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부장의 라떼]008. 출사표 - 마케팅팀 엠주임이 갑자기 마라톤 출전하게 된 이야기

in #stimcity2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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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출근퇴근 반복되는 업무와 일상이 내 자아실현과 멀어지고 있는 느낌이 드는 회사원.

매일 독서 1페이지씩하기, 영어공부 하기, 주 2회 운동하기 등 수많은 목표를 야심차게 세워보지만 어느새 쇼파와 한몸이 되어 있는 스스로를 보며 자괴감에 빠지고 있는 당신.

누군가 제발 내 멱살을 잡아 채서 정신좀 차리게 해줬으면 좋겠다. 어디 작심삼일을 피해갈 뾰족한 수 없나? 방법을 찾고 있는가?

앗, 내 얘기잖아. 하는 여러분들에게 아래의 글이 도움이 될 수 있다.

나는 현재 스포츠 의류, 신발, 용품을 만드는 회사에 다닌다. 스포츠 “패션” 회사라고도 불릴 정도로 실제 상품의 매출의 큰 부분이 일반 소비자들의 패션 목적 구매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스포츠 회사는 스포츠 회사다. 경기력을 높히는 데에 필요한 기술을 개발하는 데에서 출발하여 여러가지 다양한 디자인의 의류, 신발, 용품에 적용하면 일반 대중용 상품이 탄생한다. 상품의 첫째 강점은 어쨌든 경기력을 높이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스포츠 회사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해당 스포츠의 경기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상품을 만들고 프로 및 아마추어 선수들을 만족시키는 일이다. 이는 곧, 어떤 것이 경기에 도움이 되고 저해가 되는지를 알아야하고, 그 스포츠를 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요인이 무엇인지 알아야함을 의미한다. 소비자 조사를 통해 관련 지식을 얻을수 있고 선수들의 피드백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알아 낼 수 있다. 하지만 결국 본인이 그 운동을 해보지 않으면 정확히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나의 첫 직장은 “러닝”을 기본 카테고리로 하는 스포츠 브랜드였다. 일반적 수준의 조깅정도는 하는 사람이었고, 비교적 운동을 좋아하는 나였기에 마케팅 담당자로서 초기 업무를 하는데에는 큰 무리가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한계를 느꼈다. 메인 타겟이 되는 소비자들에는 나같은 일반 조거들도 있었지만, 마라톤출전과 기록 향상을 목표로 하는 비교적 매니아층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러너들도 큰 비중을 차지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회사 내에 마라톤을 취미로 하는 직원들의 의견은 언제나 조금더 비중있게 여겨졌고, 경청되었고, 의사결정에 반영되는 분위기도 있었다.

조용히 매일 조깅을 해보려했다. 작심삼일 이었다. 주말마다라도 뛰어보려 했다. 귀찮았고 졸렸고 지겨웠다. 무엇보다도 정말 달린다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었다. 일년이 흘렀다. 마라톤은 커녕 5키로도 헉헉거리는 수준이었다.

그냥 그럭저럭 회사를 다닐수도 있었다. 뭘 굳이 달리기를 해야하냐 는 생각으로 맡은 일만 잘해도 됬었다. 그렇지만 마음속에 왠지모르게 계속 짐이 되었다. 내 자신이 러너가 아니고서야 러너고객을 만족시킬 수 없다라는 막연한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

이런식으로는 안된다. 어느날 아침 출근해서 노트북을 켜고 전 직원에게 이메일을 썼다.

제목은 “출사표”
내용은 “배수진을 치지 않고서는 영원히 실행하지 않을 것 같아서 여러분 모두에게 선언을 합니다. 저는 1년내에 풀코스 완주를 하겠습니다. 많은 격려와 응원 부탁드립니다.”

완연한 관종짓이었다. 아직 대리도 되기 전이었으니 팀장님과 사장님까지 모두 포함시킨 전직원 메일로 저따위 개인적인 각오를 공표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정말 미쳤다.
하지만 다행히, 아무도 내 면상에 비난을 하진 않아주셨고, 팀장님은 폭소를 하며 놀려주셨으며, 생전 말한마디 섞지 않을 타팀의 팀장님들이 지나가며 꽤 진지한 응원도 해주셨다.

출사표는 효과가 만점이었다. 나는 이제 진짜 마라톤 완주를 못하면 쪽팔려서 회사를 못 다니게 된 주제가 되었으므로, 토요일 아침마다 눈이 번쩍 떠졌다. 달리기를 하다가 그만두고 싶어질때는 내가 써보낸 출사표를 떠올리며 오그라듦에 몸부림쳤고 적어도 1키로는 더 달릴 수 있는 에너지가 샘솟았다.

마침 그 즈음에 고객을 대상으로 국가대표 마라톤 선수에게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클래스가 열렸고, 한정 인원으로 직원에게 제공되는 참가기회에 본부장님은 나를 최우선순위로 가입시켜주셨다.

겨울이었고, 주2회 2시간 교육이었다. 교육의 내용은 달리기. 말그대로 정말 달리기만 했다. 준비운동으로 30분을 가볍게 달리고 나서는 1시간을 다시 ‘본격적으로’ 달렸다. 각종 근육운동, 윗몸일으키기, 팔굽혀펴기 등 도 덤이었다. 한두번 빼먹고 하지않으면 다음 수업시간을 절대 따라갈 수 없는 달리기와 근력운동 숙제도 있었다. 매일이 체력장이었다. 눈이와도 영하여도 주2회 2시간을 내리 달렸다.

정말 내 인생에 이렇게 운동을 해본적은 처음이었다. 같이 이 교실이 참여했던 디자이너는 수업 중간에 토를 하기도 했고, 영업부 남직원은 이 교실이 끝나는 날 군대 제대할때보다 기쁘다고 말했다.

꽤 많은 돈을 내고 참가하는 고객들의 교실에 후원사의 본사직원 몇명이 깍뚜기로 같이 교육 받는 과정이었으므로, 소홀히 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심지어 일반 고객들은 마라톤 완주가 목표가 아닌 기록향상을 목표로 하는 상급자들이었기 때문에 더 강도높은 교육을 원하는 상황이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내손으로 친 배수진이었다.

그해 겨울 나는 그렇게 더이상 도망칠 곳도 없이 딱걸려서 죽도록 달리고 또 달렸다.

겨울내내 훈련하여 3월에 개최되는 동아마라톤에 참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이 지옥의 마라톤 교실의 과정이 막바지에 다다를 즈음, 그 봄에 나는 많이 달라져있었다.

10키로 쯤은 숨도 차지 않고 뛸 수 있게 되었으며, 하루 평균 15키로를 뛰었고, 시계를 보지 않아도 내 속도를 대충 가늠 할 수 있게 되었다. 언제나 러닝화를 신고 다녔고 백팩에는 갈아입을 옷을 넣고 다녔으므로, 서울 시내 어디든 차가 막힐때는 뛰어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잠실부터 여의도, 여의도에서 홍대 는 특히 달려서 이동하는 것이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는 것보다 빠를 때도 있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뜰때 피곤함도 느끼지 않게 되었고, 주량도 늘었다. 몸에 늘 활력이 있었다.

나는 어느새 달리기 예찬론자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동안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그런 것들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 혹한기에 달리기를 할땐 옷은 가볍게 입어도 되지만 장갑, 비니가 필수라는 것
  • 혹한기에 달리기를 할땐 배를 잘 보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 레깅스에 속주머니는 왜 필요한지
  • 레깅스 뒷주머니는 또 왜 필요한지
  • 바람막이라는 것을 입고 땀을 많이 흘리면 어떻게 되는지
  • 플리스 자켓을 입고 땀을 많이 흘리면 어떻게 되는지
    겨울 러닝 티셔츠가 손등을 덮어야 하는 이유
  • 출발점에선 아무 느낌없던 러닝화 착화감의 미세한 거슬림이 10키로 이상 지점부터 얼마나 큰 불편으로 변하는지
  • 면티셔츠를 입고 20키로 이상의 장거리를 달리면 피부에 쓸림이 생긴다는 것
  • 장거리를 달릴땐 모자를 꼭 쓰고 달려야 한다는 것
  • 신발의 5그람의 무게차이가 20키로 이상 지점부터는 5키로의 무게차이처럼 느껴진다는 것
  • 백팩을 메고 달리는 것이 짐이 아니라 오히려 좋은 자세를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것

위의 것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내가 직접 경험을 통해 알게된 것들이다.

그리고 내가 알게 된 더 중요한 것들은 사실 아래의 것들이다.

  • 러너들에게 러닝이란 어떤의미인지
  • 그들이 비가오고 눈이와도 달리기를 하러 나가는 마음가짐이란 무엇인지
  • 그런 러닝을 해내고 있는 우리 러너고객들은 얼마나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인지
  • 그들이 왜 그렇게 자신의 기록과 완주횟수에 대해서 자부심을 느끼는지
  • 그들이 목표를 달성할때 신고 입는 러닝화, 러닝복의 의미란 무엇인지 말이다.

나는 우리 고객들이 더 좋아졌다. 그들에게 전우애가 느껴졌다. 비오는 날 기꺼이 몸을 적시며 바깥으로 뛰어나가는 그들이 자랑스러웠고, 그들을 위해 더 나은 러닝의 경험을 제공 하는 일, 즉 바로 내가 하는 일이 의미있게 느껴졌다.

마라톤 완주를 하고난 후 기분탓인지 나는 회사에서 좀 더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상품팀에서는 나에게 샘플 착용 테스트를 부탁했고, 나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주었다. 러닝 관련 마케팅을 진행할 때에도 팀장님께서는 막내였던 내 의견을 많이 반영해주셨다. 그리고 나 또한 내 의사결정에 확신을 더 많이 가지게 되었다.

패션, 스포츠 브랜드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내가 곧 해당소비자가 되는 소비재 산업군에서 일을 한다는 점에서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바로 그 브랜드의 고객이되고 그 브랜드가 추구하는 삶을 살게된다면 내가하는 일이 소중해진다.

당신이 브랜드에 몸담고 있지만 너무 일이 지겹고 하루하루가 의미없게 느껴진다면
그 브랜드의 삶을 살겠다고, 출사표를 내어보자. 에라 모르겠다 심정으로 보내기 버튼을 눌러보자.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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