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1/07(수) 김부식의 무식함덕에 밝혀진 고구려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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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식은 고구려나 백제의 역사를 깍아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재위연도가 긴 왕에 대해서는
몇년에 한번 정도 기록을 하면서

눈이 왔다.
사슴을 잡았다.

같은 방식으로 기록했다.
과장좀 보태면

00년, 화장실에 다녀왔다
5년후 하품했다.

이런 식이다.
그러다가 문득 이웃나라와 싸움이 붙어서
패했다는 기록이 있으면
아주 상세하게 기록을 남겼다.

과장을 더하자면

이웃나라의 하늘의 명을 받은 황제가 와서
왼쪽뺨에 붙은 사마귀를 세번 찔렀다.

같은 수준으로 역사를 깍아내리고
상대편 나라를 치켜세우는 내용으로
<삼국사>를 채웠다.

그런데 역사에 무지하다보니
본의 아니게 실수를 했으니

고구려의 서쪽 경계가 어디 쯤이었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을 아주 상세하게 남긴 것이다.
요즘 국회의원들이 헛소리 하다가 본인의 무지를 폭로하는것과 유사하다.

삼국사三國史 고구려본기 제5 미천왕(美川王)
20년(319) 겨울 12월에 진(晉)의 평주자사 최비(崔毖)가 도망쳐 왔다.
처음에 최비가 은밀히 우리와 단씨(段氏), 우문씨(宇文氏)에게 말하여 함께 모용외를 공격하게 하였다. 세 나라가 나아가 극성(棘城)을 공격하자 모용외가 성문을 닫고 지키며 오직 우문씨에게만 소고기와 술을 보내 대접하였다. 두 나라는 우문씨가 모용외와 모의가 있다고 의심하고 각기 병력을 이끌고 돌아갔다.
우문씨의 대인(大人) 실독관(悉獨官)이 말하기를, “두 나라는 비록 돌아갔지만 나는 홀로 이를 빼앗겠다.”라고 하였다. 모용외는 그 아들 황(皝)과 장사(長史) 배의(裵嶷)에게 정예 병력을 거느리고 선봉에 서게 하고, 자신은 대군을 거느리고 그를 따랐다. 실독관이 크게 패하고 자신만 겨우 도망하였다. 최비가 이를 듣고 그 형의 아들 최도(崔燾)로 하여금 극성(棘城)으로 가서 거짓으로 축하하게 하였다. 모용외가 군사를 이끌고 맞이하니, 최도가 두려워서 자복하였다. 모용외가 최도를 돌려보내고 최비에게 일러 말하기를, “항복하는 것이 상책이고, 달아나는 것이 하책이다.”라 하고, 병력을 이끌고 그를 따라갔다. 최비는 수십 기의 기병과 함께 집을 버리고 〔우리에게〕 도망쳐오고, 그 무리는 모두 모용외에게 항복하였다. 모용외가 아들 모용인(慕容仁)을 요동에 진수하게 하니 관부(官府)와 저잣거리가 예전과 같이 평온해졌다. 우리의 장수 여노(如孥)는 하성(河城)에 웅거하고 있었는데, 모용외가 장군 장통(張統)을 보내 습격해서 그를 사로잡고, 그 무리 1천여 가를 포로로 잡아 극성으로 돌아갔다. 왕이 자주 병력을 보내 요동을 침략하였다. 모용외가 모용한과 모용인을 보내 이를 쳤다. 왕이 화해[盟]를 청하니 모용한과 모용인이 돌아갔다.

김부식은 역사에 무식했던 탓에
이 기록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했다.

여기서 모용씨는 나중에 고국원왕 시절에 고구려를 공격해서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쳤다는 용맹한 선비족이다.
그런데 그 모용씨를 고구려, 우문씨, 단씨가 합세해서 공격했다는 뜻이다.
기존 역사책에서는 고구려가 지금의 한반도와 만주에 있었다고 말하고
모용씨가 요녕성을 포함한 현 중국의 하북지방을 차지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후조107.jpg

역사기록을 보면, 모용씨와 단씨, 우문씨는
그림에서 표시한 위치에 있었다.
후조를 세운 석륵과 교류,전쟁한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말이되는 역사다.
이들과 전쟁했던 고구려의 서쪽 경계는 어디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