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 신부의 '비극적' 순교, 이 사람과의 동행 때문이었다?
한국에 가톨릭을 도입한 주역은 유학자들이다. 유교는 신을 받드는 종교이기보다
철학·윤리학·정치학에 가까웠다. 조선왕실이 유교를 국교로하면서도 불교나 무속
을 별도로 신봉한 것은 유교의 종교적 성격이었다.
조선 사회는 선교사에 의해 전교되기 이전에 내부의 요구에 따라 자생적으로
천주교 신앙이 일어났다는 사실에서 매우 특이한 경우로 유학자들이 능동적으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으며, 신속하게 서민 대중 속으로 전파됐다.
조선왕조와 가톨릭이 갈등을 빚은 것은 제사 문제에 대한 전통적 입장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가톨릭 신앙을 동아시아 침략에 악용하는 서양제
국주의의 전략이 그런 갈등을 더욱 부추겼다.
김대건 신부(1821~1846)는 한국사뿐 아니라 세계사적 관점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목격자다. 그는 세계 역사의 일대 전환점이 된 아편전쟁 강화조약 조인식을 난징
현장에서 목격했다. 조선인인 그가 청나라와 영국의 난징조약 체결 현장에 가게
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추적하다 보면, 19세기에 한국 가톨릭이 겪은 비극에 대해 조선 정부
뿐 아니라 서양제국주의도 책임이 있다는 판단에 도달하게 된다. 15세 때인 183
6년 12월 한양을 떠난 김대건은 1837년 6월부터 1842년 2월까지 마카오에서 공
부했다.
제1차 아편전쟁이 막바지에 도달한 1842년 2월 15일이었다. 이날 김대건은 55세
된 프랑스의 장바티스트 세실(1787~1873) 해군제독과 함께 프랑스 군함 에리곤호
에 탑승했다. 세실 함장이 우리 신학생 중 1명을 통역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19세기에 서양제국주의 국가들이 통상을 요구했던 방식은 흔히 함포외교로 불린
다. 군함에서 대포를 쏘아대며 위협을 가한 뒤 자국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통상조
약을 강요했다.
2월 16일 마카오를 출발해 동남쪽인 필리핀 마닐라에 2월 20일부터 체류한 세실
과 김대건 등은 4월 21일 북상을 개시했다. 6월 23일에 양자강 입구인 우송에
도착했다. 세실 제독은 김대건 등을 데리고 청·영의 난징조약 체결 장소로 향했다.
유럽 최강국이 아시아 최강국을 굴복시키고 동서양의 힘의 균형을 바꾸는 세계사
적 현장에 조선 통역을 데리고 갔던 것이다.
프랑스 제독은 그 자리에 참석할 이유도 권리도 없었다. 그의 통역인 김대건도
마찬가지였다. 김대건을 대동한 세실이 조인식장에 불청객으로 나타나 어색한
환영을 받는 장면을 기술한다. 그는 불청객으로 조인식 현장에 나타나 수상한
환영을 받았다. 세실의 참관은 매우 이례적이지만, 그의 강력한 의지에 의한 것
이었다.
당시 영국군은 아편전쟁의 최후 단계로 장강하구 전투를 준비하던 시기였다. 포팅
거는 아편전쟁에 중립적인 세실의 입장에 호의적이었고, 세실은 이 만남을 통해서
영국군의 전략적 방침을 알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인연에 1842년 8월 세실은
김대건을 대동하고 남경에 들어갈 수 있었다.
조인식 참관 뒤 김대건이 남긴 기록에는 영국 대표에 대한 언급은 없고 청나라
대표단에 관한 언급만 있다. 세실이 영국인들과는 직접 소통이 가능하여 김대건의
도움이 필요 없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세실이 김대건을 대동한 것은 청나라 쪽
의 분위기를 탐지하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김대건은 역사적 순간을 목격하게 됐다.
조인식을 참관한 뒤 세실의 생각이 바뀌었다. 조선에 가서 통상조약을 요구한다는
계획을 취소하고 마닐라로 돌아갔다. 프랑스 함대와 헤어진 김대건은 중국대륙을
통과해 만주에서 활동하다가 1845년 1월에 조선으로 들어갔다. 그해 4월 30일 제
물포에서 출국한 그는 8월 17일 상하이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조선에 재입국했다.
세실 제독은 김대건과 헤어지고 2년 뒤인 1846년에 충청도 해역에 나타나 조선
정부를 압박하고 돌아갔다. 이 사실은 <헌종실록>에 수록돼 있다. 양력으로 1846
년 8월 24일이다. 김대건이 체포된 날은 그해 6월 5일이고, 처형된 날은 9월 16
일이다. 세실이 다녀간 뒤 조정에서 김대건과 세실의 관계가 거론됐다. 이때는 8
월 24일이다. 김대건이 서둘러 처형된 것도 세실과의 인연이 중요한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세실을 수행한 일은 김대건이 세계사적 사건을 목격하는 계기가 됐지만, 위험한
동행이었다. 1842년에 세실과 헤어짐으로써 피했던 그 위험은 그가 체포된 1846
년에 세실이 방한하는 바람에 현실화됐다.
김대건의 비극적 순교는 조선 정부의 부당한 박해 때문에 생겼지만, 조선으로 향
하는 프랑스 해군이 그를 통역으로 앞세운 데도 적지 않게 기인한다. 자생적으로
가톨릭 신앙을 발전시킨 조선에서 그런 비극이 발생한 것은 조선인들의 신앙에 서
양제국주의가 끼어든 데도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본문 이미지: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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