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TY 100] <또 다시, 크루즈> 다시, 모험이다.

in Wisdom Race 위즈덤 레이스3 month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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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도에 리스본을 가려고 했었다. 아시아부터 유럽까지 숨가쁘게 크루즈를 타고 도착한 곳이 마침 스페인 말라가였고 그 때 탔던 크루즈에서 마침 포르투칼 부부의 연락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유럽 물가는 살인적이었고 언제 다음 배를 타고 언제 한국에 돌아갈지 모르는 나는 어떻게든 생활비를 줄여야만 했다. 염치를 무릅쓰고 메세지를 보냈다. 최대한 공손하게, 최대한 거절할 수 있는 여지가 많게. 답을 기다리며 말라가에서 리스본으로 가는 비행 편과 버스를 훑어봤다. OK 사인만 떨어지면 당장 떠날 수 있게 모든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거절이었다. 긴 메세지 안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변명이 구구절절 적혀있었다. 마음의 준비도 미리 했고 이해가 됐지만 섭섭한 마음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2주 넘게 한 배에서 먹고 자고 술까지 함께 마시며 쌓은 정은 고작 그 정도였다.

리스본을 가겠다는 계획은 포르투칼 부부 집에서 숙박비를 줄이겠다는 심산에서 비롯됐지만 그걸 예외로 두더라도 리스본은 적은 생활비로 오래 머무르기 좋은 곳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거절당했다는 마음에서 피어난 미움의 화살은 엉뚱하게도 그들의 땅으로 날아갔다. 가보지도 않은 땅, 포르투갈과 리스본이 졸지에 괘씸했고 가고 싶지 않아졌다. 그래서 물가가 싼 다른 도시, 부다페스트를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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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코로나가 사실상 옅어지고 중단되었던 크루즈 세계일주를 재개하였다. 2019년에 아시아에서 유럽까지 갔으니 이제 유럽에서 남미까지 갈 참이었다. 대서양을 건너는 크루즈를 타기로 마음을 먹고 뻥 안치고 수 백개나 되는 루트를 검토하며 가장 마음에 둔 출발지는 사실 리스본이 아닌 포르투칼의 작은 섬 푼샬이었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리스본에서 브라질로 가는 크루즈 티켓을 샀다. 크루즈 타는 날을 기다리며 리스본에서 40분 정도 떨어진 벨렝에 간 건 순전히 에그타르트 때문이었다. 맛집을 찾아 다니거나 줄 서서 먹은 스타일도 아니고, 디저트는 잘 먹지도 않지만 1837년에 개업한 세계 최초의 에그타르트 가게인 ‘파스테이스 드 벨렝’에 쏟아지는 찬사가 너무도 달콤했다. 내게도 통할지 궁금한 마음이 나를 벨렝으로 이끌었다. 지금까지 내가 먹어온 에그 타르트와는 차원이 다른 맛이었던 건 사실이었지만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벨렝에서 뜻밖에 나를 전율하게 했던 건 에그타르트를 입에 물고 길 건너가서 보게 된 발견 기념비이다. 발견 기념비는 해양왕 엔리케의 사후 500년을 기념해 바스코 다 가마가 항해를 떠난 자리에 세운 높이 52m의 거대한 조각이다. 항해 중인 범선 '카라벨'의 모양을 따서 만들어졌고 수많은 인물들이 그 안에 줄지어있다. 뱃머리 맨 앞에 위풍당당하게 서있는 사람이 해상왕 엔리케이고 그 뒤의 뒤에가 인도 항로를 개척한 바스코 다 가마이다. 그 외에 브라질을 발견한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과 최초로 세계일주를 한 탐험가 마젤란 등도 있다.

바닷길을 오래 여행하다 보면 바다에 대해 무뎌진다. 바다의 경외로움도 바다의 무한함도 익숙함 앞에서는 다 사라진다. 포르투칼에 와서, 리스본에 와서, 벨렝에 와서 대항해시대의 현장을 발로 밟고 눈으로 보며 지금까지 내가 본 바다와 다른 마음가짐으로 바다를 바라봤다. 그 바다는 탐험가들이 진격했던 바다, 대항해시대를 펼쳤던 용감한 선원들이 누비던 바다, 인도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담대하게 나아간 바스코 다 가마가 항해를 하던 바다이다. 바다를 향해 당당하게 선 엔리케 왕자의 시선은 대서양 너머의 보이지 않는 육지에 가 닿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 신께 기도하며 자비를 구하는 사람, 닻을 올리는 사람, 그 여정을 기록하는 사람, 깃발을 들어 정체성을 드러내는 사람, 칼과 방패로 바다의 적을 대비하는 사람, 역사적인 현장을 그림으로 남기는 사람이 늘어서 있고 그들 얼굴에는 하나 같이 굳은 결의가 있다. 그걸 바라보는 나의 얼굴에도 역시 굳은 결의가 떠올랐다. 나는 속으로 조용하지만 다부지게 외쳤다.

‘나는 해상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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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다의 왕이 된다는 것은 그들처럼 신대륙을 발견하거나 정복하거나 하는 의미는 당연히 아니다. 그저 꿋꿋하게 바다에 서서 그저 바다가 전해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저 바다를 누비는 것일 거다. 그들의 항해 여정을 쫓으며 대서양을 따라 걸었다. 갈매기들은 금방이라도 부딪힐 것 처럼 낮게 날고 바다는 윤슬로 반짝였다. 바다 위에서 번쩍 번쩍 춤을 추는 빛가루들은 크고 넓고 빠르게 움직여 마치 미러볼 같았다. 그 빛에 중독 될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하며 조금 더 걸으니 바스코 다 가마의 위대한 발견을 기념하는 벨렝탑에 도착했다. 벨렝은 대서양으로 대항해를 떠나는 내게 해상왕이 되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선물했다. 돌이켜보니 내가 지난 번에 리스본을 가지 않고 이번에 포르투칼을 오게 된 건 예정된 일이었단 생각이 든다. 멋모르고 리스본에 갔다면 이 전율은 결코 내게 오지 않았을 것이다. 리스본에서 브라질로 떠나는 여정을 앞둔 이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다. 익숙했던 바다가 다시 낯설어졌다. 나는 대서양 위에서 지는 해를 가만히 바라보다 눈을 감고 바다를 진격하는 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다시, 모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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