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슬픈 어린이날의 시작

in #kr5 years ago

1869년 8월 16일 세상에서 가장 슬픈 어린이날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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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반 파라과이는 남미에서 가장 주목받는 나라 중 하나였다. 다른 남미 지역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토지 개혁을 이뤄 냈고 착실한 경제 성장을 통해 내실 있는 국가로 발전했다. 1854년 최초로 증기 기관을 자력으로 개발한 것은 그 상징과도 같았다. 영국 기업으로부터 증기 기관을 수입한 뒤 그걸 뜯어내고 재조립하면서 기술을 습득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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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과이 수도 아순시온을 출발한 증기기관차는 아르헨티나까지 이어졌다. 중남미 최초의 대륙간 횡단열차였다고나 할까. 그런데 파라과이 수도 아순시온에는 지금도 19세기의 기차역이 우람하게 남아 있고 지금도 증기 기관차를 일부 유지, 운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 증기 기관차는 야누스같은 두 이면의 상징이다. 과거의 영광과 오늘의 가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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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반 번영하던 파라과이 대통령 안토니오 로페스가 사망하고 그 아들인 솔라노 로페즈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이 사람은 프랑스 대사로 나갔다 온 경력이 있었는데 이 외교관 생활 중에 나폴레옹에 흠뻑 빠졌다. 루마니아 대통령 차우셰스쿠가 북한을 방문했다가 그 우주적인(?) 환영에 ‘뻑이 가는’ 경험을 한 뒤 김일성을 본따 자신을 ‘콘두카토르’ (지휘자)라는 일종의 ‘수령’으로 자리매김한 1인 숭배 체제로 일로매진하게 된 것처럼 로페스도 파라과이의 나폴레옹이 되겠다는 몽상에 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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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최강이라고 불리던 잘 훈련된 5만 대군을 보유한 로페스는 남미의 대국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와 국경 분쟁을 서슴지 않았고 대서양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해안 지대를 얻고자 하는 욕망을 숨기지 않았다. 급기야 신흥 독립국 우루과이의 내정에 브라질이 군사적으로 개입하자 이에 맞서 브라질에 선전포고하는 기염을 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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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브라질과 전쟁하고자 하니 길을 열어 달라”는 파라과이판 ‘가도입명’(假道入明 : 임진왜란 때 명나라로 가기 위해 조선이 길을 열어 달라고 했던 일본의 요구)을 아르헨티나에게 들이밀었다. 아르헨티나로서는 어이없는 요구였고 이를 거부하자 파라과이는 아르헨티나에도 전쟁을 선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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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안타깝게도 로페스는 나폴레옹의 포부는 몰라도 군사적 재능은 1/10도 갖지 못했고 파라과이는 나폴레옹 제국의 프랑스에 비하면 서치라이트와 반딧불의 차이가 있었다. 즉 프랑스는 전 유럽을 상대로 버틸만한 국력과 인구를 보유했지만 파라과이는 인구가 탈탈 털어 53만 명에 불과한 소국이었다. 하지만 로페스도 불가능이라는 단어가 없는 사전을 보유한 듯 했다. “긍지높은 파라과이 군에게 영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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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예군이었던 파라과이군은 잘 싸웠지만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워낙 대국이었다. 좀 거짓말 보태면 한국이 중국과 일본 연합군과 상대하는 셈이었다고나 할까. 초전의 몇 번 승리를 제외하면 파라과이 군은 수세에 몰렸다. 파라과이 군은 중국의 산해관같은, 러시아의 세바스토폴같은, 우리의 강화도 같은 천혜의 요새가 있었다. 후마이타 요새라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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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안에 주물 공장을 두고 대포를 만들어 가면서 싸울 수 있었고, 수운(水運)을 통해 원활한 보급이 가능헸던 이 요새에서 파라과이 군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연합군의 맹공을 3년 동안이나 버텨 낸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수비대 사령관은 요새 포기를 간청하지만 로페스는 듣지 않았고 사령관은 절망 속에 목숨을 끊고 만다. 로페스는 후임 사령관의 아내를 인질로 잡고 결사항전을 강요했고 요새가 함락당하자 사령관의 아내를 죽여 버리는 광기를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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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페스는 브라질 황제에게 평화 협정도 제안해 봤지만 이미 브라질은 이 버르장머리없는 나폴레옹 망상 환자를 제거할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후일 브라질 군부가 “파라과이를 너무 몰아부쳐서 우리도 피해가 컸다.”고 반발할 정도로 브라질 정부도 강경했고 로페스의 광기 어린 항전 의지도 공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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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 대한 암살 음모가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힌 로페스는 반역 혐의로 자신의 가족이 포함된 수백 명을 학살하면서 결사 항전을 주창했고 수도 아순시온이 위협받자 군대 뿐 아니라 민간인까지 옮겨 가며 저항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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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중기 최충헌 정권 때 고려를 침략한 거란족들은 군대 뿐 아니라 가족과 가축까지 포함한 유이민 집단이었다고 전해지는데 당시 파라과이도 그랬다. 53만 인구 가운데 반 이상이 죽어 없어지는 참혹한 전쟁 속에 군인과 민간인의 구분은 이미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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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지대로 이동한 로페스는 피리베브이를 임시 수도로 정하고 새롭게 군대를 편성했는데 이미 상식적인 범주의 군대에서 벗어나 있었다. 남녀노소 모두가 군인이었다. 그러나 군화도 없어 맨발로 다니고 군복이 없어 웃통을 벗어젖히고 싸우는, 군도가 없어 도끼를 휘두르고 총이 없어 검은 칠을 한 나무막대기를 든 기기묘묘한 군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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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수도 피리베브이가 위협받자 로페스는 또 다시 이동했다. 브라질 군대가 매섭게 추격에 나섰고 파라과이 군 약 3천5백명이 후위를 맡아 추격을 저지하려 들었다. 1869년 8월 16일 아코스타 뉴 평원이라는 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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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투는 인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양상의 전투였다. 파라과이 군 대부분은 어린아이였던 것이다. 열 살 아래의 꼬마들도 많았다. 그들은 어른 흉내를 내기 위해 가짜 턱수염을 붙이고 나무로 만든 가짜 총을 휘두르며 득달같이 달려드는 브라질 기병대에 맞섰다. 그 명령을 내린 것은 누구였을까. 누가 수염을 달고 나무를 쥐어 주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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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과 아이의 싸움에 더해 2만과 3천의 싸움이었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던 브라질 군이었지만 이미 독이 오를 대로 오른 터였다. 철없는 아이들이 맹렬하게 응전한 것도 기름에 불을 부었다. 브라질 군인들은 가차 없는 공격 아니 학살을 시작했다. 종국에는 파라과이 어린이들이 브라질 군인들의 다리를 붙들고 울부짖으며 살려 달라고 빌었지만 사정없이 칼을 휘둘러 목을 베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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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는 여섯 시간이나 걸렸다. 아스코나 뉴 평원에 널부러진 수천 명의 파라과이의 어린 군병(?)들의 시신은 그대로 파라과이의 미래를 비춰 주는 듯 했다. 전쟁 뒤 파라과이의 남녀 성비는 1:9에 달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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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파라과이는 8월 16일을 어린이날로 기념한다. 다양한 행사 가운데 3,000명의 어린이들이 3,000개의 국기를 들고 운반하는 행사도 열린다고 한다. 아코스타 뉴 전투에서 죽어간 어린이들을 기리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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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과이인들에게 그들의 희생이 ‘숭고’할지는 모르나 적어도 파라과이의 어린이날은 어린이날을 기리는 모든 나라의 모든 날 가운데 가장 슬프고 끔찍한 날임은 분명하다. ‘옥쇄’를 주장하고 ‘결사항전’을 외치고 ‘최후의 1인까지’를 되뇌는 경우는 세계 역사에 지천으로 많았으나 그게 전 국가적으로 현실화하고 전 국민적인 희생을 감수해야 한 예는 그렇게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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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과이의 어린이날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교훈적인 날이기도 하다. 인간이 어디까지 어리석을 수 있으며 얼마나 독해질 수 있고, 또 멸종의 발걸음을 ‘용감하게’ 옮길 수 있는가를 증명하는 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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