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 노동

in #krsuccess9 days ago (edited)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기를. 그냥 집에만 있었어야 했는데. 어쩔 수 없어. 먹고살아야 하니까.

아예 처음부터 누군가 내게 말을 걸 빌미를 주지 말아야 해. 우측보행으로 길에 바짝 붙어 걷고. 지하철에서는 최대한 몸을 웅크려 구석에 처박히고. 유행 타는 옷 같은 건 입지 말고. 원래부터 그곳에 묻어있던 의미 없는 배경처럼 존재해야 해.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누군가 불쑥 말을 걸어올 때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의 영역이 침범당하고 나의 안온이 구겨지는 불쾌감에 아랫입술과 오른쪽 눈꺼풀이 저절로 찌그러져. 억지로 그들의 말과 얼굴 표정에 집중하고 그들의 의중을 해석해야 하는 고된 노동이 시작돼.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게 쉬운가 하면, 그것도 만만치 않게 괴로워. 듣는 것보다 훨씬 고강도의 에너지가 필요하거든. 하지만 그나마 내가 말을 먼저 건네는 게 낫지. 내가 시작한 일이니까. 내가 입을 떼기로 결정한 일이니까. 적어도 나 스스로, 나의 판단으로, 내가 주체가 되어 나의 평안을 깬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