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범 가둔 독방, 격벽으로 막은 운동장…

in #steemzzang17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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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을 막론하고 형벌 제도는 전통적으로 인간의 육체에 직접 고통을
가하는 ‘신체형’ 중심에서 근대 이후 구금을 통해 자유를 제약하는 ‘자유형’
중심으로 변화했다.

3·1운동과 같은 대규모 독립운동 사건을 겪으면서 총독부가 형무소 ‘개선’
에서 최우선 과제로 여기게 된 것은 사상범을 독방에 수용하는 것이었다.
총독부는 1929년 예산 30만 원을 책정해 사상범 전용 옥사 계획을 수립
했다.

사상범의 독방 생활은 매우 고통스러웠던 것으로 보인다. ‘성북동 비둘기’
의 시인 김광섭(1905∼1977)은 조회 시간에 황국신민서사를 제창하지 않고
수업 중 ‘민족적 발언’을 했다는 이유 등으로 체포돼 3년 7개월간 서대문형
무소에서 옥살이를 했다.

1976년 간행된 ‘나의 옥중기’에서 형무소의 독방을 ‘죽음의 집’ ‘어느 날
어느 밤이고 문이 열리지 않는 곳’ ‘일하는 것도 일 없는 것도 벌인’ ‘모든
의욕을 눌러 죽이는’ 곳이라고 회고했다.

형무소의 존재는 단지 그 자체로 그치지 않았다. 서대문형무소 주변에는
이른바 ‘옥바라지 마을’이 형성됐다. 아직 형이 확정되지 않은 미결수의
존재 때문이었다. 미결수는 양식이나 의류, 침구 등을 ‘자변(自辨·자기가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소설가 현진건이 1933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소설 ‘적도(赤道)’에는 형무소
주변의 옥바라지 마을을 묘사한 대목이 나온다. “붓고 쫓기는 대경성은 예
까지 밀려나왔다. 건너 산 밑까지 올망졸망 초가집이 들어붙었다. 큰길이
생기고 버스가 다니고 나날이 번창해 가건마는 암만해도 감옥 냄새는 빠지
지 않는다.

독립문을 지나서부터 형무소 초입까지 서대문형무소가 위치한 서대문구
현저동과 길 건너편 종로구 무악동 일대의 지목은 병합 초기에는 대부분
‘전(田)’이었으나, 점차 ‘대(垈·대지)’ 비율이 높아진다. 시간이 흐르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죄인이 이와 같이 일시에 늘어난 까닭으로 먹는 것이 일시에 늘어서 지금은
하루에 17섬의 곡식을 먹어버리”고, “이에 또 차입밥을 먹는 사람이 적지 아
니”하여 “차입밥을 먹는 사람은 대략 600명인즉 세 끼로 말하면 2800끼의 많
은 벤또가 매일 감옥으로 들어오는 터라 끼니 때가 되면 벤또가 산같이 쌓”
였다고 전한다(매일신보, 1919년 5월 15일).

기본적인 먹을 것과 입을 것 이상의 옥바라지도 있었다. 1926년 6·10만세운동
으로 학생들이 수감된 학교의 교사 중에는 “각기 자기가 맡은 과정의 교과서
교과 보충 인쇄물 등을 차입시켜 옥중에서 상학을 하도록” 한 경우도 있었다.
(동아일보, 1926년 6월 23일).

광복 후 서대문형무소는 1967년 미결수 전용의 서울구치소로 기능이 바뀌었다
가, 서울구치소는 1988년 서울 올림픽 준비 과정에서 1987년 경기 의왕시로
이전했다. 형무소 건물은 일부를 남겨 1998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탈바꿈
했다.

이후에도 오랫동안 남아 있던 옥바라지 마을의 흔적은 2016년 일대를
대대적으로 재개발하면서 사라졌다. 그 대신 무악동에 ‘독립운동가 가족을 생각
하는 작은 집’이라는 기념공간을 조성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본문 이미지: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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