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1948, post 42

in #koreanwarhistory6 years ago (edited)

웨더스비 교수 씀

스탈린 트루만.jpg

이번 포스트에는 해방이후 한국의 상황에 대한 마샬 국무장관이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정리하고 있다. 마샬 장관은 한국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도 아니며 정치적으로 민주주의가 제대로 뿌리 박을 수 없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 발전할 수 없는 지역이라고 평가했다, 이런 평가로 인해 미국의 위신 손상을 최소화하고 빠져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미군이 철수하는데 있어서 큰 작용을 한 것이다.

1947년 10월 한국에 별도의 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유엔의 미국대표 워렌 오스틴(Warren R. Austin)은 17일 48년 3월 31가지 유엔이 보장하는 선거를 해야한다는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 초안을 제출했다. 그는 9월 18일 미국무부의 초안이 담고 있는 조건을 포함했고, 이에 대해 우리는 지난 포스트에서 다룬 바 있으며,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나면 미국은 자신의 군대를 철수시킬 것을 제시했다.

이 결의안의 논리적인 결과로, 미국은 서울의 미소공동위원회 토의의 정회를 제안했다. 스티코프장군은 미국이 1945년 12월 모스크바 합의의 이행을 방해하기 때문에 소련대표단이 공동위원회에서 완전히 철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소련 대표단은 10월 23일 서울을 떠났고 공동위윈회는 공식적으로 문을 닫았다.

모스크바는 이제 한국에서 자신의 안보 완충을 보호할 새로운 전략을 찾아야 했다. 해결책은 10월 29일 유엔에 미소양국이 한국으로부터 군대를 동시에 철수시킨다는 제안을 제출하는 것이었다. 표면적으로 이 제안은 일리가 있어 보였다. 만일 유엔이 한국에서의 선거를 감독하기위해 간다면, 이는 더 이상 외국 점령군대가 더 이상 필요없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러시아의 문서고에서 확인한 바에 의하면, 소련은 ㅁ상호 철수를 원하고 있었는데 이는 미국군대가 철수하면 북쪽의 공산주의자들이 한반도 전역에 대한 통제를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미국을 군사적으로 개입시키는 위험없이, 소련이 한반도에서 보다 믿을 수 있는 완충지역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서울에서, 이승만, 김구 그리고 김성수 주변의 보수주의자들은 소련의 전략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있었다. 걱정이된 그들은 미국에게 남한의 별도 선거를 허용할 것과 군대의 철수를 연기할 것을 요구하는 대중 집회를 열었다. 미국은 새로운 기구인 유엔을 강화하기 위해 유엔을 통해 일할 것을 약속했기때문에, 하지 장군은 유엔이 이문제에 대한 결정에 도달하기전까지 미국은 그들의 요구에 답변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하지는 소련군이 철수하면 소련에 의해 보급을 받고 훈련된 북한의 공산주의 군대가 남한을 침공할 것을 우려했다. 그러므로 그는 워싱턴에게 소련군 철수의 함의를 재평가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또한 추가적으로 민간 고문관들이 한국에 파견할 것과 대규모 경비대의 창설을 허락할 것을 요구했다. 비극적으로, 워싱턴은 그의 요구를 거부했으며, 이는 만일 유엔 대표들이 한국에 주재하게되면 군대의 침공위험은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11월 7일 각료회담에서 국무장관 마샬은 이러한 행동이 실패할 것이라는 추론을 완전하게 설명했다. 마샬은 소련은 전쟁을 원치않으며 대신 그들의 영향력을 불안한 지역으로 확대시킬 것이며 이는 간접적인 공세와 폭동을 이용할 것이라고 올바르게 지적했다. 한국이 그러한 지역의 하나라고 할 때, 국무장관은 한국의 번영에 대해 비관적이었다. 그는 “이 나라에는 진정한 평화와 자유민주주의 발전에 대한 진정한 희망이 더 이상 없다”라고 보고했다.

마샬은 “다가오는 시대에 한국의 정치적 삶은 정치적으로 미성숙되고, 조급함과 폭력에 의해 지배될 것이다. 이러한 조건이 우세한 곳에서,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중심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국의 군대가 우리를 도와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할 선을 유지할 것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다. 그 영토는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전략적 지역이 아니며, 우리의 주 임무는 지나친 권위의 손상없이 빠져나오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미국의 생각이 1947년 11월 이후 어떻게 계속 바뀌어 갔는지 알아보겠다. 시리아의 미군 철수와 관련한 최근의 토의에서 이와 비슷한 토론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나는 독자들이 이 문제에 대한 보고서를 확인해 볼 것을 권고하고자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한국을 분단으로 이끈 비극적 사건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
James I.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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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읽고 갑니다

최근에 트럼프 정부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다음편도 기대 할께요.
디클릭 꾹!

참 다행입니다. 말년에 쫓겨났지만, 아래 인용구를 살펴보면 그래도 국제 정세에 대한 혜안은 엄청나다라고 밖에 안 느껴지네요.

서울에서, 이승만, 김구 그리고 김성수 주변의 보수주의자들은 소련의 전략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있었다. 걱정이된 그들은 미국에게 남한의 별도 선거를 허용할 것과 군대의 철수를 연기할 것을 요구하는 대중 집회를 열었다.

마샬의 회의적인 입장이 변화되는 배경이 있을 것 같네요
다음편이 기대됩니다~!!

미군이 철수를 안했으면 6.25는 안 일어났겠죠?
요즘 흘러가는 상황이 비슷하다고 생각하는건 너무 제가 오버인가 하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