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집힌 이야기] Chapter9. 마르탱의 평화

in #stimcitylast month (edited)



"아저씨! 잠깐만요, 잠깐만 세워주세요!"



소년은 차에서 급히 뛰어내렸다. 설사가 터지기 직전이었다. 늦은 시간이라 가게들이 전부 문을 닫고 있었다. 아직 문을 닫지 않은 상점에 들어가 화장실을 쓸 수 있냐고 물었지만, 가게마다 화장실이 없다고 손사래를 쳤다.



'이런 씨~ 화장실이 왜 없어. 빌려주기 싫은 거지.'



이 도시의 화장실 인심은 참으로 박하다.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쓰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두 화장실 문을 닫아걸었다.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쓰지 못하도록. 그러자 사람들이 아무데나 화장실을 삼았다. 그러자 도시가 지린내로 가득해졌다. 보다 못한 정책 당국은 거리에 공중화장실을 설치했지만, 사람들은 이미 아무 데나 변을 보는데 익숙해진 뒤였다. 그러나 설사는 다르다. 아무 데나 에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도시의 사람들은 2~3시간씩 식사를 했다. 천천히 소화를 시켜가며. 설사가 나지 않도록.



소년은 급해 죽겠는데 화장실을 열어주지 않는 박한 인심에 열불이 났지만, 일단 화장실을 먼저 찾는 게 우선무였다. 터지기 직전이니까. 그러나 아직 열린 상점들은 화장실이 없다 하고, 사방은 이미 어둠 속에 갇혀 가고 있었다. 밤이 되면 행인도 드물어지는 이 거리에는, 사람도, 화장실도 없는 것이다.



"저기! 저기 문이 열렸어요. 저기로 들어가서 싸요!"



보다 못한 카림이 빼꼼히 열린 문 하나를 가리키며 들어가 싸라고 소리쳤다. 소년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카림이 가리킨 문으로 달려 들어갔다. 길에서 싸더라도, 아무도 보지 않는 은밀한 곳에서 급한 불을 꺼야 하니까.



"앗! 열렸다."



그런데 열린 문 사이로 들어서자, 오른쪽으로 건물 쪽문이 열려 있었다. 비스듬히 열린 쪽문 사이로 구원의 불빛이 퍼져 나오고 있었다. 이제 막 영업을 마치고 셔터를 내린 동네 펍의 쪽문이었다.



"으흡, 사장님 급해요! 화장실 쫌!"



소년은 쪽문으로 달려들며 간절한 눈빛으로 애원을 했다. 카운터에서 정산을 하던 펍 사장은 흘깃 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손가락을 치켜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소년은 엉거주춤 그러나 전속력으로 달렸다. 화장실이다. 그리고 평화가 찾아왔다.



"카림, 다행이야. 난 네가 문 뒤에서 싸라는 줄 알았어. 그런데 넌 이 펍에 쪽문이 있는 걸 어떻게 알았어? 처음 와 보는 거린데."

"그럴 리가요. 저는 직관의 눈이라고요. 경험은 중요하지 않답니다. 에헴~"



소년은 변기 위에서 평화를 누리며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분명 문 뒤편은 어떤 빛도 새어 나오지 않는 어둠 속이었는데,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펍의 쪽문이 나타난 것이다. 이미 셔텨를 내려 거리에서는 알아볼 수도 없는 어둠 속에 잠긴 펍. 단골 손님인 듯 보이는 취객들 몇이 술자리를 마무리하고 있었고, 사장은 정산 중에 숫자를 까먹을까 싶었는지 귀찮은 듯 화장실을 쓰게 해 주었다. 여러모로 기가 막힌, 아니 큰일 날 뻔한 타이밍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설사가 터졌지?'



평화가 찾아오자, 소년은 원인이 궁금해졌다.



'저녁도 잘 먹었고, 오는 길에 환승도 잘하고. 아무 문제 없었는데 왜 갑자기 설사가 터진 걸까? 너무 편한 소파에 앉아 배가 눌려서 소화가 잘 안된 건가? 그럼 배가 더부룩했을 텐데. 버스를 타기 전까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소년은 설사의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저녁을 먹은 식당 음식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다. 너무 편한 소파에 앉아, 배가 눌려서 소화가 잘 안된 건가 싶었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뱃속 상태가 너무나 멀쩡했다.



'해소하지 않은 욕구가 있었나?'



'욕구를 억압하는 것은 용변을 참는 것과 다르지 않네. 결국 터져 나오기 마련이지. 다 같은 욕구니까. 자네는 달리면서 용변을 본 적이 있나? 참으면 그렇게 되는 거야. 얼마나 쪽팔린가! 자신에게 말이야.' 소년은 마법사의 말을 상기하며 억압한 욕구가 있었나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억압하지 않으려 대차게 저녁을 먹기도 했으니, 그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상황만 보면 마법사가 말한 바로 그 상황일뻔했으니.



"저녁을 마르탱 거리에서 먹지 않아 그런 게 아닐까요?"

"아.. 마르탱 거리라고?"



소년은 카림의 말에 뭔가 집히는 것이 있었다. 계속되는 마르탱 거리의 끌어당김에 대해. 소년은 마르탱 전사의 꿈을 꾼 이후로, 도시의 마르탱과 관련된 장소들이 자신을 끌어당기고 있음을 심하게 느끼고 있었다. 우연히 들어간 식당도, 카페도, 이름이 마르탱인 경우가 태반이었고, 마르탱 거리를 벗어나 다른 곳을 가면 허탕을 치고 다시 마르탱 거리로 돌아오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날 저녁 역시 마르탱 거리의 레스토랑을 가야 하나 잠깐 고민하다, 오랜만에 가보고 싶은 레스토랑이 있어 굳이 마르탱 거리를 벗어났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너무 심하잖아. 모든 걸 마르탱 거리에서 해결해야 해?"

"어쩌겠어요. 그 거리가 이안님을 끌어당기는 이유가 있겠죠."



마르탱 거리는 소년을 강력하게 끌어당기고 있었다. 물음표 반지를 발견한 전시장은 마르탱 거리의 시작점에 있으며, 전시장 맞은편에 있는, 소년에게 마법사의 반지를 전달해 준 주인장의 카페도 마르탱 거리에 있다. 그뿐이 아니다. 소년이 가장 사랑하는 쌀국수를 파는 Pho 가게도 마르탱 거리에 있으며 (심지어, 그 Pho 가게의 이름은 'Pho Saint- Martin'이다.) 소년이 시계를 산 시계상점 역시 마르탱 거리에 있는 것이다. 물론 거리의 대미를 장식하는 건 백화점이다. 소년이 공작 벽화를 만난 그 백화점.



"그러고 보니, 모두 마르탱 거리에 있네. 그렇게 줄기차게 다녔는데, 난 한 번도 이것들이 모두 마르탱 거리 위에 있다고 연결 지어 생각해 보지 못했어."

"세상에 우연은 없답니다. 우리는 운명의 X 좌표와 Y 좌표 사이 어딘가를 흘러 다니고 있는 거예요. 무작위 같아 보여도 질서가 있고, 맥락이 있죠. 그 질서와 맥락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직관어이고 직관의 눈이죠. 그걸 배우는 중이신 거구요."

"그렇구나, 그렇다면 지금의 맥락은 마르탱 거리네."



소년은 계속되는 우연이 신기하면서도 이상했다. 매번 다른 곳을 간다고 갔던 건데, 결국 모든 것이 마르탱, 마르탱 거리에 연결되고 마는 것이다. 소년은 에펠탑을 떨어져 내리며 마법사에게 물었던 질문이 생각났다.



"우리, 지금 맞는 길로 떨어져 내리고 있는 건가요?"

"날아오르는 중이라니까. 그리고 맞는 길 따위는 없네. 빠른 길과 돌아가는 길만 있는 거야. 운명의 중력이 우리를 가야 할 길로 가게 만들거든."

"그럼, 아무 데로나 가도 되는 거 아닌가요?"

"그렇지. 아무 데로나 가도 돼. 대신 고생길이 훤하게 열릴 뿐이지."



마법사는 어떤 길로 가도 좋다고 했다. 가만히 제자리에 멈춰 있는 것만이 유일한 죄악이라고. 마음이 원하는 길을 따르되, 직관의 눈으로 맥락을 읽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 행복하게 길을 갈 수 있다고. 원하지 않는 길로 가면 고생길이 열리는 것이라고. 그러나 어디로 가도, 가야 할 곳에 가게 되어 있다고 말했다. 모두 운명의 손바닥 위에서 벌어지는 일이니.



"마법사님이 그랬어. 어디로 가든, 가야 할 곳에 가게 된다고."

"그러게 말이에요. 이 펍의 이름도 'La Paix de Martin', 마르탱이네요."

"어, 그러네. 펍 이름이 마르탱의 평화잖아."



펍의 이름은 마르탱의 평화였다. 소년은 마르탱에서 뱃속의 평화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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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소년 이안/시즌2_ 뒤집힌 이야기] Chapter9. 마르탱의 평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