이 노래한 사랑의 노랫말을 듣고 무릎을 쳤다. 사랑 앞에서 언어의 무력감을 느끼는 건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하고. 그 가사는 <내게 오는 길>이라는 노래 속에 있었다.
“사랑한다는 그 말, 아껴둘 걸 그랬지. 이제 어떻게 내 맘 표현해야 하나.”

 사랑에 빠진 한 남자가,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그 남자는 그 이후에 깨닫는다. 아, 사랑한다고 말했던 그때가 절정이 아니었구나. 그 남자는 그 후 더 깊고, 높은 사랑에 도달했지만 사랑한다는 말 이상의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할 수 있는 말은, 이제 어떻게 내 맘을 표현해야 하는가라는 푸념을 가장한 고백뿐이다.

 과학에서는 어떤 물질의 농도가 진해질수록 그걸 수치로 나타낼 수 있다. 농도가 몇 퍼센트라든지, 염기성이나 산성 농도가 ph 얼마라는 식으로 숫자로 표시하는 게 가능하다. 1-14까지로 나눠진 ph농도는 1로 갈수록 산성이 강하고, 14로 갈수록 염기성(알칼리성)이 강해진다. 7정도가 중성이고, 증류수가 여기에 속한다. 레몬은 ph농도 2정도 되고, 하수구 세척액이 ph농도 13정도 된다.

 사랑을 포함한 인간의 감정을 ph농도처럼 수치화 할 수 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다.

“오늘 아침에 너에 대한 감정의 농도를 재봤는데, lv(러브)10정도 되더라. 어제보다 1정도 떨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높은 수치야. 그게 내 마음이야.”
“아 그렇구나. 어제 lv11이었는데 왜 1만큼 떨어졌을까? 뭐, 높긴 하지만 떨어졌다는 게 조금 찝찝하네.”

 또 이런 대화도 가능할 것이다.

“널 12만큼 사랑해. 석 달째 떨어지지 않고 있어.”
“왜 14엔 도달하지 못하는 걸까?”
“아니… 그건… 성인의 경지야.”
“넌 날 성인처럼 사랑하진 못하는 거니?”

 사랑의 감정을 수치화할 수 있는 상황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객관화된 내 마음의 수치는 내 것보다 큰 수 앞에서 무력해지고 쉽게 비교될 것이다. 숫자로 표현된 마음은, 그 이상의 의미를 품기 어려워진다. 내 마음을 속이며 접근하는 사람을 판별하는 데는 효과적이겠지만, 빈약한 기둥만 서 있는 ‘수치’라는 집에서 ‘사랑의 신비’가 숨을 곳은 없어진다.

 사랑은 역시, ‘알 수 없는 마음’이라는 집일 때 풍성해진다. 그 집엔 다락방도 있고, 지하실도 있고, 밀실도 있어서 무엇이 어디에서 툭 튀어나올지, 뭐가 더 숨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떨리고, 설레고, 알쏭달쏭하다.

 사랑은 수치로 잴 수 있는 관념이 아니라, 저마다 색이 다른 것에 가깝다. 수치화할 수 없는 것이기에, 사람들은 사랑한다는 말을 넘어서는 표현을 위해 몸부림쳐왔다. 그 과정에서 사랑을 가리키는 수많은 시와 비유가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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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어린 시절에 마음에 꽁꽁 담아놓고 수시로 꺼내 되뇌었던 몇몇 사랑 고백이 있다. ‘사랑’이 포함되지 않았던 그 고백들은, 사랑의 감정을 ‘사랑’이라는 말에 가두지 않고 높은 곳으로, 깊은 곳으로, 넓은 곳으로 한없이 열어두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로맨스 영화 중 하나였던,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엔 강박증에 걸린 유달이라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는 사랑의 감정이 차올랐을 때, 그녀에게 힘겹게 고백한다.
“당신은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도록 만들었소.”

 강박증에 괴팍하고 자기중심적이었던 중년의 남자 유달은, 누군가를 사랑하고서야 비로소,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고 싶어졌다. 사람을 변화시킬 가능성으로 기능하는 사랑의 속성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이 표현이야말로 가장 아름답고 강렬한 사랑 고백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 맘에 담아두었던 또 하나의 표현은,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에 등장한다.
“나는 그대를 네 시에 만나기로 되어 있으면 세 시부터 행복해졌고, 어두운 밤하늘조차 그대의 검고 부드러운 머리칼을 연상하지 않고는 바라볼 수 없었다.”

 사랑에 빠지면 세상이 달리 보인다고 한다. 내가 바라보는 모든 것이 그대와 연결된다. 내가 맛보는 모든 것을 함께 맛보고 싶고,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을 함께 누리고 싶어진다.

 젊은 날에 일을 마치고 가파른 언덕길을 오를 때, 고개를 들면 바로 밤하늘이 보였다. 밤하늘은 매일 볼 수 있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배경이었다. 하지만 사랑에 빠지면, 내 주위의 평범한 것들이 특별해진다. 매일 보던 밤하늘조차 그대의 검고 부드러운 머리칼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내가, 지루하기 짝이 없는 내 일상이 어떻게 하면 특별해질 수 있을까. 특별해지고 싶다면, 사랑하라.

 꽤 오래도록 마음을 밝혀주었던 마지막 문장은, 바로 함민복의 <가을>이라는 한 줄짜리 시였다.
“당신 생각을 켜 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

 젊은 날 추억과 글쓰기의 저장고였던 싸이월드엔, 미니홈피의 배경을 ‘스킨’으로 바꾸어 설정할 수 있었다. 어떤 이웃들은 수시로 스킨을 바꾸어가며 그때그때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고, 어떤 이웃들은 특정한 스킨을 자신의 시그니처 배경으로 고정시키기도 했다.

 내 미니홈피의 스킨은, 광수 생각의 광수가 그린 그림에 함민복의 <가을> 문구가 박혀 있었다. 그림은 별이 한 두개 반짝이는 캄캄한 밤을 배경으로, 불을 밝힌 작은 집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그 시절은 그랬다. 나의 전기(電氣)가 방전되는 줄도 모르고 밤새 그녀의 생각을 켜두곤 했다. 내가 가용할 수 있는 에너지의 대부분을 그녀를 떠올리고, 그리워하고, 생각하는데 썼다.

 사랑에 빠진 이가 사랑한다고 고백한 순간부터, 그는 자신의 사랑을 다른 사랑들과는 다른 것으로 채색하고 싶어진다.
“이제 어떻게 내 맘 표현해야 하나.”

 사랑이, ‘사랑한다는 말’에 갇히지 않고 수만 가지의 가능성으로 뻗어나갈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 푸념에서 시작되었다. 사랑은 계속 열린 하늘을 날아야 한다. 수만 가지의 색으로 반짝거려야 한다. 사랑의 언어는 그런 운명이다. 앞으로도 지겹도록 노래 불리고, 읊조려져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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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경우가 너무 많죠.
이런 저런 생각이 많아지네요 ㅎ

옛 추억이 떠오르시나봐요. ^^ 사랑을 이루셨길요!

인간은 사랑을 특별하게 표현하기 위해 수많은 표현을 만들었지만, 막상 정말 각별한 사랑을 하고 있다면 "사랑한다"는 말이 오히려 가장 특별한 표현이 될 수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런 각별한 마음이라면, 포장지가 없어도 상대가 알아볼테니까요.
제가 워낙 투박한 걸 좋아해서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최근에 저도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대사를 인용한 적 있었는데, 참 반갑기도 하네요.

포장지가 없는 각별한 마음, 그런 담백함이야말로 가장 진솔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말씀이네요^^
인간은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지겨워하지도 않고 새로운 표현을 만들어 왔지요. 어쩌면 인간의 역사는, 사랑을 다르게 정의하고 표현해온 항로인지도 모르겠어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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