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아빠의 카톡 프로필 사진을 보고 정말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다. 내가 막 부모님 집에서 독립을 했을 때니 2년 전쯤이었을 것이다. 아빠는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의 표지를 사진으로 찍어 카톡 프로필로 해 두었다.
뜨끔, 했다. 내 방(독립을 한 이후에도 내 방은 내 방으로 남았고 나는 일주일에 한두 밤은 그곳에서 보낸다) 책꽂이 한쪽에 꽂혀 있어야 하는 책이 어떻게 아빠 손에 들어갔으며 아빠는 왜 그걸 사진으로 찍기까지 했을까.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의 1장과 2장의 제목은 무려, ‘부모를 버려라, 그래야 어른이다’, ‘가족, 이제 해산하자’였다. 어렸을 적부터 우리 아빠가 주창해 온 가치와는 전혀 다른 방향의 이야기였으며 설사 아빠의 가치관과 맞다 할지언정, 그래도 최소한의 자식 된 도리로서 이 책을 소중히 품고 있었다는 게 괜스레 미안해졌었다.
책의 저자 마루야마 겐지는, 부모란 작자들은 한심하다, 별 생각 없이 당신을 낳았다, 낳아 놓고는 사랑도 안 준다, 노후를 위해 당신을 낳은 거다, 그러니 당장 집을 나가라, 하고 이야기한다. 따지고 보면 어디 하나 틀린 곳 없는 말이겠지만, 그래도 동방예의지국에서 대놓고 이야기하기엔 어쩐지 민망한 구석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 맏이가 잘돼야 동생들도 잘된다, 맏이는 부모 대신이다, 같은 말들을 귀에 딱지가 앉게끔 들어왔던 나로서는 이 책에 끌리지 않을 수 없었고 어느 날 밤인가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그런데도 이 책이 자리했던 곳은 책상 윗부분에 딸린 눈에 띄는 책꽂이가 아닌, 방 가장자리의 책꽂이였다. 그것도 크기가 큰 다른 책들 사이에 살짝 숨겨 놓듯 두었던 것이다.
마루야마 겐지는 이 세상을, 편안하지 않은 공간, 우리가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저절로 불행해질 공간으로 바라본다. 어차피 우리는 죽는다, 우리 앞에 펼쳐질 가장 분명한 사실은 죽음이다, 그런데 삶이 뭐가 두렵겠는가, 하고 이야기한다.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라는 외침과 함께.
그렇게, 부모도 가족도 필요 없다고 주장하며 내 배는 내 힘으로 채우자고 말한다. 직장인은 노예이니 자영업자가 되라고 말하며 국가는 당신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으니 애국심 같은 쓸데없는 감정에 휘둘리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이 책을 잘못 읽었다가는 마루야마 겐지가 삶을 비관적으로만 바라본다고 여길 수 있다. 나 또한 처음엔 그렇게 오독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지, 인생 따위 엿이나 먹여 버리고 그냥 되는 대로 살다가 죽자는 건가, 하고 말이다.
그런데 마루야마 겐지의 거친 문장들을 느릿하게 읽어 내려가다 보면 그가 어느 누구보다 생의 의지로 가득 찬 사람임을 알 수 있다. 한 번 사는 인생 고독할지언정 자유롭게, 개인의 가능성을 충분히 발현하며 살아 보자고 기운찬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모든 뜻이 이 한 문장에 담겼다.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책의 각 장은 이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설 연휴, 집에 친척들이 왔고 할아버지께서 며칠 내 방에 머무르셨기 때문에 나는 꼼짝 없이 안방에 갇혀 있는 신세였다. 집 주인들의 맏이로서 적정한 인사치레가 끝난 것 같으면 슬쩍 안방으로 향했다. 그렇다고 대놓고 내 방에서 책 같은 걸 가져갈 순 없었다. 안방에서 TV나 보고 껄껄 웃다가 낮잠이나 자 볼까 하는 마음이었는데 아빠의 책꽂이에서 하필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가 보이는 게 아닌가. 아빠는 심지어 이 책을 내 방에서 당신의 방으로 옮겨 놓기까지 했다. 2년 전, 아빠가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라는 문장이 한눈에 들어오는 사진을 카톡 프로필로 해 두었을 때부터 아마 책은 줄곧 안방에 있었을 거였다.
어차피 갇힌 신세에 인생 따위를 어떻게 엿 먹이는지 한 번 더 읽어 볼까 하고 책을 들었다. 예전에는 마루야마 겐지의 거침없는 입담이 좋아서 홀리듯 빠르게 읽었는데 다시 보니 시선을 오래도록 잡아두는 부분이 많았다. 무엇보다 내가 최근, 죽음과 관련된 생각을 자주 했고 죽음을 주제로 한 책(어떤 책인들 그렇지 않겠느냐만)을 종종 읽었기 때문에 마루야마 겐지가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흥미로웠다. 마루야마 겐지는 “삶은 쟁취하고, 죽음은 가능한 한 물리쳐라.”라고 말하고 있었다.
고색창연하지만 여전히 설득력 있는 ‘죽음’이라는 숙명의 그림자에 겁을 먹고 그때마다 생의 일부가 훼손되어 앞날을 폐기물이 되기 위한 것으로 정의하고 자포자기하는 것은, 절대 삶을 헤쳐 나가려는 생명과 보편적인 혼을 지닌 자의 태도가 아니다. 죽음 앞에서 움츠러들어 이성을 포기하고, 얼어붙어 있는 것은 바른 길을 벗어난 태도다. 그것은 존재하기를 바라는 소망을 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무(無)의 배후로 숨는 일이며 이는 아직 죽지 않았는데 죽은 자로 행세하는 것이나 같다. - 195p
나는 그동안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죽은 자로 행세해 왔던 것이다. 나는 왜 영원히 존재하길 바라면서도 존재하기를 바라는 소망을 버렸던 걸까. 왜 죽음 앞에서 움츠러들어 이성을 포기했던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잠의 세계로 빠지며 눈이 스르르 감겼다.
친척들의 잔소리도 어찌어찌 흘려듣고 차례를 지내고 설거지를 몇 번 하니 연휴의 끝자락이었다. 집에서 나오려는데 아빠가 참고 있던 말을 꺼냈다.
“네 친구들 다 좋은 사람 만나서 잘 사는데 너는 혼자 이게 뭐냐. 아까 할아버지 말씀 못 들었냐. 너 지금 시집 안 가면 이제 다시는 가고 싶어도 못 간다.”
나도 더는 예전의 내가 아니었기 때문에 나긋한 목소리로 대들었다.
“내 친구들은 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자랐고요. 엄마아빠가 누굴 만나든 크게 신경 안 썼어요. 아빠, 내가 어떻게 컸는데요.”
내가 정말 어떻게 컸던가. 남자친구를 만나는 것 같은 낌새가 있으면 엄마는 집에 언제 들어오냐며 전화했고 아빠는 남자친구는 나중에 만나라고, 때 되면 다 짝 만나서 결혼한다고 했다. 중고등학생 때 이야기가 아니고 대학생 시절 이야기, 심지어 그 이후의 얘기다. 그런데 이제 와서 웬 결혼?
언젠가 엄마는, 다른 집 애들은 엄마한테 남자친구 자랑도 하고 그런다던데 너는 왜 그런 얘길 안 하니, 하고 물었다. 우리 집이 언제 그런 게 허용됐던 분위기였던가. 나도 억울한 거 많다.
아빠가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를 어떻게 읽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무언가 마음에 주는 울림이 있어 카톡 프로필로까지 설정해 둔 게 아닐까. 하지만 어디까지나 책은 책. 현실로 돌아와서 자신과 가족의 삶에 마루야마 겐지의 멋진 가르침을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나 역시도 주저하게 되고 우리 아빠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을 내게 준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 사람을 선배라고 칭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선배 사무실에 들렀는데, 선배가 선물이라며 이 책을 꺼내 건넸다. 자신이 좋아하는 책이라며.
나는 그때 마루야마 겐지가 누군지,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란 책이 어떤 내용인지 알 길이 없었고 볼일을 끝내고 고민을 털어놨다.
“요즘 집에서 나오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 선배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야, 결혼할 때까지 집에서 그냥 살아. 돈 많이 든다.”
Cheer Up!
정말 돈 많이 듭니다. 예전에 독립했을 때가 생각나네요.
숟가락 젓가락 없어서 다이소 가서 샀습니다.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밥그릇도 없더군요.
다시 다이소 갔다왔습니다.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국자도 없더군요.
다시 다이소 갔다왔습니다.
집에 와서 보니 화장실에 슬리퍼가 없더군요.
다시 다이소 가서 비누 샤워타올 등 닥치는대로 눈에 보이는대로 다 샀습니다.
하하하하.
집에 와서 보니 가스렌지가 없더군요.
ㅋㅋㅋㅋㅋ
물론 밥솥도 없더군요.
아,,,
전기밥솥 중고로 사고 밥을 해먹었습니다.
그런데 세탁기도 없더군요.
ㅋㅋㅋㅋ 아,,, 정말 도는 줄 알았습니다.
ㅎㅎㅎ 저도 괜히 돈 없다며 벌벌 덜다가 몇 달 동안 국자 하나 가지지 못했었어요. 집에 당연히 있는 물건들을 사야 한다고 생각하니 어찌나 아깝던지요. 그런 걸 사 볼 생각을 안 해 봐서 그런지, 세제, 비누, 치약 등 모든 게 제 생각보다 비싸더라고요. 그래도 지금은 나름대로 적응해서 잘 살고 있어요ㅎ 댓글 감사합니다^^
생활 집기라는게 가격은 싼데.... 모아 놓으면 엄청난... ㅡㅡ;;
맞아요~ 그냥 한 사람이 살아만 가는 데 필요한 게 꽤나 많은 것 같아요ㅎ
글 읽으면서 많이 공감했어요.. 특히,
이 부분. 몇몇 부모님들은... 자식의 나이대에 따라서 가치관이 급격히 변하시나봐요 ^^;
ㅎㅎㅎㅎㅎㅎㅎ앗.. 댓글을 읽고 웃음이 터졌어요. 저희 부모님은 확실히 제 나잇대에 따라 가치관이 급변하신 것 같으네요.
글 읽어 주시고 유쾌한 댓글 달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감해 주신 것 같아서 좋아요.
문득, 오토바이로 고속도로를 역주행하는 책, 봐라 달이 뒤를 쫒는다 가 생각납니다.. 저 책도 보고 싶군요..
그리고, 글이 정말 쏙쏙 들어옵니다 ~
저는 마루야마 겐지의 책을 저 책 말고는 읽어 보지 못했어요. 앞으로 차근히 하나씩 읽어 보려고 해요. 봐라 달이 뒤를 쫓는다도요. 제 글 좋게 읽어 주셨다니 감사합니다. ^^
어랏. 이거 제가 좋아하는 책인데, 탐라에 보여서 깜놀했네요~ 아버님도 이거 읽으시고 많은 생각을 하셨을 것 같아요~
저도 이제 이 책을 좋아한다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빠는 아마 책을 읽고 깜짝 놀라셨을 거예요. 그래도 저는 아빠가 이 책을 읽었다는 것만으로도 왠지 기분이 좋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제 글 관심 갖고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읽어보고 싶은 책이네요
어차피 한 곳으로 귀결되는 인생이라면
그까짓 거 확 멋지게 살아버리죠 뭐...
kr최신글 보다가 애플포스트님의 포스팅을 만나다니
오늘 제가 참 운이 따르는 날인가봐요^-^
앞으로 자주 뵙고 싶어요!!
그러게요, 어차피 우리가 갈 곳은 한 곳뿐인데 멋지게, 재밌게 살면 좋겠어요. 기분 좋아지는 댓글 정말 감사해요. 기운이 나는 걸요!
저도 종종 놀러 가겠습니다. 반갑습니다.^^
@홍보해
한국정서와는 다르지만, 그저 그렇게 살지 않기 위해서는 생각해 봐야하는 책인것 같네요^^
잘 읽었습니다
보팅드리고 갑니다!
읽을 때보다 읽고 나서 많은 생각이 드는 책인 것 같아요.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애플포스트님 혹시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라는 영화 보셨나요? 글을 읽으면서 그 영화가 생각나네요. 안보셨다면 추천작입니다~
지금 막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가 어떤 영화인지 찾아보고 왔어요. 리뷰랑 스틸컷을 보니 참 매력적인 영화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렇게 또 볼 것 리스트에 하나가 더 추가됐네요. 스팀잇 하면서 볼 것들이 넘쳐 나요. 제 글 읽어 주시고영화까지 추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천 받고 추천 하는 거 정말 좋아해요!
마루야마 겐지의 존재론은 인류의 기원에 닿아있습니다. 그의 사고는 항상 존재의 심연에서 출발하여 죽음으로 가닿습니다. 그 사이 공간은 마루야마 겐지가 기거하는 혼돈의 공백입니다. 그는 알베르 까뮈같은 반항적 문학가입니다. 인생의 허망함을 정면으로 직시하고 삶의 생동감으로 저항하는... 실존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문학가입니다. ^^ 좋은 글 잘 읽고, 리스팀합니다. 팔로우도.
리스팀까지! 감사합니다..!! 마루야마 겐지의 글을 더 읽으면서 작가에 대해 탐구해 봐야겠단 생각이 듭니다. 스팀잇에 글을 쓰면서 많이 생각하고 배우게 되네요. 짧은 댓글로도 말이에요. 감사합니다^^
돈 많이 든다... ㅠ.ㅠ
부모님의 집에 거하는 것 자체도 수익성 논리로 따지는게 슬프네요.
그게 또 그렇게 읽히네요. 그리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슬픈 일인 것 같단 생각도 들고요.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글 읽어 주시고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