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집힌 이야기] Chapter8. 뒤집힌 시계
소년은 광장에 앉아 시계탑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흐느적흐느적 걸어 다니고 차들은 자기만의 리듬을 따라 도로 위를 달리고 있는데, 광장 시계의 시침과 분침만큼은 정해진 속도로 회전하고 있었다. 그것은 잠들지도 쉬지도 않는다. 소년은 시계만이 우주를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에도 영향받지 않고 자기의 방향과 속도를 유지하는 시계만이.
소년의 뒤집힌 세계는 현실 세계와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였다. 사람들은 걷고 일하고 얘기를 나눈다. 소년은 에펠탑을 타고 떨어져 내리며, 날아오르는 것이라고, 우리는 뒤집힌 세계에 진입하고 있다고 말한 마법사의 말이, 정작 이 뒤집힌 세계의 일상에서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여전히 사람들은 살고, 세계는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단 하나, 소년의 눈에 이상해 보이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시계였다. 광장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저 시계탑의 시계, 카페와 음식점 벽에 붙어 있는 시계 그리고 사람들의 손목 위에 살고 있는 시계. 오로지 시계만이 거울에 비춘 듯 반전돼 있었다. 3과 9가 뒤집혀 있고, 어떤 것은 6과 12가 뒤집혀 있었다. 물론 글자의 방향도 제각각 뒤집혀 있었다. 이 세계의 시계들은 뒤죽박죽 각자의 방식대로 뒤집혀 있었다. 그러나 시계의 시침과 분침만큼은 다른 세계와 동일하게, 언제나 일정하게 회전했다. 방향도 바뀌지 않은 채.
소년은 별생각 없이 시계를 바라보다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제까지 이 도시의 시계들이 제각각 뒤집혀 있다는 것을 자신이 한 번도 인식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계가 뒤집혀 있잖아?'
소년은 이상한 마음이 들어 카림에게 물었다.
"카림, 왜 시계에 적힌 숫자가 제각각 뒤집혀 있지? 사람들은 어떻게 약속을 정하는 거야? 누군가는 3시고, 누군가는 9시일 텐데. 아니, 나는 그동안 사람들과 어떻게 만난 거지?"
"약속은 정하기 나름이죠. 숫자와 언어는 관념적이고 상대적이에요. 같은 숫자를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관념 속에서는 다른 시간을 생각하고, 다른 숫자를 말해도 같은 시간으로 알아듣지요. 이 세계에서 숫자는 중요하지 않아요. 약속의 기호일 뿐인 것이 숫자랍니다."
카림은 직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숫자 역시 직관의 기호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기호의 모양이 다르다고 소통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문제는 집중이라고. 서로에게 귀 기울이고 있느냐가 문제이지, 기호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3시라고 말했는데 9시에 오면 안 되잖아? 약속은 기준을 정하자고 하는 건데. 기준이 서로 다르면 어떻게 만나?"
소년이 카림에게 반문했다. 소년의 상식으로는 아무리 숫자가 기호일 뿐이어도, 일치하지 않는 기호로 어떻게 소통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소년은 이미 이 세계에서 그렇게 살고 있다.
"이안님도 일치하지 않는 기호로 잘도 만나고 다니셨잖아요? 만나야 할 사람은 기준과 상관없이 만나게 되어 있어요. 기호가 일치하지 않는다고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게 아니랍니다. 이 세계에서는 오히려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고,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은 만나지 않기 위해 시계의 숫자가 모두 다른 거예요."
소년은 카림의 설명이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소년의 시간 관념은 여전히 떠나온 현실 세계의 그것 그대로였다. 정시와 정각이 존재하는.
"이안님의 시간 관념이 처음과 끝이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에 생겨난 오류인 거예요. 처음과 끝이 없는 우주에서는 순서의 정렬 따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요. 그래도 이안님이 떠나온 세계와 다를 것 없이 세계가 진행되죠. 그건 이상하지 않으세요?"
"맞아, 그게 이상해. 그래서 그동안 시계의 숫자가 뒤집혀 있다는 걸 알아채지도 못했어. 다른 세계와 다른 게 없었거든. 그런데 말이야. 갑자기 깨닫게 된 거야. 숫자가 뒤집혀 있다는 걸 말이야."
"그게 왜 갑자기 눈에 들어왔죠?"
"몇 시인지 궁금했으니까. 생각해 보니 이제까지 몇 시인지 궁금해한 적도 없었어. 모든 게 바쁘게 진행돼서 시계 볼 틈도 없었거든."
"아니에요. 이안님은 바빠서 시계를 볼 여유가 없었던 게 아니라. 시계를 볼 필요가 없었던 거예요. 하루와 일상이 직관의 흐름을 따라 진행되는 세계에 오셨으니까요."
"그런가..."
소년은 갑자기 이 세계가 낯설게 느껴졌다. 에펠탑을 타고 착륙한 이후로부터는 너무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에, 일의 흐름을 쳐내느라 정신이 없기도 했다.
"그런데 시계는 바쁠 때 더 많이 보게 되는 거 아닌가? 현실 세계에서는 항상 바쁘다며 일 분, 일 초를 체크했던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엄청난 일정을 소화한 것 같은데 그간 시계 볼 생각이 들지 않았어. 아, 타이밍이란 건 시간과 상관이 없는 건가?"
"타이밍은 방향을 말하는 거예요. 나아가려고 하는 방향과 일치하는지, 않은지를 가늠하는 게 타이밍이에요. 몇 시, 몇 분, 몇 초를 일치시키는 게 아니라."
"그렇구나. 그렇다면 시계가 필요 없겠네?"
"하하하 이제 좀 이해가 되세요? 방향이 맞으면 시간은 중요하지 않답니다. 고장 난 시계도 하루에 2번은 맞는 것처럼, 방향이 확실하다면 시간의 때는 반드시 열리게 되어 있어요."
소년은 카림의 말에 번뜩하고 드는 생각이 있었다. 에펠탑을 타고 떨어져 내리며 두려워하는 소년에게 마법사는 이렇게 말했었다.
'우리는 이제 시간을 초월하는 거야. 거꾸로 뒤집힌 세계에서는 사람들이 시간을 따라 살지 않거든. 다만 방향이 중요하지. 그리고 각자의 방향대로 시간을 움직인다네.'
소년은 마법사의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이제 좀 이해가 가는 것 같았다. 뒤집힌 세계에서의 시간의 의미가 무엇인지.
"마법사님이 그랬어. 뒤집힌 세계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방향대로 시간을 움직인다고."
"빙고! 기억하시는군요. 그런데 뒤집힌 세계가 아니라 여기가 우리의 현실이에요. 우리는 이 세계에 살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가능하면 현실 세계라고 해주시겠어요?"
"현실 세계? 그럼 떠나온 세계는 뭐라고 부르지?"
"거기가 뒤집힌 세계죠. 우리는 여기, 이 세계에 살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아직 적응 중이시니, 당분간은 떠나오신 세계를 현실 세계로 부르도록 하죠. 여기는 그럼 직관의 세계라고 할까요? 직관어 학습 중이시니까."
"그래, 그렇게 부르자. 그래야 덜 헷갈릴 것 같아."
"그럼, 직관의 세계의 시간에 대해서 말씀드릴게요. 다시 정리하면, 떠나오신 현실 세계에서는 방향보다 시간이 중요해요. 그 세계는 처음과 끝이 있거든요. 일회적이죠. 모든 게 한 번 뿐이에요. 그래서 시간에 만사를 종속시켜야 해요. 일도, 사랑도, 즐거움도. 게으름은 허락되지 않아요. 그건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그 세계의 사람들도 자꾸 일탈을 해요. 왜냐하면 실제로는 아무도 처음과 끝이 있는 세계에 살지 않거든요. 그건 미니시리즈 드라마일 뿐이에요. 재방송이 없는. 그러나 직관의 세계는 처음과 끝이 없어요. 끝없이 반복되고 영원히 계속되죠. 그래서 시간이 아니라 방향이 중요해요. 어디로든 갈 수 있으니까, 어디로든 가야 하니까요."
"처음과 끝이 없으면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끝이 나? 사람들은 영생하는 거야?"
"아니요. 매일 태어나고 매일 죽어요. 더 정확히는 매 순간 태어나고 매 순간 죽어요. 아, 이 말은 어려우시겠다. 그러니까 이야기 속에 존재하는 거예요. 사람이. 이야기가 시작되면 태어나고 이야기가 끝이 나면 죽어요. 죽지 않으려면 이야기가 계속되어야 해요.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야 해요."
"이야기? 무슨 이야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이야기인데? 사람의 생각을 말하는 거야?"
"생각이 이야기의 기초단위이긴 해요. 생각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생각이 시작되고 생각이 끝나는 게 하나의 생이에요. 그리고 잠들잖아요? 이 세계의 사람들도 잠을 자고 꿈을 꾸니까. 그럼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고 끝나죠. 꿈속에서 말이에요. 그런데 이안님도 한 번에 하나의 꿈만 꾸는 건 아니시잖아요?"
"꿈? 한밤에 여러 꿈을 꾸기도 하지. 이 꿈, 저 꿈 왔다 갔다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며칠 동안 연속되는 꿈을 꾸기도 해."
"그래요. 그 꿈들이 다 하나의 생이에요. 이어지면 같은 생이고. 이 꿈과 저 꿈은 이생과 또 다른 생이죠. 하지만 이야기는 언제나 자기를 중심으로 펼쳐져요. 타인의 꿈을 꾸는 사람은 없으니까."
"타인의 꿈을 꾸기도 하지 않나? 태몽 같은 걸 대신 꿔주기도 하잖아."
"어쨌든, 자신의 꿈이잖아요. 등장인물이 타인이라고 타인의 꿈을 꾸는 건 아니니까. 바보 같은 질문이에요. 암튼 세계는 꿈들로 이루어져 있어요. 우리는 깨어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 꿈꾸고 있는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지난밤 꿈속 내 입장에서 보면, 나는 현재 꿈을 살고 있는 셈인걸요."
"그렇구나. 그렇다면 도대체 어느 게 꿈이고, 어떤 게 실제인 거지?"
카림은 눈을 껌뻑껌뻑하더니 꿈에서 누군가 자신을 부르고 있다고 했다. 카림은 쏟아지는 졸음을 참기가 어렵지만, 좀만 더 버텨 보겠다며 말을 이었다.
"아~함, 그걸 굳이 왜 나누죠? 그건 이안님이 떠나온 현실 세계의 사람들에게나 중요해요. 처음과 끝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니까. 직관의 세계에서는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답니다. 처음도 끝도 없는 영원의 세계에서, 어떤 게 실제인지 뭐가 중요하겠어요. 어떤 꿈을 살고 있느냐가 중요하지. 끝도 없이 계속되는 꿈속을 사는데 말이에요. 깨어남은 없어요. 이야기가 새로워질 뿐이죠. "
소년은 카림의 말에 홀린 듯 빠져 들었다. 그리고 어렴풋이나마, 이 세계의 시계들이 제각각 뒤집혀 있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럼, 시계가 뒤집혀 있는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거야?"
"아니요. 중요하죠. 중요하지 않다면 왜 시계가 여기저기 매달려 있겠어요. 그건 앞서 말씀드렸듯이 기호에요. 같은 꿈을 꾸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 알아보는 기호."
"아, 그러면 같은 꿈을 꾸고 있는 사람들은 시계가 같은 방향으로 뒤집혀 있어?"
"음.. 뒤집혔다는 표현이 좀 거슬리네요. 그건 현실 세계의 눈으로 봤을 때 뒤집힌 거죠. 알파벳 모양이 다르다고 뒤집혔다고 말하진 않잖아요. 그냥 다른 거예요. 어쨌거나, 같은 방향을 꿈꾸는 이들은 서로의 시간이 일치해요. 그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같은 곳에 모이고, 아무도 정하지 않은 때에 일시에 흩어지죠. 시계는 단지 상징일 뿐이에요. 같은 시계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같은 꿈을 꾸고 있구나 하고, 서로를 좀 더 빨리 인식할 수 있죠. 뭐, 없어도 문제는 없어요. 이안님이 이 새로운 세계에서 이제까지 시계를 보지 않고도 잘 살아왔듯 말예요. 그러니까 이 세계의 시간이란 것이 꿈의... 꿈이.. 꿈.."
카림은 더 이상 졸음을 견딜 수 없는지, 말하다 말고 스르륵 눈을 감고 잠이 들어버렸다. 소년은 갑자기 시계가 사고 싶어졌다. 볼 일이 없는 시계지만, 카림의 말처럼 시계가 같은 꿈을 꾸고 있는 이들의 상징이라면, 그들을 빨리 알아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소년은 직관의 세계에 자신을 위한 시계가 준비되어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나, 시계를 사야겠어!"
"네? 무슨 시계요? 시간은 이 세계에서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소년의 갑작스런 선포에 카림이 화들짝 놀라 깨며 짜증 섞인 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나와 같은 꿈을 꾸는 이들을 알아볼 수 있는 시계 말이야. 네가 그랬잖아. 시계는 상징이고 기호라고. 나만의 상징을 빨리 가져야겠어."
"좋은 생각이에요. 이안님의 시계는 이미 어딘가에서 이안님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니까요. 저는 더 못 버텨요. 이젠 깨우지 마세요. 다른 꿈에서도 제가 할 일이 많다고요."
카림은 다시 잠들고 소년은 시계를 찾기 위해 길을 나섰다. 시간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도시치고는 골목마다, 거리마다, 시계 상점들이 꽤 많이 자리하고 있었다. 화려한 명품 시계부터 아이들의 장난감 시계까지. 다양한 시계 상점들이 저마다 전문점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영업을 하고 있었다. 소년은 자신의 시계를 발견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가지고 시계 상점들을 순례했다. 하지만 여기저기 들어가 봐도, 이거다 하고 눈에 들어오는 시계가 없었다.
'어떤 시계를 사야 할까? 어떤 시계가 내 꿈의 방향을 표시해 줄까? 나와 같은 꿈을 꾸는 이들을 만나게 해줄까?'
소년은 생각했다. 뒤집힌 세상으로 건너온 자신의 방향을 옳게 표시해 줄 시계에 대해. 그리고 그 시계를 찬 자신을 알아볼, 같은 꿈을 꾸는 친구들에 대해. 그러다 한 시계 상점을 발견했는데, 간판에는 <이 세계가 낯선 이들을 위한 시계 전문점>이라고 쓰여 있었다. 소년은 이곳이 바로 자신을 위해 준비된 시계 상점이라고 직관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니나 다를까, 주인장으로 보이는 한 노인이 자신을 알아보며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십시오. 잘 찾아오셨군요. 마침, 손님의 시계가 도착했답니다."
"네? 제가 누군지 아세요?"
"알다마다요. 이안님 아니신가요? 오늘 방문하시기로 예약되어 있는 손님이시잖아요."
주인장은 소년에게 예약자 명부를 내보였다. 명부에는 소년의 예약 내용이 적혀 있었다. 심지어 예약 시간이 상점 벽에 걸린 단 하나의 시계와 초 단위까지 일치했다. 소년은 깜짝 놀란 마음을 속으로 집어삼켰다. 카림의 말대로 시간은 기호일 뿐이니까. 주인장은 조심스레 소년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이상하죠? 시계 전문점에 시계가 하나뿐이라. 여기는 이 세계에 처음 오신 이들을 위한 시간 보관소예요. 시계에 저마다의 시간이 보관되어 있거든요. 시간의 주인이 이미 다 정해져 있답니다. 아, 가끔 오기로 하고 안 나타나시는 분들이 계시긴 해요. 아마도 떠나야 할 세계에 대한 미련이 많이 남으신 거겠죠? 저희는 뭐, 언제든 오시면 되니까, 기다리면 됩니다만. 아주 많이 늦어지시는 분들의 시계는 따로 금고에 보관한답니다. 어쨌든 오고 마실 테니까요. 물론 기다리는 건 시계의 몫이긴 하죠. 시계들이 많이 지루해하고 그래요. 그런 시계들은 분침과 초침이 자꾸 느려진답니다. 아이고 이런, 내가 노망이 났나. 쓸데 없는 말을. 손님을 기다리게 하고서 말이죠. 자, 이안님이라.. 제가 손님 시계를 찾아올 테니 여기서 잠시 기다리세요. 어디에 뒀더라..."
주인장은 예약자 명부에서 소년의 시계 보관함 넘버를 확인하고는 지하 창고로 내려갔다. 소년은 자신의 시계가 꽤나 깊숙히 보관되어 있는 가보다 생각했다.
'내가 너무 늦었나? 주인장의 말이 마치 나 들으라고 한 말 같네.'
소년은 자신의 시계가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해서 못 견딜 지경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주인장은 지하창고에서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해가 시곗바늘을 따라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소년은 기다리다 못해, 지하창고로 가는 계단을 내려가 주인장을 불러보았다.
"저기요, 사장님. 사장님? 제 시계는 언제 주실 수 있나요?"
그때 창고 반대편 끄트머리에서 망치로 돌을 깨부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드르륵하고 드릴 돌아가는 소리가 이어졌다. 소년은 갑작스런 굉음에 여기가 시계점인지, 탄광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시계에 다이아몬드라도 박는 중인가? 왜 이런 소리가 들리지?'
그때 지하창고 반대편에서 주인장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걸어왔다.
"아이고 손님, 많이 기다리셨죠? 죄송합니다. 저희가, 이런 일은 처음이라 애를 먹었어요. 확인해 보니, 시계가 완성되기도 전에 오셨거든요."
주인장은 소년이 예정보다 빠르게 이 직관의 세계에 도착한 터라, 급하게 시계를 조립하느라 기다리게 했다며 사과를 했다.
"예약시간은 분명 틀림이 없는데, 다른 예약 손님과 동명이인이신가 확인하느라 시간이 또 걸렸네요. 근데, 맞네요. 오늘 예약자 명부에 이안님은 한 분 뿐이세요. 그런데, 손님 시계가 이게, 비석에 거꾸로 박혀 있었어요. 아, 그러니까, 어떤 시계들은 비석에 단단하게 봉인돼서 저희한테 배송되어 오기도 하거든요. 무슨 사정이 있는지. 암튼 그런 것들은 어차피 주인들이 꽤나 오래 걸려서 시계를 찾으러 오기 때문에 저희가 평소에 조금씩 해체 작업을 해도 시간이 충분한데, 손님 시계는 조립도 안 된 채로 비석에 봉인되어 있었거든요. 참, 이런 경우는 드문 일인데 말이죠."
주인장은 소년에게 시계를 내밀었다. 그런데 소년의 시계는 숫자가 박힌 시침 시계가 아니라 디지털 전자시계였다. 그것도 아이들이나 찰 것 같은.
"아.. 전자시계네요."
"네. 뭐 그래도, 이게 버튼을 누르면 불도 들어오고, 스톱워치도 되는, 기능이 많은 시계랍니다. 자, 이거 보세요. 요렇게 파란 버튼을 누르면 불이 들어오죠?"
주인장이 실망한 듯한 기색의 소년에게 어색하게 시계 자랑을 하며 파란 버튼을 누르자, 갑자기 공간이 180도로 회전을 했다. 세계가 뒤집힌 것이다. 소년은 거꾸로 매달려, 아니 거꾸로 서서 주인장을 바라봤다. 그러나 주인장은 거꾸로 돌지 않고 바로 서 있었다.
"아, 이게 회전 기능이 있네? 요즘 나오는 시계는 이런 기능이 없는데.'
주인장은 재미있다는 듯이 파란 버튼을 반복해서 눌렀다. 그때마다 소년의 공간이 180도로 회전을 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주인장과 시계 상점의 지하창고는 뒤집히지 않고 그대로였다. 소년의 공간만이 놀이동산의 회전 다람쥐 통이라도 된 듯 뒤집혔다 바로 섰다를 반복했다. 소년은 어지럼증이 몰려와 토가 나올 것 같았다.
"사장님! 그만요. 그만! 어지러워 죽겠어요."
"앗, 죄송해요. 제가 너무 오랜만이라 반가워서 그만. 주책없이."
주인장이 파란 버튼에서 손을 떼자, 세상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소년은 빙글빙글 도는 머리를 한 손으로 부여잡으며, 다른 손은 주인장에게 내밀었다. 자신의 시계를 달라고. 주인장은 재미있는데 그만두는 게 아쉽다는 듯, 느린 속도로 소년에게 시계를 건네며 말했다.
"아, 이게. 손님은 어떠신지 모르겠지만, 이 세계가 아직 낯선 분들을 위해 제공되는 기능이거든요. 가끔씩 뒤집어주는 거예요. 이 세계가 뒤집혔다고 느껴 멀미가 나시는 분들을 위해서 말이죠. 그런다고 다시 떠나온 세계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리울 수 있잖아요? 일종의 향수병 완화 기능이라고나 할까."
"뒤집으면 향수병이 나아진다구요? 전 멀미가 날 것 같던데요."
"아, 그건 손님이 이 세계에 잘 적응하고 계신다는 증거죠. 암튼 급하게 조립하긴 했지만 잘 작동하고 있어 다행이네요. 그런데 손님은 이 기능 쓰실 일이 없긴 하겠어요. 어지러우시다니."
소년은 주인장에게서 건네받은 시계를 손목에 찼다. 시계 창에는 현재시간이 깜빡이며 표시되고 있고, 시계 창 아래에는 노란 버튼과 파란 버튼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다.
'파란 버튼을 누르면 멀미가 난다는 사실은 알았고, 노란 버튼은 뭐지?'
소년이 노란 버튼을 누르자, 누를 때마다 디지털 시계의 숫자가 제각각 회전했다. 소년은 이 노란 버튼의 기능이 뭐냐고 주인장에게 물었다.
"이 노란 버튼은 무슨 기능을 하죠?"
"그러게요? 이게 뭐지? 디지털 시계는 저도 오랜만이라. 가만 있어보자..."
주인장은 자신도 이런 버튼은 처음 본다며 시계 매뉴얼을 꺼내 찾아 읽기 시작했다. 매뉴얼을 읽어 내려가던 주인장이 놀란 듯 말했다.
"어, 이런 기능이 새로 나왔네? 이게 무슨 기능인가 하면요. 상대의 시계와 숫자의 방향을 일치시킬 수 있는 차원조정기능이라고 하네요. 두 개의 세계를 동시에 보는 이들을 위해, 한정판으로 제작되었다는데요?"
소년은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주인장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주인장도, 알아 들었냐는 듯 방긋이 웃어 보였다. 소년은 시계를 풀어 뒷면을 살펴보았다. 거울처럼 비쳐보이는 뒷면에는 '세계가 뒤집혀 보일 수 있으니 조심하시오' 라는 경고문이 적혀 있었다. 주인장은 깜빡 잊을 뻔했다면서 인증서를 찾아 소년에게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이 시계는 반드시 후손에게 물려 주셔야 합니다. 시간은 유전되고, 뒤집힌 시공간은 어느 시대에는 일상이 되어버리니까요. 그때 세계를 다시 뒤집으려면 이 시계가 꼭 필요할 거예요. 손님에게도, 후손들에게도 말이죠. 그런데 계산은 바나나 페이로 하실 건가요? 바나나 페이로 하시면 파손을 대비해서 워치케어 보증 서비스에 가입하실 수 있는데요. 가만있자, 3대후손까지면 얼마더라? 아, 10대까지 가입하시면 특별 할인 서비스가 있어요!"

_ [소년 이안/시즌2_ 뒤집힌 이야기] Chapter8. 뒤집힌 시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