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로 가는 날
남겨 둔 자리
가을이 온다
아니,
가을이 든다.
볕에 들고
바람에 들고
벼이삭 여문 속살에도 든다.
아침저녁
서늘한 바람 한 자락
문턱을 넘으면
매미 울음은 가늘어지고
풀벌레 소리는 깊어진다.
들에는
누른빛이 번지고
논에는
고개 숙인 벼들이
서로 어깨를 기대어 출렁인다.
한여름
불볕을 받아먹고
소낙비를 받아먹고
농부의 굵은 땀방울까지 받아먹어
한 알
또 한 알
속을 채웠다.
하룻사이
오가는 발길마다
마음 한 됫박씩 넉넉해진다.
찬바람 오기 전에
농부의 손길이 바빠진다.
거둘 것은 거두고
말릴 것은 말리고
묶을 것은 묶고
들일 것은 들인다.
콩을 털고
깨를 털고
고추를 말리고
처마 밑 장작을 가지런히 쟁인다.
그렇게
가을을 걷는다.
논두렁을 걷고
밭두렁을 걷고
한 해를 걷고
살아온 날들을 걷는다.
그런데 농부는
다 걷지 않는다.
감나무 우듬지
빨간 감 몇 알
하늘 가까이 남겨 둔다.
새들도 겨울을 나야 하니까.
논바닥에 떨어진 낟알 몇 톨도
굳이 주워 담지 않는다.
참새도 먹고살아야 하니까.
사람 사는 일도
가을걷이 같았으면 좋겠다.
내 것이라 하여
모두 거두지 않고
내 손에 닿는다 하여
모두 움켜쥐지 않고
한 줌쯤
누군가의 몫으로 남겨 두는 일.
해가 짧아진다.
산그늘이 슬며시
마을로 내려앉고
빈 들에 저녁바람이 분다.
농부는 한참
거두고 난 들을 바라본다.
빈 들인데
이상하게도 넉넉하다.
비워서 넉넉하고
나누어서 따뜻하다.
가을이 온다.
아니,
우리 안으로
가을이 든다.

히마판님, 시인이십니다!
제정신이 아닌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