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여덟 시

in #kr2 years ago (edited)

평소보다 일찍 눈 뜬 새벽, 창밖을 보니 새벽 내내 비가 와있었다. 좀 더 자고 싶어 핸드폰을 잡고 삼십 분 뒤척였다. 결국 실패. 청계천이나 갈까 하고 다섯 시부터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스트레칭을 하다 보니 아직 밖에 비가 오고 있는 것을 알게 됐다. 운동도 못 가겠구나 싶었다. 헬스장이라도 갈까 하다 비 오는 고요한 새벽을 고스란히 즐기기로 했다.

평소라면 빼곡히 지켜야 할 아침 루틴이 있지만 가볍게 건너뛰고 오버워치 리그를 봤다. 새벽부터 경기 보는 일은 없는데, 어제 저녁에 보다 만 경기가 꽤 흥미진진했던 탓에 그 뒤가 궁금했다. 꼴등을 다투는 하위권 두 팀의 경기였는데, 처음엔 시시했지만 집중해 보다 보니 예측을 벗어나는 기묘한 경기 흐름과(이겨야 하는데 지고 져야 하는데 이긴다) 그들 나름의 필사적인(이 팀만큼은 꼭 이겨야 한다) 의지가 보여 평소와 다른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경기는 짧게 끝났다. 뭘 해야 하나 망설였다. 아직 여섯 시, 창밖은 캄캄하다. 창이 동쪽이 아닌 것이 늘 아쉬웠는데, 오늘은 해가 늦게 뜨는 것이 오히려 고맙게 느껴진다. 캄캄한 새벽에 잠겨 마인크래프트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몇 주 전 최소 사양으로 오버워치가 돌아가는 노트북을 방에 들이게 돼 그 후로 마인크래프트와 오버워치를 하루에 한 시간 정도 하고 있다. 정신이 없어 며칠 마인크래프트를 못 했는데, 오랜만에 게임을 켜고 갓 꾸미기 시작한 내 마을을 하나둘 정리하기 시작했다. 광산에 갈 생각이었지만 잡다한 일들을 하다 보니 금방 시간이 지나갔다. 나무를 캐고, 농사를 짓다 다음을 기약하며 게임을 껐다.

시간은 일곱 시였다. 평소와 다른 흐름으로 흐르는 기묘한 시간.

오늘은 오후에 일정이 있어 아침에 조금이라도 평소 하는 일들을 정리해두어야 한다. 샤워를 한다. 평소라면 소리 없이 씻었겠지만, 오늘은 왠지 조용한 음악을 틀어놓고 싶었다. 좋은 음악을 듣고 싶지만 고심하긴 싫어 지겹게 들은 키스 자렛의 <The Melody At Night, With you>를 틀었다. 씻고 나와 가습기를 살펴보니 물이 거의 닳지 않았다. 비가 왔으니 건조할 걱정은 없겠구나 싶어 미뤄둔 가습기 청소를 시작했다. 가습기 청소는 늘 서툴다. 보통 베이킹소다나 구연산을 이용해 깨끗이 닦던데, 그것을 집에 들이기도 싫고 그렇게까지 하는 것이 왠지 거창해보인다. 나름대로 열심히 면봉으로 보이지 않는 곳까지 물때를 닦지만 개운하진 않다.

가끔 들리는 축축한 도로를 미끄러지는 자동차 소리와 살짝 열어둔 창틈 사이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 나직하고 영적인 키스 자렛의 연주. 공연히 키스 자렛의 안부를 걱정하며 다음번엔 가습기를 좀 더 깨끗하게 닦아야겠다고, 필요하다면 베이킹소다 같은 것도 기꺼이 사두겠다고 다짐해본다. 아직 여덟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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