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슬리는 annoyed
수인은 형용사 10개를 하나씩 드로잉하는 워크숍을 진행했다. ‘거슬리는’은 두 번째 단어였다.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선택한 건 아니고, 제임스 러셀이 개발한 ‘원형 감정 모형’의 100개 형용사 중에서 고른 것이었다. 사전에서 ‘annoyed’는 보통 ‘짜증 나는’이나 ‘신경 쓰이는’으로 나오지만 이 모델의 다른 단어들과 의미가 중복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거슬리는’으로 번역한 것 같다. ‘annoyed’는 학생들에게 가장 쉬운 형용사다. 이 주제로는 그릴 수 있는 아이디어가 꽤 많기 때문이다.
수업을 마치고 나오자 그리 거세지 않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펼치고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웠다. 반쯤 피웠을까. 이마에 굵은 물방울이 톡톡 떨어지기 시작한다. 거슬린다. 고개를 들어 우산 밑을 살펴본다. 접히는 부분이 해져서 작은 구멍들이 생겨 있다. 그러고 보니 이 우산을 참 오래도 썼다. 어느덧 15년은 된 것 같다. 순간 ‘거슬리는’ 마음이 뚝 사라졌다. 이제 그만 보내줘야 할 것 같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 고마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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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내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시키고 노트북을 펼쳤다. 두 칸 옆자리에서 한 중년 남자가 학생에게 논문 지도를 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작지 않아 수인한테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석사 논문이었다. 연구실이 없는 출강 교수인 모양이었다. 거슬린다. ‘너무 교수 같은’ 말투도 그랬지만, 귀를 파고 들어오는 지도 내용도 거슬린다.
수인은 문득 예전에 TV로 농구 중계를 보던 시절을 떠올렸다. 당시 감독이 작전 타임을 부르고 선수들에게 호통치던 장면이 고스란히 방송을 탄 적이 있다. “야, 넌 수비를 해. 골을 막아. 그리고 넌 골을 넣으란 말이야!”
그 교수의 말도 이랬다. 수인은 짐을 챙겨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