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rin's essay] 나는 왜 시를 쓸까? 아니, 사랑을 쓸까?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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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생각이 났다. 난 왜 시를 쓸까? 그 이유를 더듬어 보기 위해 이제부터, 내가 시를 처음 쓰기 시작한 태초로 기억을 워프시켜볼 것이다.

내 생애 첫 여자친구를 만났다. 깊게 좋아했고, 오래 가진 못했지만 그녀에 대한 마음만은 누구보다 컸다. 한 번은 여자친구와의 기념일이었다. 무슨 선물을 주면 좋아할까 생각해봤는데 처음이다 보니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고민 끝에 나온 게, 편지와 먹을 것을 넣은 박스(?) 이렇게 주기로 했다. 그녀의 위장과 마음을 동시에 사로잡는 방법일 것이니, 난 당장 편지를 쓰고 먹을 것들을 사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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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는 금방 쓰여졌다. '나 너 사랑해', '오래가자', '너 밖에 없어' 등등으로 가득 채울 수 있었다. 가식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형식적이었다.. 먹을 것도 그냥 단순하게 편의점과 마트를 가서 그녀가 좋아할 것들로 쓸어담았다. 초콜릿, 사탕 종류들로 가득. 이렇게 선물 고르고 담기를 진행하고 집에 왔는데 이걸 받고서 그녀가 좋아할 지 감이 안왔다. 솔직히 뭘 좋아하는 지조차 잘 몰랐던 것 같다. 무언가가 하나 빠진 것 같았다. 정성으로 다 채워 넣었다고 생각했는데, 뭔가를 간과한 것이다.

그렇다. 난 이때 시를 생각해냈다. 편지는 많이 써줘서 질릴 수도 있을 것 같아, 내가 직접 창작한 시를 같이 써서 선물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바야흐로 '하상욱' 시인이 유행하던 때였다. 그렇게 짧은 시라도 재밌게 적어서 줄까 생각하고 난 뒤 바로 실행해 옮겼다. 적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단 30분 정도. 머리를 짜내서 쓰고 나니 뿌듯했다.

내가 그때 쓴 시들은 여자친구에게 줘버려서 없다 ㅠㅠ 생각나지도 않는다. 뭐.. 굳이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대충 내용이 다 19금이었던 것만 기억한다.. 아! 이 글을 쓰면서 제목은 하나 기억이 났다. '면봉' 이었다.. (상상은 독자에게 맡겠습니다.) 쨌든, 난 그 시들을 여자친구에게 선물해준 이후로 줄곧 시를 자주 써왔다. 엄청 엉망인 표현에다가 멋진 척하려고 넣은 고급 어휘들까지.. 지난 시들을 보면 한없이 내가 부끄러워지기만 한다. 물론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도, 내 시들도 다 시간이 지나면 부끄러움의 산물이 될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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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를 갔다. 정확히 말하면 훈련소에 입소를 해버렸다. 누가 날 끌고 가더라.. 빡빡머리를 한 채 부모님과의 마지막 인사를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생활관 건물에 들어갔다. 이후 여러 가지 설명들을 듣고 훈련소 때 쓸 번호를 부여받고 군복을 받으면 자게 해준다..가 아니라 밤에 또 내 인적사항들을 써야했다. 이 인적사항들을 쓰던 중 엄청 어이가 없던 문항이 있었는데 내용인 즉슨, '가족과 친지 중 (지인 포함) 군 간부가 있을 시 계급과 성명을 아래에 작성하시오. ' 대략 이런 문구였다. 군대가 심각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생각은 전역을 하고 난 뒤에도 변치 않고 있다.

조교들이 훈련병들이 이용할 수 있는 시설들을 설명해줬다. 그 중에 도서관이 딱 귀에 꽂혔다. 가뜩이나 할 것도 없는 군대에서 내 유일한 낙으로 삼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난 군대 오기 전엔 책을 정말 정말 읽지 않았다.) 설명을 듣고 난 뒤부터 개인정비 시간 때마다 계속 가서 책을 빌리고 읽고 생활관에서도 읽고 했다. 처음 빌린 책이 이외수 님의 '하악하악' 이라는 책이었는데 책에 나오는 구절마다 너무 주옥같아서 옮겨 써보고 싶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썼던 것 같다. 초등학교 땐 숙제로 일기를, 중학교 때도 숙제로 한국사 프린트 배끼기를, 고등학교 때도 내 노트의 글들은 이런 것들의 연속이었다. 누군가의 글을 읽고 내가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처음이었다. 그 생각은 곧 스케치북 위의 물감처럼 번져 내가 글을 창작하고 싶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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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악하악' 의 좋은 글귀들을 우선 많이 썼다. 그리고 처음 내 글을 쓸 땐 모방을 했다. 이게, 가짜란 생각에 좀 찝찝하긴 했는데 모든 사람들의 글들과 생각은 사람들의 관계나 책 등에서 영감과 영향을 받아 작성되고 생성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외수 님의 글 중에 뒷간으로 뭘 자꾸 받아드시는 정치인을 비난하는 글이 있었는데,

난 이 글을 모방했다. 이렇게.

방귀 냄새는 나지만, 방귀를 뀐 사람은 없다.

내가 살던 생활관은 항상, 어떤 놈 때문에 방귀 냄새가 끊이질 않았다. 그래서 이걸 접목시켜서 첫 모방글이 탄생했더랬다. 여담으로 이 친구가, '내가 방귀 꼈소' 하고 밝히고 같이 해결책을 도모하지 않고 그냥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수료할 때 까지. 나중에 동기들끼리 만든 단톡방에서 그가 '그게 나였어.' 하고 밝혔을 때는 정말 내 안에 이루말할 수 없는 분노가 느껴졌다. 동시에 '설마 얘였다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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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료를 하고 자대 배치를 받았고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사귀던 사람과는 입대 2주 전에 헤어졌었는데 힘들지 않았다. 사랑이 어렸다. 좋아하는 사람은 정말 나에게 큰 행복이 되었다. 그 사람 덕에 시만 한 100 편은 넘게 썼을 것이다.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마음껏 아파했다. 내 글쓰기 인생에 가장 큰 도움이자 경험이 되어준 사람이다.

사랑을 느꼈고, 아픔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웠다. 사랑할 때에는 시가 잘 쓰여지지 않았다. 그저, 나에 대한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떨까 궁금하여 쓰기도 하고 내 마음을 그 사람에게 전할 용기가 없어 쓰기도 했다. 그에 반해, 아플 때에는 시가 너무 잘 쓰여졌다. 아마 응축된 응어리들이 내 가슴을 통해 조그마한 손가락으로 뿜어져 나오려하니 그런 것 같다. 서로 나오려고 아등바등하는 그런 그림 말이다.

글과 시를 쓰면서 내 마음의 끈을 조였다 풀었다 했다. 아파도 더 아프기 위해 쓰기도 했고, 행복할 땐 더 행복하려 썼다. 한 마디로 나에게 시는 고통이자 행복이다. 내 감정이 그대로 녹아내린 것의 산물. 내 자체. 내 자신이다.

마음을 쓰고 사랑을 쓴다. 내 정체성을 실감하기 위해서, 또 사랑을 느끼기 위해서. 내 자신의 가치를 알고 싶어서다.

시를 써내려가다보면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너무 아프구나, 행복하구나 하는 그런 느낌, 생각들. 나를 제 3자 입장으로 볼 수 있기도 하다. 여러가지 측면에서 나에게 시와 글의 의미는 엄청나다. 항상, 내가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쓰려한다. 행복하다. 감사하다. 오늘도 어김없이 고생했다, 나야.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 너무 감사합니다. 항상 부족한 제 글 봐주시고 덕담해주시는 @cjsdns 님 감사드리고 제 팔로워분들 모두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 생각이 비치는 것에 대해 항상 행복해하고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여러분과 뭔가를 나눌 수 있다는 생각에 벅차오릅니다. 오늘은 이만 하겠습니다. 행복하세요,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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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 ㅎ 따뜻하네요 잘 읽고 갑니다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3만시간의법칙이라고 하는대 그것과 마찬가지로 글도 쓰면 쓸수록 늘려나요? 전 그래서 오늘도 도마를 만듭니다. ㅎㅎㅎㅎ

저는 그래서 오늘도 글을 쓰죠.

1만시간 아니었나요? 3만시간하면 더 확실할 것 같긴하네요 :D

면봉.....🤔 궁금하네요ㅎㅎㅎ 글 잘 읽고 가요^^

감사합니다. ㅎㅎ 궁금하시면 면봉과 귀를 상상하시면 좀 더..디테일..

항상 마음이 복잡해도 글을 적으시면서 자신의 본질을 찾아가시길 기원합니다 ^^ 좋은 글 보고갑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면봉을 보고 시상이 떠오르는건 저뿐인가요?
보팅누르고가요!! 놀러오세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놀러가겠습니다!

아픈 시, 즉 좋은 시 기대됩니다.

기대도 감사히 받겠습니다.

얼마 전부터 @sirin418님의 시를 잘 읽고 있습니다 ㅎ
보통 전 새벽에 읽게 되는데 정말 좋습니다^^

와우.. 정말 감사합니다. 잘 읽고 계시다고 말씀해주시니 마음이 뭉클해지네요. 앞으로도 자주 뵈요.

시를 쓰게 되는 계기는 거의 비슷한가봐요ㅎㅎ 그나저나 19금 면봉이라.. 도무지 감이 안와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네요..^^

앜ㅋㅋㅋ 이 부분은 언제 한 번 공개를 해야할까요 ㅋㅋ

와...감성이 풍부한 분이시군요..! 시를 선물하시다니...너무 멋져요. 저도 예전에 시를 선물 받은적이 있는데 긴 편지보다 강렬했어요. 시린님도 비록 지금은 헤어졌지만 그 분들 마음에 감동을 주셨을거에요 :)

아플때에는 시가 너무 잘쓰여졌다.

너무 공감가요 :) 전 시는 아니지만..아니 시인가 ㅋㅋ 아무튼 저도 가끔 참을 수 없이 글을 써야할때가 있는데 대부분 힘들때 그러더라구요.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아플 때 무언가 강렬하게 느껴진다는 건 사람이라면 똑같은 것 같네요. 언제 한 번 시 선물하는 컨텐츠를 만들어 봐야겠어요. 그럼 제일 먼저 꼬드롱 님한테 제 망작을..ㅋㅋ

응원합니다... 파이팅!

응원 감사합니다! 심톨님도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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