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위험한 책』 - 크리스토퍼 B. 크레브스
가장 위험한 책 - 크리스토퍼 B. 크레브스
로마 제국부터 나치 독일까지, 《게르마니아》 오독의 역사
사실 이 책은 부제보다 제목에 끌려서 골랐다.
《가장 위험한 책》.
도대체 어떤 책이기에 ‘가장 위험한’이라는 표현까지 붙였을까? 처음에는 종교나 정치와 관련된 위험한 사상서인가 싶었다. 그런데 책을 펼쳐보니 이야기는 의외로 98년경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가 쓴 약 30쪽 분량의 짧은 책, 《게르마니아》에서 시작한다.
처음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든 의문은 이것이었다.
98년의 게르만인과 1900년대의 독일인은 정말 같은 민족인가?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타키투스가 당시 ‘게르만인’이라고 기록한 사람들이 과연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독일인을 의미하는 것일까?
저자인 크리스토퍼 B. 크레브스 역시 바로 이 질문을 따라간다.
《게르마니아》는 오늘날의 민족지학이나 역사학의 관점에서 쓰인 책이 아니다. 타키투스는 알프스 북쪽 지역을 직접 여행한 경험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가 관심을 가졌던 것도 게르만 사회의 객관적인 실태라기보다는 로마 사회를 바라보는 하나의 거울로서의 ‘게르만인’이었다.
즉 《게르마니아》는 게르만인을 위해 쓰인 책도, 게르만인의 자기소개서도 아니다.
로마에서, 로마인을 위해, 로마인이 쓴 책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짧은 책은 이후 1500년 가까운 시간을 건너뛰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다시 읽히고, 재해석되고, 때로는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이용된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이 책의 제목인 ‘가장 위험한 책’이라는 말이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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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은 바이러스처럼 퍼진다
책을 읽으면서 계속 떠올랐던 생각이 있다.
사상은 바이러스와 비슷하지 않을까?
어떤 시대에 만들어진 하나의 생각은 그 시대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후대의 사람들이 그것을 읽고, 자신의 상황에 맞게 해석하고, 필요한 부분을 강조하거나 변형한다. 그렇게 변형된 생각은 다시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원래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것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게르마니아》가 바로 그런 사례였다.
98년경 쓰인 이 책은 오랫동안 크게 주목받지 못하다가 15세기 이후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다시 발견된다. 이후 신성로마제국과 독일 지역의 지식인들에게 《게르마니아》는 단순한 고대 로마의 기록이 아니라 ‘독일인의 기원’을 설명해줄 수 있는 고대의 증거처럼 받아들여지기 시작한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타키투스가 묘사한 ‘게르만인’은 당시 로마인이 바라본 북쪽의 여러 부족과 사회에 대한 기록이었다. 하지만 후대의 사람들은 이 기록을 점점 더 넓은 의미의 ‘독일 민족’에 대한 설명으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게르마니아》에 등장하는 특정한 표현들이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게르만인은 자유롭고 용맹하며 순수한 민족이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이러한 이미지가 독일인의 정체성과 결합하기 시작한다. 결국 고대 로마인이 특정한 시대와 목적을 가지고 기록한 하나의 텍스트가, 수백 년 뒤 독일 민족의 ‘본질’을 설명하는 문서처럼 변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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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기록이 민족주의의 근거가 되기까지
이 과정은 근대에 들어 더욱 강해진다. 독일 지역에서 공동의 ‘독일 민족’과 ‘독일 조국’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지고, 인문주의자와 종교개혁자들은 고대의 게르만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특히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던 독일 지역에서 고대 게르만인의 이미지는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우리는 오래된 민족이다.
우리는 로마에 정복되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고유한 정신과 전통이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단순한 역사적 사실을 넘어 민족적 자긍심을 만들어내는 서사가 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 서사는 점점 더 극단적인 방향으로 흘러간다. 게르만인의 ‘순수성’과 ‘고유성’이라는 개념이 인종에 대한 이야기와 결합하고, 아리아인이라는 개념과 함께 인종적 우월성에 대한 사상으로 발전한다. 결국 이러한 관념은 근대의 국수주의와 결합하고, 훗날 나치즘의 인종주의적 세계관을 구성하는 데까지 이용된다. 물론 《게르마니아》 자체가 나치즘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이 보여주는 무서운 점은 하나의 텍스트가 시대를 거치면서 얼마나 다른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는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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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위험한 것은 책이 아니라 ‘읽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책을 읽고 나니 제목에 대해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정말 위험한 것은 《게르마니아》라는 책 자체가 아닐지도 모른다.
더 위험한 것은 자신이 원하는 답을 이미 정해놓고 책을 읽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타키투스가 게르만인을 어떻게 묘사했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수백 년 뒤 사람들이 왜 그렇게 읽었는가이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부분을 가져오고, 불편한 부분은 무시하고, 역사적 맥락을 제거한 뒤 그것을 ‘민족의 본질’이라고 선언하는 순간, 역사적 기록은 더 이상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신화가 된다.
그리고 신화는 현실의 문제를 설명하는 데 상당히 강력한 도구가 된다.
정치적 실패는 민족의 위대함을 되찾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고, 사회적 갈등은 외부의 적을 만들어 해결할 수 있으며, 현재의 불만은 과거의 영광을 소환하는 것으로 위로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우리’와 ‘그들’의 경계가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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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도 낯선 이야기는 아니다
책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우리나라의 역사와 민족주의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다. 사실 자신의 뿌리에 자긍심을 갖는 것 자체가 나쁜 일은 아니다.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과거의 문화와 역사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우월성’과 ‘타인의 열등함’으로 연결되는 순간 이야기가 달라진다.
특히 ‘순혈’이라는 개념은 역사적으로도 상당히 허약한 개념이다. 게르만인이라고 해서 하나의 순수한 혈통으로 이루어진 집단이 아니었고, 오늘날 독일인 역시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집단의 이동과 혼합을 거쳐 형성된 사람들이다.
우리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단일민족’이라는 표현 역시 역사적·유전적 현실을 엄밀하게 설명하는 개념이라기보다는 오랜 시간 동안 만들어지고 강화된 하나의 민족적 서사에 가깝다.
생각해보면 인류 전체의 역사도 결국 그렇다.
인류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모두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하나의 종에서 시작했고, 이후 수만 년 동안 이동하고 섞이고 분리되면서 오늘날의 다양한 집단을 이루었다.
그런 의미에서 ‘순수한 민족’이라는 개념을 끝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질문 자체가 이상해진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순수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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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우리에게 답을 주기보다 질문을 던져야 한다
《가장 위험한 책》은 단순히 《게르마니아》라는 고대 문헌의 역사를 설명하는 책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이 책은 우리가 역사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역사책에 쓰여 있는 문장이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쓰였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 문장이 수백 년 뒤 누군가에 의해 다시 인용될 때, 어떤 맥락이 사라지고 어떤 의미가 새롭게 덧붙여졌는지도 살펴봐야 한다. 특히 ‘민족의 본질’, ‘우리의 고유한 정신’, ‘순수한 혈통’ 같은 말이 등장한다면 한 번쯤 멈춰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 이야기는 정말 과거의 사람들이 우리에게 남긴 것일까?
아니면 현재의 사람들이 과거에서 찾아낸 것일까?
타키투스가 98년에 쓴 짧은 책 한 권이 1,500년이 넘는 시간을 건너가며 전혀 다른 의미로 읽혔던 것처럼, 우리가 지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역사적 서사 역시 언젠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게르마니아》의 내용 자체가 아니라 하나의 생각이 인간에게 전달되고, 변형되고, 재해석되면서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갖게 되는가였다.
책은 위험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책을 읽는 방식은 때때로 위험할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가장 위험한 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중요한 경고인지도 모르겠다.

beo님은 수학자시면서 글도 어쩜 그리 잘 쓰시는지….
같은 책 읽고 와 닿는 문장이 제각기 다르듯, 고전에서 뽑아내는 정신도 제각각이군요.
말씀하신대로 글이 중복되네요.
0.00 SBD,
0.54 STEEM,
0.54 SP
반복된 부분 수정 완료했습니다!
사실 저를 단순히 ‘(응용)수학자’라고 표현하기보다는, ‘이론쟁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어요. ㅎㅎ
조금 더 유연한 사고를 키우고,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읽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다만 아쉽게도 역시 문학 작품 쪽으로 독서의 영역을 넓히는 건 쉽지 않네요.
그래도 다행히 @dozam님이 올려주시는 문학 작품 리뷰를 보면서 조금씩 친숙해지려고 노력 중입니다~ 항상 좋은 글들 올려주셔서 감사해요!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저야말로 제일 만만한 소설책이나 읽고 있지요.
수학 과학 책은 넘겨보지도 못해요.
beo님 글 보며 감탄만 한답니다. ㅎㅎ
Upvoted! Thank you for supporting witness @jswit.
글이 한번에 안 올라가서(포스팅 권한 오류) 계속 수정 되는 파트까지 반복적으로 붙이면서 업로드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