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발적’ 황혼 육아
조선의 선비 이문건(1494~1567)은 ‘양아록’(養兒錄)을 남겼다. 말 그대로
“아이 기르는 기록”인데, 대상은 손주였다. 6남 1녀를 전염병으로 잃고
대가 끊길 위기에서 겨우 건진 손자였다.
첫니가 난 날과 첫걸음마의 감격, 아픈 손주를 위해 가슴 졸이며 처방했던
약제 등 16년의 내리사랑이 절절하다. 손주 보는 게 낙이라던 시절, 조선
유일의 ‘할아버지 육아 일기’다.
하지만 요즘 조부모에겐 낙(樂)보다 고(苦)가 더 커 보인다. 60대 중반, 딸
집에 가서 손주를 보다 주말에만 풀려난다. 아이는 예쁘지만 손목 터널 증
후군부터 무릎 허리통증까지 이른바 ‘손주병(病)’을 앓고 있다. 엎친 데 덮
친 격으로 90대 노모의 치매까지 시작됐다. 결국 그는 노모 집으로, 남편은
딸집으로 ‘출근’한다.
조부모 세대가 ‘비자발적 돌봄’에 시달린다는 조사가 나왔다. 손자녀를 돌
보는 조부모 절반 이상(53.3%)이 원해서가 아니라 자녀의 직장 생활 등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거절하지 못하고 맡는다. 하루 평균 6시간을 넘
는 ‘도와주기’ 수준을 넘는다.
육아 철학 차이도 스트레스다. 사소한 일까지 간섭을 받다 보면 “고생하
고 욕먹는다”는 서운함이 폭발한다. 갈등을 피하려 입을 닫다 보니, 기저귀
갈기, 밥 먹이기, 등하원 시키기 등 단순 육체노동에 매몰되기 일쑤다. 과
거의 돌봄이 가문의 미래를 위한 ‘자발적 헌신’이었다면, 황혼 육아는 자녀
경제활동을 위한 비자발적 노동에 머물고 있다.
세계는 조부모 돌봄에 경제적 보상을 서두르고 있다. 스웨덴은 부모의 유급
육아 휴직을 조부모가 양도받아 급여를 받을 수 있도록 법을 고쳤고, 서울
시도 자격요건을 갖춘 조부모에게 손주돌봄비 월 30만원을 지원한다. 집안
어른의 소일거리였던 육아를 사회적 가치를 지닌 노동으로 인정한 셈이다.
하지만 500년 전 ‘양아록’이 절실하게 기록했던 본질은 수당이 아니라 손주
와 함께하는 기쁨이었다. 지금의 조부모들에게 필요한 건 경제적 보상 못지
않게, 그들의 헌신을 당연시하지 않는 자녀의 감사와 온전한 ‘내 시간’ 한
조각일지 모르겠다.
본문 이미지: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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