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힐생활] 몸속에서 일어나는 진화
몸속에서 일어나는 진화
나힐생활 (아티클) | @etainclub
암이 어디서 왔는지 왜 존재하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치료하기 어려운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몸속에서 일어나는 진화
암은 그저 무조건 없애버려야 할 무서운 질병이 아니라 우리가 그 기원과 역사를 이해하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할 대상입니다. 이 책은 암이 어디서 왔는지 왜 존재하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치료하기 어려운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암의 역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습니다. 지구상에 다세포 생물이 처음 등장한 약 이십억 년 전부터 암은 생명체와 함께해 왔습니다. 그 이전 시대에는 세균이나 효모처럼 세포가 단 하나뿐인 단세포 생물들만 존재했는데 이들에게는 암이라는 질병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단세포 생물에게 세포의 분열은 곧 번식을 의미하기 때문에 무한정 증식하는 것이 오히려 생존에 유리했습니다. 하지만 여러 세포가 모여 하나의 몸을 이루는 다세포 생물이 등장하면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암은 바로 이 다세포 생물에게만 나타나는 고유한 문제이자 부작용입니다.
실제로 공룡의 뼈나 일백칠십만 년 전 인류 조상의 화석에서도 암의 흔적이 발견되었고 물고기나 새를 비롯한 수많은 야생 동물들에게서도 암이 나타납니다. 우리의 몸은 약 삼십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지구상의 인구보다 수천 배나 많은 엄청난 숫자입니다. 이 수많은 세포들은 우리가 하나의 온전한 생명체로 살아갈 수 있도록 완벽하게 협력합니다. 세포들은 각자 신경을 전달하거나 피를 해독하는 등 역할을 나누고 산소와 영양분을 공평하게 분배하며 심지어 몸 전체의 발달을 위해 제자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사라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완벽한 규칙 아래 서로 돕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이 삼십조 개의 분리된 세포 무리가 아니라 통일된 의지를 가진 하나의 사람이라고 느끼는 것입니다. 다세포 생물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세포들의 고도화된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렇게 완벽해 보이는 세포들의 협력이 깨질 때가 있습니다. 몸속의 규칙을 무시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세포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 세포들은 이웃 세포들에게 돌아가야 할 영양분을 지나치게 많이 빼앗아 먹고 산성 폐기물을 배출해 자신이 속한 주변 환경을 철저히 망가뜨립니다. 더 이상 몸의 통제를 받지 않고 무한정 분열하여 숫자를 늘리고 결국은 다른 조직으로 침투합니다. 다세포 생물을 유지하기 위한 협력 시스템에서 혼자만 이기적으로 반칙을 저지르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암의 본질입니다. 즉 암세포는 우리 몸이라는 훌륭하고 거대한 협력 체계를 속이고 이용하는 반칙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진화라고 하면 자연 생태계에서 호랑이나 얼룩말 같은 동식물 종이 수백만 년에 걸쳐 서서히 변하는 과정만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진화는 지금 이 순간 우리 몸속에서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몸속에 있는 수많은 세포들 사이에서도 제한된 자원을 두고 살아남고 번식하기 위한 생존 경쟁이 벌어집니다. 돌연변이가 생겨 규칙을 어기고 주변 자원을 독차지하며 빠르게 증식하는 이기적인 암세포들은 몸속 환경에서 다른 착하고 정상적인 세포들보다 생존에 훨씬 유리해집니다. 세포가 더 많이 분열할수록 그 성질이 다음 세포로 유전되고 이기적인 특성이 집단 안에서 퍼져나가게 됩니다. 즉 진화라는 자연의 법칙 자체가 우리 몸속에서 작용하기 때문에 암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유명한 진화 생물학자가 진화의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 생물학의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고 말했듯이 암 역시 세포들이 우리 몸이라는 생태계 안에서 진화하는 현상으로 보아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포들의 반칙 현상은 사람이나 동물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계의 수많은 식물들에서도 암과 똑같은 현상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선인장 중에는 성장 규칙이 망가져서 마치 뇌 모양이나 화려한 부채꼴 모양으로 자라나는 볏 선인장이 있습니다. 식물의 꼭대기 부분에서 세포 분열을 조절하는 능력이 고장 나서 세포들이 띠 모양으로 무한히 증식하는 것입니다. 식물학자나 정원사들은 이런 기형 선인장을 매우 특이하고 아름답게 여겨 정성껏 돌보는데 놀랍게도 이 선인장들은 암과 같은 비정상적인 거대 덩어리를 가지고도 죽지 않고 수십 년 동안 거뜬히 살아갑니다. 민들레나 소나무 같은 다른 식물들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이 현상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 몸에 생기는 암도 반드시 완벽하게 없애야만 하는 대상이 아니라 몸속 환경을 조절하고 잘 관리한다면 암을 안고도 충분히 오랜 시간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암을 치료하는 과정을 잔인한 전쟁에 비유하며 암세포를 무조건 박멸해야 할 악랄한 적으로 여깁니다. 의사나 환자 모두 어떻게든 암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약물과 치료법을 총동원합니다. 그러나 암을 완전히 파괴해야 할 적으로만 생각하는 전쟁의 관점은 오히려 치료를 실패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암을 완전히 뿌리 뽑기 위해 환자의 몸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아주 강력하고 독한 화학 약물을 쓰게 되면 처음에는 암세포가 거의 다 죽어 없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암세포 집단은 하나의 획일화된 군대가 아니라 각기 다른 유전적 특성을 가진 세포들의 모임입니다. 강력한 약물 공격이 가해지면 오히려 약물에 저항할 수 있는 독연변이를 가진 가장 지독한 암세포들만 살아남게 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이렇게 살아남은 소수의 강한 암세포들이 다시 분열하여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 그때는 어떤 약으로도 통제할 수 없는 최악의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그리스 신화에는 전쟁의 신이 두 명 있습니다. 한 명은 무조건적인 힘으로 밀어붙이며 파괴를 일삼는 아레스이고 다른 한 명은 지혜와 전략을 사용하여 불필요한 피해를 줄이고 적의 약점을 공략하는 아테나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암을 치료해 온 방식은 상대방을 멸망시키려다 아군의 땅까지 폐허로 만드는 아레스의 방식에 가까웠습니다. 암세포를 죽이기 위해 환자의 정상적인 몸까지 심각하게 파괴하는 무리한 공격을 퍼부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아테나의 방식을 배워야 합니다. 암세포가 진화하는 원리를 이해하고 그들이 살아가는 몸속 생태계의 약점을 찾아내어 통제해야 합니다. 암이라는 질병을 완전히 박멸하려는 무리한 시도 대신 우리의 삶에 큰 위협이 되지 않도록 암을 적절히 달래고 길들이며 장기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지혜로운 전략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세포의 진화라는 거대한 자연의 흐름 자체를 막을 수는 없지만 그 방향을 통제하여 암과 함께 평화롭게 살아가는 지혜를 발휘할 수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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