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숙
뒤늦게 시작된 방황은 서른을 넘도록 이어졌다. 학교도 내 길이 아닌 것 같았고, 회사도 내 길은 아닌 것 같았다. 그즈음 제주도판 산티아고가 생겼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오로지 걷는 것만이 목적이었으며, 그외 목적은 없는 길이었으니, 당시 내 처지와 닮았다 싶었다.
제주도는 스무살에 친구들과 가보고 처음이었다. 이번엔 나보다 열 살 위의 직장 선배가 동행했다. 대책 없이 회사를 그만 두었으니 생계가 막막하긴 마찬가지였다. 아는 데가 없으니, 순리대로 1코스부터 걸었다. 말로만 듣던 성산 일출봉에도 올라보았다. 공기는 맑았으나 미래는 어두웠다. 뭐 먹고 살아야 하나. 망연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던 기억이 선명하다.
3박4일 동안 정처없이 걸었다. 인생에 정처가 없었는데 여행에 정처가 있었다면 그또한 어색했으리라. 그렇게 원없이 걷고 집에 돌아와보니, 뜻밖의 소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생의 새로운 장이 열렸음을 알리는 소식이었다.
그뒤로도 올레길을 자주 찾았다. 좋은 일이 있어서 찾고, 나쁜 일이 있어서도 찾았다. 내게 올레길은 어딘가로 향하는 길이 아니었다. 펄럭이는 파란 천조각을 따라 걷다보면, 고통도 미움도 희미해졌다.
그 길을 만든 서명숙 이사장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 이가 아니었다면, 지난 시간들은 내게 훨씬 가혹했을 것이다. 내겐 은인이다. 빚이 크다. 이제 고통 없이 편히 걸으시길 바란다.
Sort: Trending
[-]
successgr.with (75) 18 hours ag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