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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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 테리 이글턴. 2020.

테리 이글턴의 글은 읽기가 쉽지 않다. 가독성이 떨어진다. 번역 문제가 아니다. ‘문학 비평가’답게 은유와 비유가 넘치는 그의 글은 다른 문화권 사람들에게는 한 번 더 해석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장벽이다. 또한 그는 자신의 책을 읽는 독자가 일상적인 저녁 식사 자리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지식을 갖춘 친구를 대하듯 글을 쓴다. 그런 친구들과 토론할 때는 거론하는 철학자나 철학에 대한 기본 설명 같은 건 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다른 그의 관점에 이끌려 그의 책을 읽게 된다. ‘비극’은 제목 때문이었다. 왜 우리는, 나는 비극에 끌리는 걸까.

“칸트의 눈으로 볼 때 숭고한 것은 - 무엇보다도 - 이성적 또는 초감각적 자아가 자연적 또는 경험적 자아에 거두는 승리를 표현한다. 바다의 폭풍이라든가 아찔하게 높은 산 같은 상투적인 시나리오에서 소멸의 가능성과 마주할 때 우리는 내부에서 우리의 실존에 대한 그런 공격을 차분하게 넘어서는 힘, 자유롭고 신비하고 초월적인 자아가 될 힘을 발견한다.”

“부당한 권위에 맞서 헛된 싸움을 벌이는 것은 자신이 자신을 낮추려는 힘들의 훌륭한 맞수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니체의 표현으로 하자면 이것은 승리를 거두는 패배의 문제다. … 영웅은 몰락을 받아들이면서 자기 내부의 무한함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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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으면서 카뮈의 ‘행복한 시시포스’를 떠올렸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시시포스가 몰락을 받아들이는 것이 체념이 아니라 ‘반항’이라고 말한다. 시시포스는 신이 내린 영원한 형벌과 그 부조리한 고통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단순히 맞서는 차원을 넘어선 수용이다. 그럼으로써 그 형벌은 힘을 잃게 된다.

이글턴은 『비극』에서 루크레티우스를 언급한다. 루크레티우스가 누군지 설명하거나 그의 글을 소개하지는 않는다. 마치 독자들이 그 정도는 이미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것 같다. 다음 글은 『비극』에 나온 내용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왜 숭고함에, ’숭고한 비극’에 끌리는지에 대한 루크레티우스의 생각이다.

루크레티우스는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에서 ‘달콤한(suave)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대양이 바람에 요동칠 때, 다른 이들의 비참함을 뭍에서 지켜보는 것. 고통받는 동족을 보며 기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피해 간 불행을 응시하는 것이 달콤하다."

"전쟁 중의 큰 교전을 아무런 위험 없이 목격하는 것. 높은 곳에 올라 전열을 가다듬은 전장을 바라보는 것 또한 달콤하다."

안전한 장소에서 타인의 고통을 지켜보며 안타까움과 연민을 느끼는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 한구석에는, 그 고통을 비껴나 있다는 걸 확인하며 안도하는 이기적 본능이 깔려 있다. 때로는 그 원초적 본성이 ‘숭고미’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해안의 높은 언덕 위에서, 온 세상을 타격하는 듯한 거대하고 광폭한 파도를 안전하게 바라보며 뭔지 모를 아름다움을 느낀다.

사람들이 ‘비극’에 끌리는 이유는 숭고한 아름다움을 느끼기 때문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 무의식에 깔린 이기적 본성,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을 생각해 보면, 오늘은 비극이 아니라 희극이 보고 싶다. 시끄럽게 웃기지도 않는, 잔잔하고 밍밍한, 찰리 브라운 같은 애니메이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