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와인

in #krsuccess19 hours ago

글쎄, 와인을 본격적으로 진지하게 마시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 한 5~6년 전?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영화 ‘멜랑콜리아’ 덕분이었어. 지구를 산산조각 내는 무시무시한 행성이 근접하는데 아직 그 위험을 모르는 주인공들이 그 행성을 구경하면서 레드 와인을 마시는 장면이 어찌나 근사해 보이던지.

응? 레드 와인이 아니라 화이트 와인이었다고? 그랬나? 모르겠네. 하지만 화이트 와인은 그런 자리에 어울리지 않아. 피처럼 걸쭉하고 검붉은 레드 와인이어야만 해.

왠지 영화처럼 내가 죽기 전에 지구 멸망까지는 아니라도 인류 멸망을 볼 것 같은 생각이 아주 강하게 들어. 인류가 싹 죽어 없어진다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사회를 지탱하는 제도가 어떤 계기나 사건으로, 이를테면 핵전쟁, 외계인 등장, AI의 폭주, 전염병, 기후 재난 같은 걸로 깡그리 무너지는 거지. 가장 먼저 닥치는 건 식량 부족. 그래서 그날이 오면 가장 좋아하는 와인을 마지막으로 열어서 인류 멸망을, 인간 사회의 파괴를 지켜보며 인간과 나의 소멸에 축배를 드는 거지.

뭐라고? 왜 그렇게 인간을 싫어하냐고? 아니야. 난 실은 성선설을 믿어. 인간 개개인은 다 착하다고 생각해. 난 인간을 혐오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조건에 대해, 인간을 이루는 외적인 장치를 혐오하는 거야. 물론 그런 조건과 장치를 만든 게 인간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인간이 악한 건 아닌 거 같아. 그저 조금 무지해서, 지적으로 연약해서 그런 거 같아.

그래서 선택한 인류 멸망 와인이 뭐냐고? 아직 정하진 못했어. 빨리 찾아야 하는데, 하지만 프랑스 와인은 아닐 거야. 가성비가 떨어져서 좋은 프랑스 와인을 많이 마셔보질 못했어. 오히려 마지막 날에는 만 원대 스페인 와인을 먹을지도 모르겠어. 이만 원이 안 되는데도 너무 맛있어서 꽤 자주 마셨거든. 마지막 날에는 나를 가장 즐겁게 해 줬던, 가장 익숙하고 편안한 그 와인을 마실지도 모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