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pen] 2일차. 어둠 속에 나 혼자.
피레네 산맥에서 온 몸과 마음에 긴장을 한 탓인지 밤 9시에 잠이들어 새벽에 한차례 깼는데 여기 저기서 코고는 소리가 난다. 첫날 밤이니 다들 피곤하기도 했겠지. 같은 날 길을 떠난 순례자들이 이렇게나 많은 줄은 몰랐다. 걷는 속도와 일정에 관계없이 누구나 첫 숙소는 이 곳이니, 알베르게가 상당히 크고 시설도 좋은 편이다. 한 때는 수도원이었다는데 이제는 순례자들이 머무는 곳이 되었구나. 오늘 밤이 지나면 이 많은 사람들이 서로 앞서거나 뒤쳐지기도 할 것이다. 마치 마라톤 경기처럼...
새벽 6시, 아직 모두 잠든 알베르게를 나섰다. 나는 걸음이 느리니까 천천히 오래 걸어야 할 것 같아서, 결국 서둘지 않으려고 서둘러 나온 것이다. 표지판을 주섬주섬 따라가는데 수도원 건물과 멀어지는 순간 암흑에 도래했다. 어제 피레네 가는 길은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앞이 하나도 보이지가 않는다. 괜한 눈만 꿈뻑 거리다가 가방 주머니를 뒤져 새끼 손가락만한 후레쉬를 꺼냈다. 하등의 도움도 되지 않는다. 가뜩이나 힘이 없는 불빛은 멀리 비추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숲에 들어온 것 같다고 막연히 생각할 뿐, 길을 잃지 않으려 땅바닥만 보며 걷는다.
‘왜 이렇게 일찍, 혼자 나왔지.’
후회하기 싫어 가타부타 이유를 떠올린다. 다른 사람의 발걸음에 맞춰 걷고 싶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속도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걷고 싶었다. 조용히 사색에 잠기거나 풍경을 감상하고 싶은데 옆에서 계속 말을 걸어오는 것도 내가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 마디로 동행에 얽매이고 싶지 않다. 이 것은 한편으로는 발걸음 느린 내가 그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말과도 같다. 그래, 혼자 걷는 것은 좋다. 그런데 앞이 하나도 보이질 않으니 오늘은 조금 겁이 난다. 내가 가는 길이 맞는 것인지...
세상 살면서 하던 고민을 순례길 고작 이틀차에 하고 있었다.
순례길이 인생길과 다른 것이 있다면, 곳곳에 놓인 노란 화살표가 내가 가야할 방향을 알려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같은 목적지, 즉 산티아고를 향해 다부지게 걷고 있다는 것.
아니나 다를까, 등 뒤 멀리에서 빛이 새어 나오며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린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머리에 헤드 랜턴을 쓰고 있거나 한 손에 랜턴을 들고 어둠을 훤히 밝히며 등장한 대여섯명의 사내들은 알아듣지 못할 언어로 정적을 소란스럽게 깨뜨리며 그러나 역시, 성큼성큼 빠른 걸음으로 나를 통과했다. 순식간이었다. 구원자를 만난 것 같은 반가움도 잠시, 다시 암흑과 정적에 나 혼자 잠겨 버렸다.
그런 식으로 몇 팀이나 나를 추월해 갔다. 다들 어찌나 요란하고 걸음들이 빠른지, 슬쩍 낄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다행히 그러는 동안 숲을 빠져 나왔고 거리와 마을의 가로등에 길을 잃을 걱정은 가신다. 마을 벽에 붙은 ‘순례자의 길’ 표시에 반가움과 고마움을 느꼈다. 쪽빛의 세라믹 위에 여러개의 노란 화살표가 한곳을 향한, 마치 가리비의 형상과도 같은 표식이다.
어느새 주변에 나처럼 혼자 걷는 사람도 있다. 아까보다는 덜 외로운 것 같다. 그런데 그 20대 남자애가 갑자기 가던 길을 멈추길래 쳐다 보니 알베르게에 담요를 두고 온 것 같아.
한다. 벌써 한 시간은 넘게 걸었는데, 설마? 필요하면 마을에서 사면 되잖아?
그러나 미련을 버릴 수 없는 눈치다. 금방인 데 뭘.
그는 나에게 인사를 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담요를 위해 두 시간이나 더 걷겠다니. 그러나 그를 설득할 이유는 없었다. 그의 이름은 야누스. 우리는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다시 만나 함께 길을 걸었다.
꿋꿋하게 혼자 걷다보니 새벽이 온다. 어디서 아침이라도 먹고 싶은데 이미 마을을 벗어나 이제는 웬 농장 한 복판을 걷고 있는 것 같다. 농장, 언덕, 마을, 언덕, 숲, 들판, 언덕길이 계속 나온다. 그리고 나는 내내 걷는 것이다. 길가의 나무에게 말을 걸고 소 떼를 보며 인사를 하기도 하고 홀로 기도를 드려도 본다. 이제서야 좀 순례길을 걷고 있는 것이 실감이 난다. 어제 나를 쫓아내기라도 할 것처럼 무섭게 불던 바람은 온 데 간 데 없다. 길 한쪽에 집도 없이 느릿느릿 기어가는 큰 달팽이도 있다. 마른 길바닥에 달팽이가 지나온 길이 보였다. 그 흔적이 없었더라면 그의 노고를 알 리 없었겠지. 그러든지 말든지 그는 느리게도, 꾸준히도 기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배가 고프다. 배가 너무 고프니 이제는 소가 보이면 입맛을 다실 지경이다. 다시 숲길에 들어섰는데 어디선가 딱따구리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목에 건 카메라를 여기저기에 조준했다. 그러다 카메라 앵글에 들어온 것은 다름아닌 아이톤! 어제 아침을 같이 먹었던 스페인에서 온 친구다. 우리가 이 길을 걷는 것은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 (I guess we all are here to find something) 라고 내게 말했던.
Hey!
그도 나처럼 고독하게 걸어왔던 걸까, 우리는 서로 너무나 반가워했다. 그를 반기는 것도 잠시 배가 고프다고 하소연하는 내게, 그는 아침으로 먹고 남겨온 샌드위치 한쪽을 건넸다. 거의 울먹이며 덥썩 받아서는, 그와 함께 길을 걸으며 맛있게도 먹었다. 그는 스페인 사람이지만 프랑스 보르도에서 7년이나 살았다고 한다. 보르도라면 세계적인 와인 산지이니 혹시 그와 관련된 일을 했나 싶어 왜?
하고 묻자 뜸을 들이더니 대답한다. 사랑 때문에.
테이블이 놓인 작은 슈퍼가 보여 우리는 그 곳에서 한 숨 쉬기로 했다. 오렌지 쥬스를 시키고 야외 테이블에 아이톤과 함께 앉아 있는데, 피레네에서 만났던 캐나다 할저씨 더그와 담요를 가지러 갔다가 벌써 돌아온 야누스도 차례대로 슈퍼에 들려 재회하게 되었다. (알베르게로 돌아가는 길에 그의 담요를 챙긴 다른 순례자를 만나 건네 받았다고 한다.)
짙은 어둠이 깔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새벽에는 분명 나 혼자였는데... 암흑 속에서 서로 알아보지는 못했어도 각자 열심히 걸어오고 있었구나. 나 혼자가 아니었다. 우리 모두 그랬다.
@springfield
저 곳을 가보진 않았지만 순례자의 길을 같이 걷는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야밤에 감성 터지네요...
정말 정독하셨는지 문제내고 싶어지는 야밤이네요... Q. 중간에 숙소 되돌아간 남자가 찾으러 간 것은?
담요!!!!와 진짜...ㅋㅋㅋㅋㅋㄲ
한편의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사진도 너무 이쁘고 고생하셨을껀데 전 자연속이 아늑함이 느껴질까용
@suran 님 안녕하세요 :-) 지금이나 그때나 이상하게 '고생' 을 했다는 느낌은 거의 받지 못했어요. 시간이 갈 수록 이 길이 끝나는 것이 아쉽더라구요. 말씀하신 자연속의 아늑함이 좋아서....도 그 이유 중 하나인 것 같아요!
하물며 달팽이도 저렇게 쉼없이 나아가고 있는데.. 저도 지칠 때는 저 달팽이를 기억하고 페이스 조절하면서 계속 앞으로 가야겠어요 :)
말랍써님, 저두요. 달팽이를 보며 힘내서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비단 순례길 뿐만이 아니라... 인생길 위에서도. 각자의 속도대로, 조바심없이 꾸준히 걸으면 언젠가는 가고자 하는 그 곳에 닿을거라고 믿습니다 :-)
자연 그대로의 모습 너무 예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gg1971 님 안녕하세요 :-) 글 감상해주시고 댓글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산넘어 SOS는 무슨 의미가 있는 건가요?
@sinner264 님 오셨어요 :-) 저도 보면서 특별한 이유가 있을 줄 알고 궁금했는데... 조금 허무하게도, SOS 라는 브랜드 광고라고 하더라고요 -_- 다음날 그 브랜드 쌀로 빠에야 해먹었네요...
브랜드 광고라니.. 독특하네요 -0-
마지막에서 위로 네번째 사진에 SOS라고 적혀있는거 맞죠?ㄷㄷ
감동적으로 보다가 순간 흠칫했다는...저기에는 어떠한 전설이 있을것인가!!
각설하고 이번화에서 느낀건 절대적인 고독감이었습니다. 발걸음이 느린(그정도로 느리실줄이야...몇팀이나 추월해가다니) 스프링필드님이 순례자의 길을 친구삼아 가다가 우연치않게 사람들과 재회하는 과정이 눈에 띄네요. 결국 모두가 고독하게 걸어왔지만 접점에서 다시금 모이는군요! 왠지 저기서 만난 야누스란 분 외에 다른분들도 앞으로 자주 등장할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ㅎㅎ
그 사람들이 빨랐던 건지 제가 느렸던 건지 아직도 미스테리 ㅎㅎ 제가 엉금엉금 걷기는 했을 거예요. 아직까진 느림보가 따로 없지만!! 시간이 갈 수록 변해간답니다. ㅎㅎㅎㅎ 그리고 한 번 스칠 줄 알았던 사람들과는 계속 만나게 되더랍니다. 순례길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인 것 같아요. 그리고 SOS 는 ㅋㅋㅋㅋㅋ 저도 저게 뭔가했는데 식료품 메이커 이름.... 이를테면 오뚜기.. 뭐이런... -_- ㅋㅋㅋ
아...오늘은 스필님 글을 따르다보니 배고파지는 체험까지 고스란이 전이되네요.
라면을 끓여>>>?
그래요. 혼자 걷고 있는 사람들이 각자 또 그 길을 걷고 있네요. 이 순례의 길은 필경 따로 또 같이 -의 위대한 국밥으로 인도해줄 것 같아요.
으...저 달팽이사진-압권이네요!
제 글만 보면 왜 자꾸 배가 고파지시는 건지 ㅎㅎㅎ 사실 항상 배가 고프신 건 아닐지... 잠시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차를 한 잔 하러 가야겠군요 :-) 달팽이가 으... 좀 징그러워 보이긴 하는데 ㅋㅋㅋㅋ 열심히 가고 있는 모습은 또 기특하더랍니다. 그리고 순례길은 필경 따로 또 같이- 에 한표 드립니다 ㅎㅎ 그러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분들도 뵙기는 했습니다만...
항상 배고픈가...? 잠시 생각해봤는데 그런 면도 없지 않으나!
스플님이 감각을 이리저리 굴리고 자극하여 배고픔에 이르게 하는 힘이 있어요.
그러니까 일말의 책임이 있단말이죠.ㅎㅎㅎ
어머나 감동을 깨는 덧글 죄송합니다만...
저 대형 달팽이...집이 없네요? 그럼 괄태충에 더 가깝지 않을까....
본문에 집이 없다고 했잖습니까! ㅋㅋㅋㅋ 괄태충은 처음 들어요. 끝에 충 들어가면 욕 아닌가요???? ㅋㅋㅋㅋ 근데 정말 지금봐도 너무 크네요. 저도 잘 못보겠다 싶은 것이 올리지 말걸 그랬나 싶기도.....
민달팽이에요 ㅋㅋ저도 괄태충으로 알고 있었는데 방금 검색해보니 그놈이 그놈이군요! ㅋㅋㅋㅋ
이런 소중한 경험 제 인생에 한번쯤은 할 수 있을런지..
아무튼 너무 부러울 따름입니다.
분명 팁투요님은 제가 해보지 못한 소중한 경험들을 많이 하셨을 거예요 :-)
산이 가파르거나 하지는 않나요? 사진으로 보면 완만해 보이기는 합니다만 어두운데다ㅜ길이 험하거나 하지는 않나 해서요. 말하지 않고 걷고 듣고 느끼며 걷는 여행... 사진이 나오기 전까지는 글을 따라 뭔가가 그려지는 듯 합니다. 오며 가며 같은 길을 걸으며 만났던 친구들을 다시 만나고 샌드위치를 나눠먹는... 한편의 영화와도 같습니다. 늘~ 글 잘 읽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제가 오르막은 정말 쥐약인데 산을 오르느라 힘들었던 건 딱 두 번이었어요. 심지어 첫날 피레네 산맥도 그리 힘들지는 않더라구요. 완만하니 오를만 하더랍니다. 게다가 점점 다리에 근육이 붙어서 나중에는 오르막이 반갑기까지 한 현상이... 나이 지긋하신 분들도 걷는 길이니까요. 순례길 글은 여러모로 부끄러운데.. 잘 읽어주고 가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