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의 기적 시작
1970년 4월 1일 포항의 기적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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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세상을 떠난 많은 이들 가운데 가장 기억에 크게 걸린 사람을 든다면 박태준을 들 것 같다. 그는 또 다른 의미의 한국 현대사였다. 와세다 대학의 기계공학도였지만 해방 후엔 군문에 들어 군인으로서 6.25를 치렀다. 함경북도 청진까지 올라갔다가 눈보라 휘날리는 흥남부두까지 내려오는 동안 생사의 기로에 여러 번 섰다. 생도와 교관으로 처음 만나 평생 인연을 맺은 박정희는 5.16 쿠데타 당시 박태준을 거사에서 제외하는 대신 일이 실패로 돌아갈 경우 자신의 가족들을 부탁한다. 그만큼 박태준은 박정희의 신뢰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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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나 같은 불행한 군인이 없기를......” (있으면 자기도 큰일나니까)바라며 군복을 벗은 박정희를 따라 박태준도 군복을 벗었다. 박정희는 박태준을 정치보다는 경제 쪽으로 활용하려는 의지가 확고했던 것 같다. 박태준에게 대한중석 사장을 맡겼고 박태준은 그 임무를 훌륭히 수행해 낸다. 그 뒤 박태준이 맡은 임무는 실로 불가능을 넘어서서 불가사의해 보이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종합제철소의 설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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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제철소 설립 시도는 그 이전에도 있었지만 다섯 번이나 실패로 돌아갔다. 5개국 8개 회사로 조직됐던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도 와해됐다. IBRD의 보고서도 한국에 제철소는 가망이 없다고 판정했다. 박태준이 미국으로 날아가 IBRD를 설득했으나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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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의 아이디어가 미친 곳은대일청구권 자금. 그러나 대일청구권 자금은 농어업에만 투자할 수 있는 것으로 양국 국회의 비준이 끝난 상황. 박태준은 일본으로 직접 가서 이 문제를 조정하고 일본 제철사의 지원까지 받아낸다. 이때 도움을 준 일본의 야하타 제철이 청일전쟁 때 청나라의 배상금을 바탕으로 세워진 회사라는 것 또한 역사의 장난같은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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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영일만 허허벌판에 제철소의 씨나마 뿌릴 수 있게 된 박태준이 제창한 것이 ‘우향우 정신’이었다. 이 제철소를 만드는 돈은 선열들의 피땀값이니 이걸 모래사장에 헛되이 쓸어 넣는다면 우리 역시 ‘우향우’해서 영일만 바다로 뛰어들어 죽자는 것이었다.
마침내 1970년 4월 1일 만우절의 거짓말같은 일이 현실화된다. 한가한 어촌 마을을 쓸어버린 허허벌판 위에서 포항제철 기공식이 대통령과 부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연설한다. “....... 이제부터 본격적인 공장 건설을 시작하는 여러분들에게는 지금까지 했던 것보다 더 어렵고 더 중요한 일들이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됩니다. 사장 이하 전사원들이 일치 단결해서 우리 민족의 하나의 역사적 사업이 될 수 있는 이 포항 종합 제철 공장을 여러분들 손으로 완공한다는 긍지와 보람을 느끼고 이 공장을 훌륭한 공장으로 건설해 주기를 부탁해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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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설 도중에도 세찬 바닷 바람에 실린 모래들이 행사장을 뒤덮을 듯 날아다녔고 참석자 중에는 이 공장이 과연 지어질 수 있을까 중얼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포항은 모래 바람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하루 종일 작업한 것이 자고 일어나면 모래투성이에 엉망이 되는 일도 다반사였고 박정희 자신 브리핑을 받다가 눈이고 코고 가리지 않고 들어가는 모래 때문에 재채기를 하지 않고는 못배겼다고 하니 말 다하지 않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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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박정희는 박태준에게 그답지 않은 불안한 어투로 물었다고 한다. “남의 집 다 헐어놓고 제철소 되기는 되는 기가.”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천하의 박태준도 그날 위경련을 일으킬만큼 신경이 곤두섰다고 한다. 그렇게 상황은 열악했고 조건은 험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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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 잘 알려진 박태준의 성공시대를 일일이 적을 필요는 느끼지 못한다. 오늘날의 포스코의 위용과 허허벌판의 영일만을 비교해 볼 때 그는 역사에 남을 위대한 움직임의 선봉에 서 있었다 할 것이다. 그의 존재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포철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은 폭넓은 공감을 얻는다. 중국의 등소평이 일본의 이나야마 요시히로 신일본제철 회장에게 “중국에도 포항제철과 같은 제철소를 지어 달라”고 했을 때 이나야마의 간단한 답변은 유명하다.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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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 성공시대의 이면에는 지휘봉이 부러져라 안전모를 내리치고 툭하면 조인트를 까고 다니고 공기 단축을 위해 살인적인 밤샘 작업을 불사하던 ‘사무라이’같은 박태준의 모습도 존재한다. 그조차 포항제철 건설현장에서 들이마신 모래와 석면 때문에 병을 얻어 죽음에 이르렀을진대, 포항제철 공사 현장에서 일했던 그 수많은 노동자들은 어떠했을까도 마땅히 고민해 볼 문제다. 이순신이 추앙을 받지만 그 빛나는 승리는 손바닥에 피 흘려 가며 노 저은 이들과 목숨 걸고 활시위 당기고 포 쏜 수군들의 노력으로 빚어진 것이듯이, 박태준 개인에게 포철의 신화의 영광이 드리우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아무리 용감한 수군이 있고 아무리 성실한 노잡이가 있었더라도 결국 전투를 지휘하는 이순신이 없었을 때 조선 수군은 물에 뜬 나무판자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나는 1970년 4월 1일 그야말로 ‘사즉생, 생즉사’의 마음으로 영일만에 섰던 박태준의 앙다문 입술에 경의를 표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큰 역사를 이루고도 그가 개인적으로 이익을 취한 것은 별로 없었다. 자신의 주군 박정희에 대해 충성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박정희를 무조건 옹호하지도 않았고, 한겨레 신문 창간 때는 "그런 목소리도 있어야 한다"면서 지지해 주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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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아주 용렬하고 무식한 나눔으로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을 분류하기도 한다. 그 두 집단 속에 섞여 있는 아주 많은 짜가들과 탐욕들을 걸러내는 작업도 필요하지 않을까. 과문의 탓이겠지만 박태준은 비판할 것은 비판하되 그보다는 수렴해야 할 것이 더 많은 사람 중의 하나가 아니었는가 하는 판단을 한다. 1970년 4월 1일 그는 허허벌판의 영일만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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