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ing buskers/unlimited] 소년의 제안steemCreated with Sketch.

in #stimcity6 months ago (edited)



"이번 여정은 여기 로마까지네."



소년은 순간 얼어붙었다. 마법사는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여정이 끝났다고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시작인 줄 알았는데.



"왜죠?"

"그건 나도 알 수 없지. 다만 하나의 단락이 끝났다고 이해하면 되지 않겠나."



단락, 단락이라니 소년에게는 단락이 아니라 전락으로 들렸다. 끝이 없는 여정이 시작된 줄 알았다. 중간중간 쉬었다 이었다, 잠시 돌아갔다 다시 시작은 하겠지만, 여정이 이렇게 급작스럽게 중단되기도 할 거라는 걸 소년은 예상치 못했다. 폼클렌징을 압수당하고 기차를 놓친 것 같이.



"역시.. 20밀리 때문인가요?"

"아니라고 할 수도 없지.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걸세. 이유는 모르지만, 아무튼 직관이 여기까지라고 말하고 있으니 나는 전달할 뿐이네."



소년은 한 손에는 캐리어를 들고 어깨에는 배낭을 멘 채 고개를 떨구었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단락, 아니 전락. 소년의 마음은 마구 헝클어졌다. 여기까지라니. 후회가 밀려왔다. 20밀리. 그게 그렇게 중요했던 것일까? 소년은 마법사의 당부를 아주 잊은 것이 아니다. 아까웠다. 쓰던 폼클렌징이 있는데 여행용 100밀리를 새로 사자니, 그렇다고 용기만 또 새로 사자니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겨우 20밀리 차이. 그리고 내용물은 반밖에 들지 않았으니 오히려 40밀리가 비어 있었는데.



"자네는 아직 문제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군. 그렇다면 여기까지가 맞네. 그게 풀어야 할 진짜 과제일 테니까. 자 그럼, 다음에 보지. 아니 다음 생일까?"

"아니 마법사님,"



마법사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검은 백팩과 캐리어를 들고는 빠르게 군중 속으로 흩어져 버렸다. 소년은 물어볼 것이 많았는데, 미처 뭐라 항변도 해보지 못한 채, 흩어져 버린 마법사의 자취를 눈으로 좇아보았지만, 그는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이런 게 마법이고 직관의 언어라면 나는 배울 수 없을 것 같아. 20밀리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언어를 어떻게 배울 수 있겠어.'



소년의 마음이 부정적인 생각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마법사의 제안과 여정의 시작 그리고 20밀리의 오차. 중단된 여정. 소년은 20밀리에 사로잡혀 버렸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문제는 20밀리에서 시작되었으나, 사로잡힌 것은 원하는 것을 주저한 소년의 선택으로부터라는 걸.



'마법사는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을까? 단지 여정의 동행이 필요해서 나를 꼬셨던 건 아닐까? 하지만 내가 마법사의 경비를 부담한 것도 아니니 꼭 그럴 필요는 없었을 거야. 그렇다면 왜 내게 이런 몹쓸 경험을 하게 하는 거지. 이런 여행이라면 처음부터 떠나지 말았어야 했어.'



차오르는 부정적인 생각은 검게 변하여 후회로 물들었다. 쓸데없는 시간과 노력 그리고 돈을 낭비했다는 생각에 하늘이 꺼져 내리는 것 같았다. 이럴 시간에 차라리 다른 뭔가를 했더라면, 이럴 돈으로 다른 뭔가를 했더라면. 손해가 막심하다는 생각은 점점 불어나 마법사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마법사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는다. 그런데 그때,



"자네, 나와 함께 여정을 떠나보지 않겠는가? 끝나지 않는 여행 말일세."



'무슨 소리지? 아니 이건 마법사의 목소리인데.'



소년은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제자리에서 빙 돌아 한 바퀴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앞, 옆, 뒤, 좌우, 하늘에도, 땅에도. 그런데 목소리만은 또렷하게 들려왔다.



"자네, 나와 여정을 떠나보지 않겠는가?"

"누구요? 왜? 뭐 하는 거야!"



소년은 당황해서 어디서 들려오는지 모르는 목소리에게 따져 물었다. 그런데 목소리는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소년은 귀를 쫑긋 세우고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점점 또렷하게 들려왔다. 하나는 마법사의 목소리가 분명하고 다른 하나는, 바로 자신이었다. 마법사와 대화를 하고 있는 상대는 바로 여정을 떠나기 전의 소년 자신이었다. 소년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환청을 듣고 있는 것인가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분명 두 사람이 대화를 하고 있었다. 마법사는 자신에게 했던 말 그대로 여정을 제안하고 있었고, 소년의 목소리는 그 제안에 흥분하며 답하고 있었다. 가겠다고, 떠나보겠다고. 그러자 마법사는 대화 속 상대인 자신에게 말했다.



"자넨 이 대화를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이 제안은 처음이 아니네."

"처음이 아니라구요? 언제 또 제게 제안을 하셨었나요?"

"아니. 자네가 제안을 했지. 나에게. 이번 생에 자네를 만나면 꼭 여정을 떠나자는 제안을 해달라고 말이야."

"제가요? 제가 그랬다구요."

"그래. 자네가 지난 생에 말이야. 내게 그랬어. 이 여정을 꼭 제안해달라고 말이야."

"아.. 그래요? 그런 게 마법인가요?"

"아니지. 그건 약속이지."



가만히 귀 기울여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소년은 기억이 나는 것 같았다. 들려오는 대화를 통해. 이 제안이 처음이 아니었다는 걸. 맞다. 소년은 이 대화가 기억이 난다. 까맣게 잊고 있던 그것. 마법사가 소년에게 여행을 제안하던 그날의 기억. 소년은 대화를 더 듣고 싶어 귀를 더 기울였지만, 목소리들이 라디오 주파수가 겹치듯 중첩되더니 여기저기서 같은 말들이 들려왔다.



"그건 약속이지, 그건 약속이지, 그건 약속이지, 그건 약속, 그건 약속, 약속, 약속, 약, 약약약약.. 삐~익!"



중첩되던 소리가 하나로 합쳐지더니 강한 노이즈음을 내며 순간 멈춰버렸다.



"아악!"



소년은 강한 노이즈음에 귀를 막으며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자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소년이 서 있던 기차 플랫폼이 수도 없이 연속되며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플랫폼, 플랫폼, 플랫폼, 플랫폼... 그리고 그 플랫폼마다 소년과 마법사가 서 있었다. 소년에게 여정의 중단을 전달하는 마법사. '이번 여정은 여기 로마까지네.', '이번 여정은', '이번 여정은', '이번 여정은'... 그것은 마치 카피앤페이스트를 무한 반복한 듯한 모습으로 펼쳐져 있었다. 누구도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무한히. 소년은 그 끝이 어디인가 쫓아보다가 각 플랫폼의 시작점이 '파마시'에 서 있는 장면과 맞닿아 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것은 매듭처럼 플랫폼과 이어져 있었는데 그 속에는 폼클렌징을 들었다 놨다 하며 망설이는 소년 자신이 서 있었다. 그 광경을 보자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사! 사라고!"



그러나 소년의 목소리가 들릴 리 없는 것이다. 소년은 답답한 마음에 전달도 되지 않을 소리를 지르다가 그 장면의 매듭 뒤에 또 다른 장면이 이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100밀리짜리 여행용 용기를 들었다 놨다 하고 있는 또다른 자신이었다. 소년은 장면 속 자신에게 절규하듯 외쳤다.



"사! 사라고! 제발 사라고!!"



소년은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고작 100밀리짜리 폼클렌징 하나가 얼마나 비싸다고, 그것 때문에 수많은 생이 반복되어야 했단 말인가. 매번 이 지점에서 나의 생이 멈추었다니 참으로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뭐 얼마나 대단한 것이라고.



"대단하지. 대단해. 100밀리짜리 폼클렌징은 대단한 것이 아니지만, 선택을 주저하는 것은 대단하고 중요한 일이라네."



마법사였다. 사라진 줄 알았던 마법사가 소년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돌아오신 건가요?"

"아닐세. 보면 알지 않나. 이 순간도 반복되고 있는 장면일 뿐이야."

"몇 번째죠?"

"셀 수가 없지. 한 만 번쯤 되려냐? 나도 지긋지긋하네."

"마법사님은 왜 멈추지 못하시는 거죠? 다 아시고 계시잖아요."

"어쩌겠나. 선택은 자네가 하는 것인데. 나라고 뭘 강제할 수 있겠나. 이렇게 매번 당부만 하는 거지. 내 팔자가 이 모양일세."

"이 대화도 만번째 대화인가요?"

"이제 만 한번째겠지."

"지겨우시겠어요. 마법사님만이라도 벗어나실 수는 없나요?"

"나라고 뭐 다르겠나. 장면에 종속된 캐릭터일 뿐인걸. 자네의 의식과 내 의식이 연결되어 있으니 우리는 함께 성장하거나 함께 전락할 뿐이라네. 더 정확히 말하면 자네는 투사된 내 모습이기도 하지. 물론 나 역시 자네가 투사한 자네 자신의 일부이기도 하고."



마법사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고는 담배를 한대 꺼내어 물더니 소년에게도 권했다.



"한 대 피우겠나?"

"언제 담배를 피우셨습니까? 건강도 좋지 않으시다면서."

"인생 뭐 있나. 선택 아니면 죽음이고, 그 둘의 무한한 반복이지."



마법사는 빨갛게 달아오른 담배를 깊게 들이쉬고는 연기를 말아 동그란 구름을 만들어 냈다. 구름은 퐁퐁 떠오르더니 이내 공기 속으로 흩어져 버렸다.



"다 신기루 같은 거라네. 새로울 것도 신기할 것도 없는. 깨닫고 나면 이미 알던 것이고. 이미 알던 것들은 다시 사라지지. 저 연기구름처럼 말이야. 그걸 반복하는 게 인생이고. 마약 같지 않나? 같은 걸 좋다고 계속 반복하는 걸 보면. 어디 그럼 또 시작해 볼까? 자 이제 충분히 알았을 테니 다시 제안을 해보게."

"무슨 제안 말이죠?"

"이 지점에서 자네가 늘 하던 그 제안 말이야. 그래야 새로운 생이 시작되지 않겠나. 이번에는 좀,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 보자고."



소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알아버렸다. 그러나 소년은 모든 것을 다시 잊을 것이다. 생이 시작되면 모든 것이 새로워질 테니. 그러나 선택은 반복될 뿐이다. 새로운 선택으로 나아가는 것은 성장이고 성숙이다. 그러나 우주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놓아둔 채 다음 단계로의 진화를 허락하지 않는다. 시간도 공간도 없는 우주에게는 반복이 낭비가 아니니까. 소년은 이제 이 지겨운 짓을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반복은 우주에게는 낭비가 아니지만, 생명에게는 무의미한 짓일 테니. 무의미를 견디지 못하는 관념의 인간에게는 더더욱. 소년은 불현듯 반복을 강요하는 우주를 붕괴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마법사님이 제안을 해보시죠."

"내가 제안하라고? 아니 자네가 먼저, 다음 생에 자신을 만나면 다시 여행을 떠나자고, 꼭 자신에게 제안해달라고 먼저 내게 제안을 해야, 내가 다음 생에 자네에게 제안 할 수 있다니까."

"아니요. 그렇다면 전 아무런 제안도 하지 않겠습니다."

"뭐라고??"

"저는 아무 제안도 하지 않을 테니, 마법사님도 이제 자신의 길을 가시죠. 제게 묶여 계시지 말구요."



소년의 말이 끝나자, 마법사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마법사는 피우던 담배를 마저 피우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담뱃불을 구두 바닥에 비벼 끄더니, 갑자기 흐믓한 미소를 지으며 벌떡 일어나 소년의 뺨을 세차게 후려 쳤다.



철썩, 우주가 일렁였다.



"고맙네. 빚을 갚았으니, 이것으로 우리의 연이 마무리되었네. 아, 이제야 끝을 보는구만. 하하하."



마법사의 천 년 묵은 웃음이 시공간을 가득 채웠다. 드라마가 끝난 것이다. 그리고 모두 사라졌다. 소년도, 마법사도, 플랫폼들도.



_ 마법행전 2부 끝.






_ [마법행전 2부 10장] 소년의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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